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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John Ford)

1894-02-01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7.3

기본정보

  • 다른 이름Jack Ford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94-02-01
  • 사망1973-08-31
  • 성별

소개

서부극은 미국 영화역사상 가장 양식적이며 풍부한 시각적 쾌감과 탄력적인 내러티브를 갖는 장르다. 서부 개척과 영웅담은 미국 건국신화의 맥락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 서부극이 영화에 도입된 후 두가지 아이콘이 서부극을 상징했는데, 그것은 바로 배우 존 웨인과 유타의 모뉴멘트 밸리였다. 그리고 이 두 아이콘의 배후에는 존 포드가 존재한다. 존 웨인이 ‘코치’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던 이 사나이는 할리우드의 고전기에 미국 서부극의 알파요 오메가이자, 무성영화 이후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던 서부극을 부활시킨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다른 어떤 감독들보다 서부극을 잘 이해했고 서부극을 단순한 건국신화에서 미국역사와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자의식 강한 영화로 변모시켰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모든 것을 스튜디오 시스템의 제약하에서 수행해나갔다는 것이다.

존 포드는 1895년 2월 미국 메인주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예로 태어났다. 메인주립대학을 단 3주간 수학한 후 그만두고, 1914년 유니버설사에서 배우 겸 감독으로 일하던 형 프란시스의 손에 이끌려 할리우드에 오게 된다. 후에 “무엇이 당신을 할리우드로 오게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에 “기차”라고 대답했던 이 무뚝뚝한 사나이는 이때부터 ‘잭 포드’라는 예명으로 영화계에서 일하면서 배우, 스턴트맨, 시각효과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아하게 된다.

1917년 형 프란시스가 유니버설 간부와의 잦은 다툼으로 스튜디오를 떠나게 됐을 때도 존 포드는 스튜디오에 남아 그의 첫 작품 <토네이도 The Tornado>를 감독한다. <철마 Iron Horse> <세 악당 Three Bad Men> 같은 그의 무성영화 시대의 작품들 역시 대부분 웨스턴이었으며, 이 시기부터 그는 야외에서 행해지는 액션 신에 장대한 스펙터클을 집어넣음으로써 초기 웨스턴의 원형인 카우보이 오페라에 시각 요소를 강화했다. 1920년 평생의 반려 메리 맥브라이드 스미스와 결혼했고 1921년 유니버설을 떠나 폭스 스튜디오에서 일하게 된다.

존 포드의 무성영화 시기의 후기 작품들 특히 <네 아들 Four Sons>(1928) 같은 작품에서는 당시 할리우드를 풍미하던 독일 표현주의적 영향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나 곧 그는 이러한 스타일의 접근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영화적 스타일을 걷기 시작한다. 유성영화의 도래는 포드에게도 힘든 난관이자 도전의 기회였다. 사운드의 도래는 새로운 이야기 전개 방식의 전개를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이에 포드는 <철마>에서 호흡을 맞춘 스타 조지 오브라이언과 함께 이 난관을 헤쳐나가게 된다.

1930년대는 포드에게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좀더 개인적인 색채가 짙은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1935년 아일랜드 혁명의 무용담을 그린 영화 <밀고자 Infomer>로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탔고, 1939년에는 초기 걸작 <역마차 Stagecoach>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두가지면에서 신기원을 이룬 작품이기도 했다. 즉 서부극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으로 모뉴멘트 밸리를 정착시킨 영화라는 점, 그리고 계곡의 광대함과 사회적 의미를 지닌 역마차의 동작을 대조하며 시각 요소의 대립을 통한 감각적이고 통제된 카메라워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부극은 쇠퇴해가는 장르였다. 초기 유성영화의 기술적 한계와 1930년부터 발달했던 도시의 대두로 당시 영화들은 도시와 연관된 여러 현대적인 주제들로 제작방향을 바꾸게 됐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정교한 녹음기술과 이동이 쉬운 카메라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서부극은 다시 생기를 찾게 됐다. <역마차>는 주제와 양식면에서 초기 서부극과 결별을 고하고 서부극 양식을 재생시키고 서부극의 잠재적인 아름다움과 주제적 복합성을 전면으로 이끈 영화였다. <젊은 링컨 Young Lincoln>과 <모호크족의 북소리 Drums along the Mohawk> 같은 흥행작들도 1939년 만들어졌다. 이러한 성공들로 인하여 포드는 할리우드에서 행해진 일련의 대규모 예산 영화의 감독으로 발탁될 수 있었고, 1940년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와 1941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로 연속적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으며 감독으로서 완숙한 기량을 선보인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그는 OSS라는 전쟁 다큐멘터리들을 만들며 잠시 할리우드와 멀어지는 듯했다. 물론 <미드웨이의 전쟁 The Battle of Midway>(1942)과 <12월7일 December 7th>(1943)로 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했지만, 2차대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그는 주류 성인 서부극들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웨스턴들은 1946년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와 1948년부터 50년까지 만들었던 기병대 삼부작 <아파치 요새 Fort Apache>(1948) <노란 리본 She Wore a Yellow Ribbon>(1949) <리오 그란데 Rio Grande>(1950)가 유명하다. <황야의 결투>는 이전 영화보다 더욱 서정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해졌으며, 공동체와 영웅의 긍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유토피아 서부극이었고, 기병대 삼부작은 개인보다는 기병대라는 집단적인 영웅을 만들어낸 서부극과 전쟁영화의 혼합장르였다.

기병대 삼부작 이후 포드는 1950년대 초반 <수색자 The Searchers>(1956)를 만들기까지 5년의 안식년을 지낸다. 이 시기 그는 <황야의 결투>를 재포장한 <왜건 마스터 Wagon Master>(1950)나 자신의 아일랜드 선조들의 연애담과 유머를 결합한 <조용한 사나이 The Quiet Man>(1952)로 극영화로는 4번째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나 그의 장기인 서부극은 나오지 않았다.

0년대 그의 영화들은 질적인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비평적인 측면에서의 찬사는 단 한 작품 <수색자>에 모아지고 있으며 그외 작품은 지나치게 센티멘털하거나 애국적이기도 하다. 1956년 발표한 <수색자>는 그의 진정한 걸작으로 서부와 영웅에 대한 가장 복잡하고 가장 비판적이며, 가장 생생한 자화상을 창조하고 있다. <수색자>는 인디언 무리들에 의해 가족이 살해당한 후, 납치된 조카딸을 찾기 위해 끈질기게 인디언들을 수색하는 방랑하는 영웅 이산 에드워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인디언은 주인공 이산과 대등한 문화와 심리적 동기를 지닌 한 개체로 표현되고, 주인공 영웅과 적대자의 유사성은 서부에서의 갈등과 위협이라는 측면을 극대화하게 된다. 결국 포드는 자신이 창조한 서부극 문화의 이상화를 포기하고 웨스턴이 가져다준 이미지 자체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1962년 발표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는 서부와 사라져가는 영웅, 서부극에 대한 고별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영화는 과거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하면서, 사실과 전설, 역사와 신화 같은 서부극을 둘러싼 대립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오늘에 이르렀는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후 1964년 <샤이엔의 가을 Cheyenne Autumn> 이후의 작품들은 다소 과잉의 센티멘털리즘과 들쭉날쭉한 질을 보여주었고 <7명의 여자 Seven Women>(1966)를 마지막으로 그의 반세기에 걸친 영화활동은 막을 내렸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일관성을 지킨 우직한 사내였다. 한명의 아내와 한명의 아들 딸들 그리고 가톨릭 신자이며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가 언제나 서부극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생 100편이 넘는 할리우드영화를 감독했고 <분노의 포도>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나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진지한 영화들로 인하여 아카데미상을 6번이나 수상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여정 중 서부극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포드의 영화인생을 따라가는 것은 바로 서부극 역사를 더듬는 길이다. 어떤 감독도 존 포드처럼 일관된 스타일과 감수성, 본능적인 이해력을 지니고 서부극을 대한 적은 없었다. 서부극은 존 포드보다 더 오래 존재하고 있지만 영원히 그에게 빚을 진 셈이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