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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Alejandro Jodorowsky)

1929-02-07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7.2

/

네티즌7.7

기본정보

  • 다른 이름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 알렉산드로 조도로프스키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9-02-07
  • 성별

소개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영화 속에 절묘하게 투영시킨 ‘조도로프스키’ 감독.
보통 사람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했을 기발한 영상들을 자신의 영화 속에 가득 담아 관객들을 넋 나가게 만들어버린 이 괴짜감독은, 판토마임, 연극, 만화 연재, 초현실주의 잡지 출간, 소설, 타로카드 점술 등 거의 모든 예술영역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말 그대로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1929년 칠레의 볼리비아 국경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태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서커스단 배우의 아들이었던 운명적(?)탓에 어린 시절부터 피에로 연기와 마리오네트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산차고 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1953년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에 반항하며 돌연 학업을 중단하고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아방가르드 문화를 온 몸으로 접하며 판토마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장 루이바로’의 스승이었던 판토마임의 대가 ‘에티엔느 두크레’ 에게서 마임을 배웠으며, 그 곳에서 세계 최고의 마임니스트 ‘마르셀 마르소’와 함께 마임쇼를 하기도 했다. 이 시기쯤, 그는 가장 활발한 창작 활동을 보였는데, 직접 카메라를 구입해서 판토마임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후 1962년, 잔혹 연극의 대가이며 초현실주의자인 ‘페르난도 아라발’, ‘롤랑 토포르’와 함께 '파닉 무브방' 그룹을 조직해, 여러 해프닝과 퍼포먼스를 벌이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 밖에도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문학을 유럽 지역에 소개하는 잡지 "S.nob"을 창간하였으며, 무대연출가, 음악가, 구성 작가로도 활동하고, 자신이 소설과 만화를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의 국보급 만화작가 '뫼비우스' 와 함께 <존 디풀의 모험> 을 제작한 것 또한 그를 설명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대목.

멕시코 모든 예술계의 거장으로 활약한 ‘조도로프스키’감독은, 지금도 모든 예술의 근원은 ‘판토마임’이며, ‘모든 예술은 인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실험주의 색채가 강한 그의 영화 속에는, 보면 볼수록 끌리는 묘한 매력이 가득하다. 신비로운 개성이 넘치는 ‘씨네아티스트’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조도로프스키’는 대부분의 전위 영화감독들이 독립제작방식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달리 미국 헐리웃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드는, 하지만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감독 중 한 명.

‘조도로프스키’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67년에 이르러서이다.
그는 히치콕, 조지 A 로메로, 존 워터스의 영화들에 감흥을 받아 ‘영화’라는 매체에 도전을 했다고.

60년대 후반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손꼽히는 <환도와 리스>,그리고 <엘 토포>는 컬트고전이 된 걸작들. 70년대 중후반에는 <홀리 마운틴>과 <Tusk>를 만들며, 자신의 명성을 재확인시켰다. 그리고 오랜 공백 끝에 1989년 <성스러운 피>를 만들었다. 90년대에도 그는 노익장을 여전히 발휘 중이며, 최근에는 <King Shot(2007)>작업을 진행 중이다.

기괴한 컬트 감각의 소유자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그의 영화가 매니아들을 열광하게 하는 이유는, 그의 무한한 상상력과 더불어 영화 속 열린 결말을 의도하여 이야기의 마지막 판단을 독자들에게 떠맡기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항상 논쟁과 날카로운 비평을 유도하며, 평론가들과 관객을 흥분하게 만드는 게 이 감독의 특기이다.

하지만, 그의 화려해 보이기만 했던 영화인생에서도 좌절은 많았다.
10년 동안 준비했던 <DUNE(사구)>은 그의 아들 ‘브론스키’와 ‘오손 웰즈’,
‘살바토레 달리’, ‘글로리아 스완슨’ 초호화 캐스팅으로 촬영 될 예정이었으나‘조도로프스키’는 16시간 상영 시간의 대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음으로써 결국 무산되고, 그 후 방향을 잃어버린 이 프로젝트는 ‘데이빗 린치’에게 넘어갔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본 조도로프스키는 "질투 때문에 1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고.

또 80년대에는 펑크 작가 윌리엄 버로우즈의 원작 <네이키드 런치>를 영화화
하려고 했으나, 역시 쓴 맛을 본다. 즉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게 그 프로젝트가 넘어가 버린 것이다.

<엘 토포>의 속편 격 마릴린 맨슨 출연의 <아벨카인 (Abelcain)>을 찍는 과정에서도 문제는 발생했다. 원래 <엘 토포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되고 있었던 이 작품은 <엘 토포>의 저작권을 쥐고 있는 프로듀서가 그 캐릭터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제목과 주인공 이름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바뀐 주인공의 이름은 El TOPO가 아닌 EL TORO.
이에 대해 조도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엘 토포에 선을 하나 덧대니까 더욱 멋진 것이 되었다. 이렇듯 장애요인이 더욱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런 긍정적이고 독특한 생각이, 그를 ‘컬트의 거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b>조도로프스키 감독과의 ‘남다른’ 인터뷰(2006년 12월 13일 <엘 토포> 프랑스 개봉당시)</b>

Q. 30여년이 지난 오늘 새롭게 복원되어 관객들이 이 영화를 다시 찾게 하는
매력은 무엇인가.
A. 우울함과 기쁨의 공존이라고나 할까...세월이 지나 나는 많이 변했지만,
이 영화들은 내 과거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30 여년을 투쟁한 끝에 다시
관객을 찾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Q. 특히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은 감독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A. 내 몸과도 같은 작품들이다.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정직하고 순수하게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영화의 순수한 의미 그대로 업계에서 인정 받을 거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이 두 영화는 어찌 보면 내게는 UFO와도 같다. 내가 가진 능력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고 어떠한 타협 없이 내가 만들고 싶은 의도 그대로를 살려서 만든 작품이다.

Q. 첫번째 작품 <환도와 리스>에 대해 순수한 예술의 결정체라 평가받고 있는데
A. 여유 자금이나 능숙한 기술 없이 찍었던 영화다. 멕시코에서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었다. 그 영화가 나온 후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도 들었다. 지금에야 웃으며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내 영화가 가진 컨셉을 처참히 부셔버린 끔찍한 일화다.

Q. 자신이 만든 영화들이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나
A. 전혀. 엘 토포의 경우 언제부터다 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홀리 마운틴>의 경우는 특정 머리 모양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난 현대적인 유행을 만들어내려 노력했었다. 기묘한 신발 끈이나, 인디언들의 헤어스타일이라던가. 이 모든 것들을 난 앞서서 실행했다. 그러니 영화가 오래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디지털 효과가 없었다. 투견 씬의 경우, 실제 투견 장면이다. 오늘날 만든 것은 모두 만들어진 가짜 장면이 아닌가. 그 당시에만 해도 이러한 기술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영화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색다른 것일 뿐이다.

Q. 이 두 영화가 영화계에 미친 영향과 파장은 엄청나다. 수많은 영화 팬들에게 칭송받고 있는데, 심지어 당신을 신격화 하는 팬들도 있다.
A. 난 오히려 신화화 되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영화들, 만화영화들, 책들을 제작한 것이 바로 나니까. 그들이 나를 신화화 하는 모든 이유들이 내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니까.

Q. 두렵지 않은가
A. 전혀. 그 존재가 바로 나 자신 아닌가. 난 내가 두렵지 않다. 나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건 내 상상력이 끝도 없이 넘쳐나기 때문이고, 나는 한순간에 강한 결말을 끄집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Q.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생각도 있는가
A 자금의 여유만 주어진다면 당연히! 수익성 좋은 흥행 감독이 된다면 사실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으로는 10원 한 장도 벌지 못했다. 게다가 <엘 토포>의 프로듀서이자 모든 영화의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알렌 클라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나고 나서는 다시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영화가 다시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Q. 엘 토포의 후속작을 시도했다고 들었는데
A. 그렇다. 엘 토포의 아들에 관한 얘기이다. 살아있는 한, 혹 100세까지 산다면 언젠가 꼭 만들어보고 싶은 이야기이다. 실제로 내 부친도 100세까지 사셨다. 그러니 나도 모를 일 아닌가. 이번 재개봉으로 이제는 돈을 좀 만져 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나를 돈 잘 버는 감독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나는 영화에 필요한 최소 제작비만을 가지고 제작에 임한다. 하지만 사실 ‘영화’라는 것이 순수한 열정도 필요하지만, 수익을 내긴 해야 한다. 영화도 일종의 산업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인 동시에 비즈니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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