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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 그리피스 (D.W. Griffith)

1875-01-22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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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7

기본정보

  • 다른 이름David W. Griffith; David Wark Griffith; Lawrence Griffith;Granville Hicks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75-01-22
  • 사망1948-07-21
  • 성별

소개

1900년대 초 극단의 일원으로 미국 전역을 순회공연하던 인물이 있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이 결코 미남 배우가 될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먹고 살 방도가 막막했다. 그는 무대를 뒤로 하고 시와 희곡 집필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파산은 금세 찾아왔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시나리오인 ‘토스카’를 팔기 위해 뉴욕의 에디슨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비록 그리피스는 시나리오를 팔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포터가 감독하는 <독수리 둥지로부터의 구출>에 연기자로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에디슨 스튜디오에서 바이오그래픽사로 이적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간 500여편의 단편을 만들면서 소위 미국영화사 초기를 장식한 5센트짜리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날린다.

그리피스는 두 가지 면에서 평가된다. 하나는 표현의 영역에서 할리우드 문법의 기초를 닦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장편영화의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새로운 영화의 상업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부적인 촬영기사 빌리 비처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둘은 16년간 함께 작업하면서 혁명적인 영화 기법들을 발명하기 시작했다.

아이리스, 페이드 등 다양한 기법은 물론이고 <최후의 추적>이라는 작품에서는 교차편집으로 극적 효과를 연출해냈다. 편집을 통해 긴장감을 높이고, 영화 속 사건에 관객이 정서적으로 대리 참여하는 것을 한층 강화시켰다. 재미있는 것은 클로즈업의 기법을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해 그가 신인인 젊은 배우들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릴리언 기시 자매나 메리 픽포드 같은 신인 스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1913년에 그리피스는 미국 최초의 장편 극영화인 <베튤리아의 주디스udith of Bethulia>를 만든다. 상영시간이 약 40분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당시 10분에 해당하던 필름롤 4권의 분량을 사용한 획기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그리피스는 뮤추얼사에서 일하기 위해 바이오그래픽사를 떠났다. 촬영감독인 비처와 연기자들도 함께 움직였다. 그리피스 사단을 이룬 것이다.

1914년에는 <홈, 스위트 홈>과 <양심의 복수>를 캘리포니아에서 촬영하고,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을 만들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토머스 딕슨의 소설 <가족>의 저작권을 미리 사들였다. 원작은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그리피스의 야망은 디킨스의 소설과 같이 남북전쟁에 대한 진실을 영화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사실 교차편집이라는 기법을 생각하게 된 것도 디킨스 작품의 구성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1914년 7월에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엄청난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본격적인 모금과 홍보활동에 나선다. 그리고 11만달러의 예산을 들여 당시 최대의 규모로 걸작을 완성했다. 그러나 남북전쟁에 대한 묘사와 특히 전쟁 이후 재건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도입부는 17세기 미국의 노예제도의 시작과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등장을 서술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포화의 시기와 2부에서는 전쟁이 카메론 집안에 미친 영향들을 들려준다. 남부의 패전 이후의 몰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비극적인 현실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흑인들을 추잡하고 야만적으로 묘사한 부분 때문에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피스 자신도 그러한 대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가 카메라의 영역을 새롭게 넓혔다는 점은 인정돼야 할 듯하다. 특히 파노라마로 촬영한 전투장면은 시선을 잡아끈다. 당시 무성영화사상 가장 성공한 이 작품은 관람료 2달러 상영시대를 열었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처럼 획기적인 변화였다.

다음 영화인 <편협 Intolerance>은 한층 더 대단한 작품이었지만 그리피스의 쇠락을 재촉했다. 시작은 페르시아인의 바빌로니아 제국 정복을 다룬다. 여기에 그리스도 이야기, 카트린의 위그노 교도 박해와 현대를 다룬 부분에서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의 투쟁 등 시공간을 교차편집한 실험적인 내러티브는 상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너무나 앞서갔다. 구성은 지나치게 복잡했고, 빠른 화면 교차는 당시 관객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웠다. 그러나 <편협>은 서사극의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았다. 이후 나온 일반극영화들의 구성이 <편협>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제적 파산은 그에게 파라마운트사에 소속되어 한평생 이류영화들을 만들 수밖에 없는 운명을 불러왔다.

비록 1930년에 만든 <링컨 Abraham Linclon>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1931년에 만든 <투쟁The Struggle>은 내용과 형식에서 기존 관습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꿈의 공장 할리우드를 세운 그의 공로가 바래지는 것은 아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