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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Charles Chaplin)

1889-04-16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8.3

기본정보

  • 다른 이름Ch. Chaplin; Charlie Chaplin; Sir Charles Chaplin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89-04-16
  • 사망1977-12-25
  • 성별

소개

대표작 <키드> <시티 라이트> <위대한 독재자>
비디오출시작 <이민선> <파리의 여인> <살인광 시대> <라임 라이트>

무성 코미디영화를 하나의 가치있는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단지 깜빡이는 활동사진이 아니라 영화에 정서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예술가.

찰스 스펜서 채플린은 1889년 런던 뮤직홀의 삼류 배우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한살 때 이미 헤어졌으며, 그와 이복형 시드니는 배우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다. 채플린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했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연극무대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그와 형을 키웠으나 점차 인기가 하락하고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은 급속히 기울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정신병 증세는 날로 심해져서 결국 그는 형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러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이미 5살 때 목을 다치게 된 어머니 대신 대역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아역배우이기도 했으며, 각종 무대에서 연기를 단련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도 그가 17살 되던 해, 뮤직홀의 제왕인 프레드 카르노 사단에 들어가면서 막을 내린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팬터마임 기술과 각종 코미디에 필요한 자질들을 연마해나갔고, 채플린의 코믹한 취객 흉내는 극단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1912년 카르노를 따라나선 미국 순회공연에서 그는 코미디계의 대부인 맥 세네트의 눈에 띄어 대망의 스크린 데뷔를 앞두고 미국으로 활동의 근거지를 옮긴다.

그의 영화데뷔는 세네트의 키스톤영화사에서 1914년 만든 <생계 Making a Living>였으나 콧수염과 프록코트를 입은 단역 신사에 그 비중도 작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4년 선보인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Kid Auto Races at Venice>에서 그는 처음으로 중절모에 짤막한 양복바지, 지팡이를 휘두르는 그 특유의 ‘방랑자 캐릭터’를 선보이게 된다. 그의 이러한 캐릭터는 관객들로부터 깊은 연민과 동정을 한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일종의 소외자로 주변부적인 삶이 갖는 비애와 유머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얻은 셈이었다.

역시 1914년 그는 자신의 13번째 작품 <비에 흠뻑 젖어 Caught in the Rain>에서부터 영화를 감독하게 되고, 단순한 엎치락뒤치락의 슬랩스틱코미디에서 벗어나게 된다. 1915년 <방랑자 The Tramp>에서 마침내 카메라 너머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사라지는 방랑신사의 뒷모습이라는 특유의 라스트신을 선보인다.

1916년 그는 뮤추얼로 영화사를 옮긴다. 주급 1만달러 요구도 받아들여졌고, 완벽한 창의적 자율권과 더 긴 기간(그래도 한 달이었지만) 동안 촬영한 적은 편수의 영화제작의 꿈이 이루어졌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스케이트 장 The Rink>(1916) <이지 스트리트 Easy Street>(1917) <요양 The Cure>(1917) <이민선 The Immigrant>(1917) 등이 있다.

1918년 퍼스트 내셔널사는 100만달러의 계약으로 그를 손짓했다. 1년 8편이란 여유있는 영화제작이 보장되었을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배급망으로 그의 영화가 선보일 기회이기도 했다. <어깨 총 Shoulder Arms>(1918)과 <키드 The Kid>(1921)는 퍼스트 내셔널사의 최고 히트작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수입을 털고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완전한 자유와 자신만의 안정된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1919년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W. 그리피스와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는 당시 미국의 4대 영화사의 하나가 되었으며, 퍼스트 내셔널과의 계약이 끝나자 다시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독점적으로 UA에서 영화를 만들게 된다. 가난한 삼류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던 채플린은 이제 선셋대로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의 UA에서의 첫 작품은 <파리의 여인 A Woman of Paris>(1923)이었고, 여기서 자신과 가장 공연을 많이 했던 여배우 에드나 파비언스와 아돌프 멘주를 주연시키고, 그 자신은 단지 작은 카메오를 맡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나 필름은 완전히 흥행에 실패하고 그는 다시 자신의 장기이자 가장 안전한 방랑자를 위한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1925)를 만들게 된다. 구두를 삶아 먹는 기상천외의 팬터마임을 보였던 채플린은 ‘굶주림’이라는 코미디적 소재에 맞지 않는 진지한 소재를 채플린다운 매서운 유머로 승화시켰다. 이 영화는 세팅과 연기 모두에서 디테일이 살아 있는 생생함으로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후에도 여러번 리메이크된다. 또다른 수작 코미디 <서커스 The Circus>는 1928년 첫번째 오스카상에서 특별상을 받는 등 그의 영화 인생은 탄탄대로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채플린은 원치 않는 언론의 희생양이나 스캔들의 주역으로 계속 등장하게 되는 등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일단 그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쟁 채권을 사자는 캠페인에 열을 올렸지만 고국으로 돌아가 군대에 입영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게 된다. 또한 그의 소녀들에 대한 취향은 유명한 것이어서 그의 네번의 결혼은 모두 십대 소녀와 이루어졌다.

1928년 토키시대의 막이 오르면서 그도 유성영화의 거센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그의 응답은 매우 간단한 것이어서, 그는 유성영화를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한다. 본능적으로 그는 유성영화가 그가 그려내는 방랑자의 이미지와 무성영화가 주는 다양한 암시와 상상력을 한순간에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대신 오리지널 스코어를 이용한 음악적 배경을 입힌 좋은 무성영화를 만드는 데 주력하게 된다. 이러한 음악과 그의 유려한 팬터마임의 결합으로 이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그의 영화들은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맞았다.

1931년 개봉한 <시티 라이트 City Light>는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최고의 걸작으로, 여기서 그는 매우 리얼한 수법으로 미국 번영의 그늘에 가려진 부자와 빈자, 실업자와 꽃 파는 아가씨 같은 계급간의 사랑과 갈등을 짚어낸다. 특히 채플린의 도움으로 실명에서 벗어난 주인공 소녀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백만장자가 아니라 거리의 가난뱅이였음을 깨닫고 당혹함과 실망스러움이 교차되는 가운데 채플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마지막 신은, 영화사상 가장 길이 남을 명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1936년 채플린은 자신의 재능을 집대성한 것 같은 영화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를 완성한다. 폴렛 고다르와 함께 공연한 이 영화는 불황과 경제공황에 멍이 든 미국의 자화상을 <동물농장>에서처럼 풍자적인 방식으로 진단한다. 특히 자동화된 기계 속에 말살되어가는 인간성과 산업사회가 가져다주는 필연적인 인간소외의 문제를 빠른 템포의 팬터마임이나 몽타주 수법들을 동원하여 생생한 블랙유머로 잡아내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이른바 그가 ‘빨갱이’라는 비난은 그치지를 않는다. <독재자 The Great Dicta-tor>(1940)는 나치즘과 히틀러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단지 히틀러에 대한 풍자일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악의 본질을 본질화하는 측면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종래의 방랑자 이미지 대신 유대인 이발사와 독재자의 1인2역으로 멋진 연기를 펼친다. 그러나 독일계가 반수 이상 점하고 있던 미국의 영화업자들에게 이 영화가 곱게 비칠 리 없었다. 당시 미국은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고, 오히려 이 영화로 그의 좌익 경향에 대한 의심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마침내 나이 58살 때 만든 <무슈 베르두 Monsieur Verdoux>(1947)는 중년의 부자 부인들을 속여 결혼하고 이들을 죽여버리는 희대의 살인마 베르두에 관한 지독하게 시니컬한 인간성에 대한 야유와 풍자를 담고 있다. 당시 아우슈비츠나 히로시마에서의 대량 학살을 비꼰 <무슈 베르두>는 결국 미국의 여러 주에서 상영금지를 당했고,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는다.

존 벨리라는 여성의 아이가 채플린의 친자인지 여부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다는 등 사생활 들추기 작전은 그에게 점점 막다른 선택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대의 엘리아 카잔 감독이나 로버트 테일러 등 매카시 선풍에 협조했던 영화인들과 달리 마녀사냥에 굴하지 않고, 반민주활동위원회의 출두를 거부한 채 다음과 같은 회답 전보를 보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정당이나 정치 단체에 가입한 일도 없다. 나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평화주의자이다.”

1952년 그의 말년의 걸작 <라임 라이트 Lime Light>가 개봉된 해, 그는 이 영화를 런던에서 시사한 후,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미국 법무성은 채플린의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는 미국에서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법무장관은 채플린에 대해 그가 “정치적인 이유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여성의 적이며 사회주의자와도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미국에 대해 비협조적이고 냉소적이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선언은 사실상 그에게 도덕적인 상처를 입히는 파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부인 우나 오닐과 그의 자녀들과 함께 스위스에 안주했고, 1957년 영국에서 <뉴욕의 임금님 A King in New York>을 완성했다. 이는 당연히 미국의 상업주의와 자신의 반민주활동위원회의 경험을 우화적으로 풍자한 작품이었다. 이후 그는 스위스에서 평온한 말년을 보낸다. 우나 오닐과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더 낳았으며, 1964년에는 자서전을 발간하기도 했다. 예전 작품에 비해 현저하게 질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1967년에는 <홍콩의 백작부인 A Countess from Hongkong>을 감독함으로써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삶은 지난 20년간의 고립과 역경을 보상받는 측면의 것이었다. 1971년 프랑스에서 <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10편의 작품이 공개되었고, 1972년 83살의 나이로 20년 만에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하기 위해 그는 미국땅을 밟았다.

찰리 채플린은 스위스의 레만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집에서 1977년 12월25일, 그와 나흘 간격으로 태어났던 독재자보다 35년이나 더 산 후, 예수가 태어난 날 파란만장한 일생을 접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