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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카펫 앞 ‘셀카’는 금지
한겨레제휴기사 cine21-digital1@cine21.com | 2022-05-24

[한겨레]
오승훈의 이 칸 저 칸 : 칸영화제의 격식
자정에 열린 영화 ‘헌트' 시사회 출동, 양복 보타이 등 ‘드레스 코드’는 기본, 배우 감독 도착 때도, 시사회 마친 후도 기립박수, 한 여성, 우크라 침공 러시아군 성범죄 비판 시위



‘밤 일 나가는 세 남자.’

프랑스 칸은 낮이 길었다. 지난 19일(현지시각) 밤 11시, 세명의 기자가 검은 양복 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누가 보면 문상가는 줄~.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까지 맸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꾸 쳐다봤다. 일행이 웃으며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 참 다행인 거 같아.” 나름 슈트발이 좀 된다고 여긴 난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 친구놈들 카톡방 알림이 울렸다. “오늘도 서빙하느라 땀 흘리는 오씨.” 양복 차림 내 셀카 사진에 달린 친구 ‘쭈구리’의 반응이었다. 아놔~. 어쩔쭈구리 같으니라고~. 사실 말랐을 때 산 양복바지는 배가 고픈지 엉덩이를 자꾸 먹었다. 상의를 채우면 단추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지난 19일(현지시각), 영화 <헌트>로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정재(가운데) 감독, 정우성이 투자배급사인 홍정인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대표와 함께 뤼미에르 극장 앞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칸/AFP 연합뉴스

세명의 남자가 한밤중에 양복에 보타이까지 메고 길을 나선 것은, 이날 자정에 열린 영화 <헌트>의 공식 시사회(미드나잇 스크리닝) 때문이었다. 감독·배우에게만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는 베를린 영화제 등에 비해, 칸 영화제는 감독·배우를 비롯해 취재진에게도 칸칸하게 ‘드레스 코드’를 요구한다. 극장에 들어가려면 남자는 검은 양복에 보타이, 여성은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스니커즈나 샌들은 원칙적으로 입장 불가. 칸에 다섯번째 오는 타사 기자는 “몇 년 전엔 정장 구두를 못 챙겨 근처 ‘자라’ 매장에서 급하게 구두를 사서 신은 기자도 있다”고 귀띔했다. “하긴 구두로 설명할 수 없으니 구두를 사와야겠네”라고 대꾸하지 답이 없었다.



20일(현지시각) 칸 영화제에서 한 여성이 우크라이나 여성을 상대로 한 러시아군의 성범죄를 비판하는 나체 시위를 펼쳤다. 칸/AFP 연합뉴스

이윽고 도착한 뤼미에르 극장 앞은 양복쟁이들과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여성들로 북적거렸다. 마치 한밤의 파티라도 나온 듯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30분 만에 입장이 시작됐다. 레드카펫을 밟고 극장으로 이동했다. 생전 처음인 레드카펫인데 셀카는 못 참지~. 휴대전화를 들자 진행요원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른 입장을 위해 레드카펫 위 셀카 촬영은 금지돼 있던 것. 찍히는 카펫이지 찍는 카펫이 아니었다.


만약 레드카펫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어렵지 않다. 감독이나 배우가 돼 칸에 초청을 받으면 된다. 의도치 않았지만 레드카펫 사진이 기록으로 남기도 한다. 지난 20일(현지시각), 한 여성이 옷을 벗고 레드카펫에서 기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의 상체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이 칠해져 있었다. 그 위에는 검은색으로 ‘우리를 강간하지 말라’(STOP RAPING US)고 적혀 있었다. 속옷 하의와 그 주변에는 붉은색 페인트를 칠해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연상하게 했다. 영화제 보안 요원은 그를 재킷으로 감싸 끌어냈다. 칸은 이번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극장 안에 들어온 관객들은 감독과 주연 배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공식 후원사인 베엠베(BMW) 차량이 뤼미에르 극장 레드카펫 앞에 도착하면 감독과 배우, 제작사·투자배급사 대표 등 영화 관계자들이 차례차례 내린다. 이때 해당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백여대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감독과 배우들은 첫번째 감격을 맞이한다. 이때 극장 내 관객들은 이 장면을 극장 내 스크린으로 지켜본다. 양복 입고 영화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영화에 대한 예의와 격식은 극장 안에서도 이어진다. 이들이 극장에 입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로 이들을 환영한다. 감독과 배우가 두번째 벅찬 감동을 느끼는 타이밍이다. 이들이 착석할 10분 남짓 동안 기립박수가 이어졌다.(교회 부흥회 느낌이랄까!) 영화가 시작되고 제작사와 투자·배급사 로고가 나올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영화 만드느라 모두 고생했다는 격려의 의미다.(혈액순환에 좋을 거 같긴 하더라는~.) 자리에 앉자 꽉 끼는 바지 때문에 힘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사회를 마치면 또다시 기립박수의 시간. 7분 동안 이어진 박수에 이날 첫 연출작을 칸에서 공개하게 된 이정재 감독은 감격해 했다. 오랜 지기이자 주연 배우인 정우성은 이정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에겐 더더욱 잊을 수 없는 밤일 터.


시사회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새벽 3시가 넘었다. 슈트를 벗어 던진 채 추리닝 바람으로 기사 마감을 했다. 해 뜨던 5시, 어느새 출장 이튿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밤샘 기사를 쓴 적이 없는데…. 잠자리에 들며 누군가 말했다. “앞으로 양복 두 번 더 입어야 돼. 양복 입기 싫으면 전통의상 입어도 되지. 전통의상은 예외거든.“ 나는 다음 칸에는 반드시 개량한복을 입고 오자 다짐하며 잠을 청했다.


한겨레 오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