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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베르토프 (Dziga Vertov)

1896-01-02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9

기본정보

  • 다른 이름Denis Abramovich Kaufman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96-01-02
  • 사망1954-02-12
  • 성별

소개

대표작 <키노 프라우다> <키노 글라츠> <소비에트여 진군하라> <세계의 6분의 1> <카메라를 든 사나이> <열광: 돈바사의 교향곡> <레닌의 세가지 노래> <자장가> <세 여성 영웅들>
비디오 출시작 없음

후에 소비에트 다큐멘터리의 개척자적인 인물로서 지가 베르토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될 데니스 아르카비디치 카우프만은 1896년 1월에 지금은 폴란드 땅인 비알리스토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유대인 사서였던 그 집안의 다른 두 형제들은 나중에 카메라맨이 되었다. 미하일은 1929년까지 베르토프와 같이 작업했고, 막내 보리스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일했다.
어렸을 적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10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던 데니스는 20대 초에 미래주의 운동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그는 ‘선회하는 정상 spinning top’이라는 의미의 지가 베르토프를 필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베르토프는 1918년 모스크바 영화 위원회의 뉴스릴 부서를 이끌던 미하일 콜초프(Mikhail Koltsov)의 조수로 기용되면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베르토프는 <주간 영화 Kino-Nedelia> (1918∼19)라는 관습적인 뉴스릴의 편집일을 하면서 편집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원자재가 부족했던 1920년대 초기 소련의 상황 자체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 사용된 필름 조각들을 효과적으로 찾아낼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베르토프에게 연대기적 순서나 장소에 관계 없이 필름 조각들을 모아 붙이는 작업은 관객들을 정치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표현력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쇼트와 쇼트를 병치하면 각각의 쇼트가 따로 존재할 때와는 다른 의미가 부가된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이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몽타주로 발전시킨 편집의 일종의 맹아적 형태였다.
1919년에 베르토프는 재능있는 영화편집인이자 장차 그의 아내가 될 엘리자베타 스빌로바와 몇몇 다른 젊은 영화감독들과 함께 (영화-눈 cinema-eye라는 의미의) ‘키노키’(kinoki) 집단을 결성했다. 이 집단에서의 활동을 통해 베르토프는 자신의 이론적·실천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베르토프의 이론에서 중심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부지불식간에 포착되는 삶’이었다. 그는 스타가 출연하고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플롯이 있는 영화를 거부했다. 그는 미래의 영화는 곧 사실(fact)의 영화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의 눈보다 우위에 있는 카메라의 렌즈가 이 세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것이고 시각적인 혼란을 응집력있고 객관적인 상(像)으로 조직할 것이라고 보았다. 베르토프가 내세운 또다른 주요 신조는 ‘리얼리티에 대한 공산주의적인 해석’이었다. 그는 마르크시즘만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현실 분석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그는 당 기관지의 이름을 따서 1922년부터 <키노 프라우다 Kino-Pravda>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매달 나오는 일련의 뉴스영화인 이 시리즈는 1925년까지 23편이 이어졌다. 베르토프의 이 영화들이 단순한 프로파간다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음악, 시, 과학에 대한 베르토프 자신의 관심들의 개인적인 혼합체였고, 소련의 현실에 대한 개인적이고 매우 감동적인 비전을 강렬하게 반영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에 이미 베르토프의 이상주의적인 논문과 혁신적인 테크닉을 사용한 영화들은 공산당에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베르토프의 대표작 <카메라를 든 사나이 Chelovek s kinoapparatom>(1929)는 언어가 아닌 시각 이미지로 자신의 다큐멘터리 이론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다양하고 혁신적인 형식적 수단을 이용해 도회적 삶의 모자이크를 제시해줄 뿐 아니라 영화와 현실, 그리고 영화 언어와 인간의 지각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담론에 관객들을 참여케 한다. 베르토프는 사운드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한 적응의 측면에서도 여타 소련의 무성영화 감독들을 앞서갔다. 예를 들어 그의 첫번째 유성영화 <열광: 돈바사의 교향곡 Entuziazm-simfoniya Donbassa>(1930)은 사운드 트랙으로 소음의 교향곡을 이용한 걸작이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말 스탈린 치하에서 베르토프는 지위를 박탈당했고 관습적인 뉴스릴 편집일만 할 수 있었다.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릴 동안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954년 2월12일 암으로 사망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