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워런 비티 (Warren Beatty)

1937-03-30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5.5

/

네티즌7.2

| 수상내역 3

기본정보

  • 다른 이름워렌 비티
  • 직업배우
  • 생년월일1937-03-30
  • 성별

소개

스크린상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배우 중 하나이며 영화제작자와 감독으로도 활약하는 워런 비티는 초기의 ‘예쁘장한 소년’의 이미지에서 탈바꿈하여 자신만의 경력을 쌓는 데 성공한 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배우가 메가폰을 잡는 것은 이제 할리우드에서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한 분야에서의 성공을 밑천으로 잠시 부리는 만용인지, 아니면 진정한 천재성의 발로인가는 항상 작품으로 증명돼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레드퍼드에 이어 요즘은 멜 깁슨과 케빈 코스트너까지 스타 출신 감독 대열에 합류했지만, 워런 비티의 작품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왜냐면 그의 본격적인 감독 데뷔작인 <레즈>는 할리우드에선 보기 힘든 용기있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의 직업 못지 않게 만나는 여배우마다 스캔들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바람둥이로 더 유명세를 뿌리며 스크린 속에서나 스크린 밖에서 항상 화젯거리를 제공하였다. <초원의 빛>에서 공연했던 내털리 우드를 필두로 레슬리 캐론, 줄리 크리스티, 다이앤 키튼, 이자벨 아자니, 마돈나 그리고 아네트 베닝까지 워런 비티가 공연했던 작품 속의 연인들을 모두 실제 연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의 바람기를 잠재우고 결혼까지 성공한 여배우로 아네트 베닝이 그의 아내가 되었다.

유명 여배우 셜리 매클레인의 남동생으로 태어난 그는, 이미 10살 때부터 아마추어 극단에 서면서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대학을 1년 다녔지만 스텔라 아들러에게 연기지도를 받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 이후 무대와 TV물을 전전하다, 그의 나이 24살 되던 해, 배우들을 잘 지도하기로 소문난, 엘리아 카잔 감독의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1961)으로 스크린 데뷔의 꿈을 이룬다.

이후 그의 약간은 귀족적인 이미지와 교묘하게 회피적이고 나약한 캐릭터는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로서 그의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결정적으로 그가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게 된 데는 공황시대의 허무적인 갱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1967)에서부터였다. 젊고 반항적인 그리고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그의 이미지는 바로 도덕성과 정체성에 있어 극심한 혼란기를 겪던 1960년대의 미국의 자화상과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그는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몇년간 스크린을 떠났던 그는 로버트 알트먼의 <매캐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and Mrs Miller>(1971)이나 앨런 파큘라 감독의 <암살단 The Parallax View>(1974) 같은 당대의 유명감독의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좀더 개인적인 작품들, 남부 캘리포니아의 헤어 드레서역의 <샴푸 Shampoo>(1975)를 제작했고 1941년 작품 <미스터 조단이 온다>를 리메이크한 <헤븐 캔 웨이트 Heaven Can Wait>(1978)를 벅 헨리와 공동 감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로버트 타운과 <샴푸>의 각본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에 공동 후보로 오르는 등, 자신의 팔방미인격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리고 좀더 신중하고 완벽주의자로서 한 작품을 위해 오래 기다리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비티의 다음번 영화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레즈 Reds>(1981)였다. 알다시피 <레즈>가 발표된 81년의 미국은 모든 면에서 보수와 반동의 시기였다. 새로 등장한 레이건 행정부는 ‘강한 미국’을 부르짖으며 시대착오적인 냉전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존립근거로 삼고 있었고 60년대에 전개된 히피즘을 필두로 한 사회저항운동은 침잠의 70년대를 거쳐 무관심과 냉소의 그늘로 잦아들고 있었다. 여기에 워런 비티는 엉뚱하게도 한 ‘빨갱이’의 이야기를 들고나왔던 것이다. 바로 미국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볼셰비키 10월혁명에 참여한 진보적 지식인 존 리드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 것. 제목도 도전적인 ‘레즈-빨갱이들’였다. <레즈>는 해골처럼 늙어버린 노인들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아직도 존 리드와 볼셰비키혁명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러나 지금은 존재감마저도 비현실적으로 사라져버린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다가 영화는 곧바로 20세기 초엽의 미국으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며 존 리드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추적한다. <레즈>는 이전까지 바람둥이로만 알려졌던 배우 출신 감독의 작품치고는 주제의 선택이나 연출력 면에서 놀라울 정도의 정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워런 비티는 결코 존 리드를 영웅으로만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의 사상, 사랑, 인간관계가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골고루 묘사되면서도 역사 속에서 박제화된 인물 전기가 아닌 오늘의 미국사회에서 바라본 인간으로서 존 리드의 면모를 가감없이 묘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즈>로 지성파 감독으로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 다음에 보인 그의 다음 행보는 다시 한번의 변신이었다. <이쉬탈>에서 배우로서 이자벨 아자니와 또 한번 염문을 뿌린 워런 비티가 감독으로서 선택한 다음 작품은 의외로 <딕 트레이시 Dick Tracy>(1990)였다. 특이한 비주얼상의 양식미가 넘치는 작품이었지만 어찌보면 코믹만화를 어정쩡하게 스크린으로 옮긴 그야말로 ‘만화스런’ 작품에 불과한 이 영화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은 워런 비티는 이 작품으로 드디어 아카데미 분장상과 음악상을 수상한다. 혹자는 감독이 아니라 연기의 측면에서는 그가 연기한 존 리드나 딕 트레이시나 단조롭기는 매한가지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잠시, 이번엔 배리 레빈슨을 감독으로 기용하고 자신은 배우로 물러앉은 <벅시> (1991)로 다시 한번 화제를 일으켰다. 감독과 제작보다는 연기에만 몰두함으로써 근자 들어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이 작품에서 그는 할리우드의 가장 악명높은 총각딱지를 떼고 한 아이 아버지가 되고 공연한 여배우 아네트 베닝과 결혼을 하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출연한 <러브 어페어>는 베닝과의 부부애를 과시한 것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워런 비티는 궁극적으로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한가지의 이미지로 고정되는 것을 극히 싫어했으며, 그것은 여자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작업은 현재로도 진행형이며 한 작품의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그의 행보로 볼 때. 앞으로도 워런 비티가 영화계의 영원한 돈주앙으로 남을지, 아니면 진정한 작가로 남을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미지라고 보겠다. <b>[씨네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