axeman8 2016.03.17 22:35
1. “일본인 개개인을 괴물화하지 않는다면, 조선인 개개인을 무기력한 소녀로 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괴물’ - 가해자의 비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은 연출자의 자유고 또 ‘괴물과 맡은 비인간성’은 생존자의 증언이 그 뿌리다. ‘무기력한 소녀고 그린’ 것이 아니고, 실제 무기력한 소녀들이었지 않은가.

2. “그러나 방대한 양의 증언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맞는 말이다. 손희정씨 당신은 아우슈비츠에서 독일군의 만행을 담는 영화를 만들 때, 강제 노동을 하다 잠시 쉬는 수감자들의 모습을 주로 담겠는가, 아니면 독일군에게 폭행당하고 가스실에 끌려가는 장면을 주로 담겠는가? 이 영화는 후자를 택한 것이고, 당신 말대로 진부한 선택이었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이런 ‘만행 고발’을 추구하는 영화들이 그런 선택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3. “드라마는 발가벗겨진 채로 두드려맞는 여성의 몸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던져놓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렇게 한낱 ‘몸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하루하루와 그 일상을 버텨내는 마음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눈길’처럼 표현하지 않고 날것을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인가?

4. “미하엘 하네케의 말처럼,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폭력 그 자체의 무자비함을 날것으로 제시하는 것만큼 강력하게 고통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역설적으로 당신이 비교우위로 제시하는 콘돔을 세탁하며 보여주는 ‘삶의 비루함’이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겪은 고통을 일부 미화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는가? 총검으로 태아와 자궁을 송두리째 강제 적출당하는 상황을 ‘직접 겪은 분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것이 영화관 밖의 현실일 때, 과연 드라마에서 보여준 ‘콘돔을 세탁하는 일상에 투영된 삶의 비루함’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그런 표현이 할머니들을 위로하는가, 무능한 후손들이 뒤늦은 분노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국제적인 공론화에 기여를 할 수 있는가. 손희정씨,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우회적으로 ‘우아하게’ 기록된 폭력인가 아니면 국제적 공분을 일으킬 수 있는 기폭제인가. 당신의 글을 보노라면 전자를 원하는 것 같은데, 적어도 지금 이 ‘현실’을 보노라면 팔자 좋은 이의 이론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5. “그러므로 접신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시간을 공유할 수 없고, 기억/기록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화해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는 상상력이야말로 사유의 지체와 정치적 퇴행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잊고 싶었던 악몽과의 재회를 위한 도구로 ‘접신’을 사용하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고 클리셰라고 할 수도 있으나 죄악은 아니다. 그리고 ‘~상상력이야말로 사유의 지체와 정치적 퇴행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라는 문장은, 이 글에 산재한 나쁜 문장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으로써, 편파적 독서(사회과학서적 번역본일 것이다)가 가져온 우리말 글쓰기의 퇴행을 드러낸다. 일단 ‘상상력(=상상하는 힘)’이란 단어는 지체와 퇴행의 목적어로 사용할 수 없다. ‘뜀박질이 느려졌다’고 표현하지 ‘빨리 뛰는 능력이 퇴행했다’고 쓰지 않는다. 우리말을 좀 더 사랑하고 글다운 글을 써주었으면 한다.

6. “<귀향>이 선보이는 서사와 이미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정치적 맥락의 결합이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한-미-일 안보체제’라는 이름의 제국주의가 내셔널리즘이라는 배타적 공동체 감각을 통해서 어떻게 영속되는 가이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대신 ‘민족주의’라고 쓰고, “제국주의가 민족주의에 어떻게 스며들어 영속되는 가이기 때문이다.”라고 고치면 되겠다. 배타적이지 않고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국수주의/민족주의는 없다. 국수주의/민족주의가 곧 그러한 특징을 함의하는 단어다. ‘의학적인 의사’라고 하지 않는다.

7. “<귀향>의 놀라운 흥행은 이 12•28 합의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자 항의의 표시에 다름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아하지 않아도 ‘필요한’ 영화인 것이다.

8. “그런데 그 영화에서 일본인 개개인은 괴물이 되어버렸고, 한국인은 그 이미지를 경유해 분노하고 역사에 대한 기억을 만들며, 다시 ‘우리’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영화의 역사 재현이 일종의 보철 기억으로서 공적 기억의 누락된 부분을 채워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일제(일본 제국) 시대의 ‘일본군’을 괴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머리 다섯 개 달린 일본군이 나오진 않음에도 ‘괴물’이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함은 사유의 지체와 문학적 퇴행을 드러낸다. 역사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 우리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린가. 역사에 대한 기억을 만들 수는 없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끔찍한 역사를 ‘상기시킨다’는 것이 맞다. 또한, 우리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12.28 합의에 대한 ‘공분’이 일어나는 것이다.

9. “국가적 차원에서는 서로 영혼 없는 ‘평화로운 화해’를 말하면서 전 지구적 군사주의를 지속하고, 바로 그 때문에 한국의 대중은 ‘사악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소화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혐오를 키운다. 그리고 이런 혐오는 일본 우익들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이미 <귀향>의 제작에 참여한 재일조선인 배우들은 극우단체의 보복 가능성 때문에 공개적인 홍보 활동도 못하고 있다.”
손희정씨,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피해자 국가가 가해자 국가와 말도 안 되는 ‘합의’를 하였고, 때마침 나온 과거의 만행에 대한 영화가 공분을 일으켰는데, 극우주의의 기저를 이루는 것 또한 그런 혐오와 분노이므로 한국 또한 이 영화를 통해 극우화되고 있다는 것인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실제 겪은 일을 적나라하게 재현한 영화를 본 ‘말도 안 되는 합의를 한 정부’의 시민들의 공분이 극우주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가?

10.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해원이 아니라 제도적 해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혼을 말하는 이 진부한 상상력으로 몰려가는 것이 정부에 제도적 해결을 요구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극장에 걸린 영화의 관객수가 정부에 대한 경고이자 메시지가 되기를 희망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참으로 ‘우리-관객’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하다.”
그렇게 영화의 관객수가 정부에 대한 경고이자 메시지가 되기를 희망해야 하는 무기력한 상황에서 당신이 쓴 이 글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비아냥인가 냉소인가. 이 글이 제도적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그나마 해원에 도움이 되는가? 나는 적어도 이 두 가지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11. “우리의 논의는 진부한 재현에 대한 비판 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귀향>이라는 텍스트를 경유해서 도달해야 할 곳은 어떻게 새로운 ‘우리’를 상상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문장 이전까지 손희정씨 당신은 단 한 번도 ‘진부한 재현에 대한 비판 그 자체’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지 않았/못하지 않았는지? 참 진부한 글이다, 그나저나.

12. “배제와 포함의 동학 속에서 형성되는 배타적 공동체 감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를 조직해가는 것이야말로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에 다다르는 길이며, 이 배반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하나의 방법이다. 이제 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
비문이다. ‘동학’이란 단어는 부적절하게 쓰였다. 조사 ‘는’은 문장 안에서 다른 대상과 대조될 때 혹은 해당 대상이 화제임을 나타내거나 강조해야 할 때 쓰인다. ‘배제와 포함의 동학’자체가 비문이다. ‘혐오하지만 사랑하는’과 같은 말이다. 배제와 포함이 둘 다 존중되는 환경이나 분위기를 말하고자 했다면, 배제의 상대어로 ‘포함’이 아닌 ‘포용’이 옳다.
손희정씨, 당신이 제시(?)하는 “배제와 포함의 동학 속에서 형성되는 배타적 공동체 감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란 무엇인가? 당신은 이 글 전체에서 그 새로운 연대의 구체적 실천 방안이나 흐릿한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했/않았고, 그저 ‘괴물’과 ‘내셔널리즘’만 반복했다. 아울러 그런 연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에 다다르는 길이라는 것은 어찌 확신하는가? 그나저나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손희정’은 있는가?

페미니스트들이 조직생활을 겪어보지 않고도 직장 내 성차별을 직접 겪는 여성들을 가르치려들고, 성소수자 안에서도 여성 성소수자를 특정화하고 그에 대한 세미나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생물학적으로 여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인가?)’을 따로 떼어 논하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라는 개념에 반하는 것이고, 이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남자들과 남성의 몸으로 태어난 ‘여자’들에 대한 배타적이고 무례한 행위다. 하지만 그런 편협한 사고방식의 무분별한 적용을 보고 있노라면, 일단 남성의 영혼을 갖고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레즈비언은 여성 성소수자에 해당되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차체하고라도, 최소한 이런 글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는 납득이 간다.
‘입진보’, ‘씹선비’ 이런 단어들은 출신 학교와 출강했던 강단과 저서로 경력이 채워진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이런 이들은 자신이 비극을 직접 겪지 못한 덕에 ‘이론만 떠들어댈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체험과 경험의 부재는 수집하고 전해 듣는 비극에 대한 망상과 오판을 가중시키고 자신의 피해의식과 우월감을 동시에 키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그 어리석음을 증명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손희정씨, 펜을 내려놓으면 어떨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귀향’이나 ‘눈길’과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나무를 아껴줄 수는 있다. 우리말도 아껴줄 수 있다.
나무도 우리말도,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지 않은가.
taehee71 2016.03.27 17:50
수용소 집단성폭력씬을 통해 지옥이 저기였다...내 상상보다도 더 심한  지옥...
보통 실물이 사람의 상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물론 긍정적인 상상일때 말이죠..(예를들면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이상형인 주인공를 영화배우가 따라잡을 수 없는것등)
40대 중반인 저에게도 그 장면은 더 끔찍하여 충격이 증폭됐습니다.

또한, 저는 손희정님 글과는 오히려 반대로 다나까역의 군인뿐 아니라 다른 일본군인들 이 악마가 아니라 그들도 피해자이구나. 저들도 죽음과 전쟁의 공포와 싸우며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을 '귀향'을 통해 처음 했습니다.
현대 나치를 그린 홀로코스트류 영화의 점잖음과 은유성은 나치들의 후예들이  사과를 하고 인정하고 있기에 나온 여유이지 않을까요?  우리와는 아주 한참 다른 상황이죠.. 지금은 이러저런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로 말해야 할 시기라 생각합니다. 그런 다양한 방식데 대해 우선은 인정해 주는 건 어떨까요?
jhkimfilm 2016.08.30 23:20
공감합니다. 영화의 표현방식이 너무나 통속적이라 오히려 진실의 무게를 갉아먹는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