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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좋아한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맹세코 부끄럽지 않다. 그걸 말하기가 쑥스러울 뿐이다.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마치 내가 시에 대해 잘 알고, 어쩌면 쓰기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다. 아니면 내가 약간은 문학적 허영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그래서 거의 비밀인 것처럼 시를 좋아해왔다. 꽤 오랫동안.
청소년일 때부터 좋아하는 시들을 옮겨 적는 공책이 따로 있었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너무 부끄러워서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는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적었다. 한용운의 <복종>이나 조지훈의 <낙화>, 김수영의 <풀> 같은 시. 용돈이 생기면 이름을 아는 시인의 시집을 샀다. 아는 시인이 많아져서 언젠가부터 공책을 접었다. 대신에 외우기 시작했다. 한 연이라도, 한 행이라도.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정철의 <사미인곡>을 너무 좋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러니까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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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대개 인터뷰하는 대상과 관련이 있는 곳에서 진행한다. 직접 운영하는 식당이나 인터뷰이가 추억하는 요리가 있는 장소, 자주 찾는 공간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인터뷰이 선정만큼 중요한 건 어디서 인터뷰를 할지다. 그에 대해 어디서 만나야 할지를 혼자 생각하고 몇 군데를 골라서 그와 내가 대화하는 상상을 하는 일은 인터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루틴이다. 이번 인터뷰이가 영화감독 A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린 건 제주도였다. 그는 몇번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국에 오면 제주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인터뷰를 하러 제주까지 갈 수도 없는 일이고…. A의 영화가 잘 어울리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았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를 생각하면 독일 맥주가 유명한 맥줏집이나 영화에도 등장한 중식당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너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도 정하지 않고 고민만 길어지고 있으니 선배는 횟집이 어떠냐고 했다. 고급 일식당
[시네마 디스패치] 맛과 요리섹션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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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유명 팀의 레이(와이엇 러셀)는 다발경화증으로 선수 생활을 쉬는 중이다. 그는 재활에 전념하고자 수영장이 딸린 주택으로 이사한다. 수영장은 가족을 돈독하게 만드는 공간이 된다. 레이 또한 수영장에 들어온 온천수의 힘으로 기적같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의 아내 이브(케리 콘던)와 두 자녀 이지(아멜리 회페를레)와 엘리엣(개빈 워런)은 한밤중 수영장에서 수영하던 중에 악몽 같은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나이트 스윔>은 호러 장르의 명가 블룸하우스의 신작이다. 감독의 동명 단편영화를 장편으로 확장했으며 제임스 완이 제작을 담당해 화제가 되었다. 수영장에 있는 물을 귀신으로 그려낸 기발한 발상이 무색할 정도로 영화의 만듦새는 아쉽다. 유려한 수중촬영과 안정적인 호흡 등은 분명히 인상적이나 인류세 등 다양한 문제의식을 그려낼 수 있던 소재의 힘을 살려내지 못하는 진부한 각본이 문제다. 독창적인 시퀀스가 더러 있으나 낡은 점프스케어와 클리셰가 가득해
[리뷰] ‘나이트 스윔’, 독창적인 발상이 서서히 익사하는 것을 보는 안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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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딸을 앞세운 유경근씨는 삶을 이어갈 방법을 알고 싶다. 그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또 다른 참사 피해자 유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대구 지하철 화재부터 이한열 열사의 죽음까지 한국 현대사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영화가 진행되며 개개의 사건들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안전 불감증이라는 사회적 어젠다로 한데 포개진다. 이 모든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은 자신의 정치성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애도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상을 과감히 제시하며 변화를 촉구한다. 비판이 가해지는 대상은 불법 건축물을 허가한 군청과 진상규명과 재수사 요구를 거절하는 정부에 그치지 않는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추모식과 봉안 시설을 거부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피해자를 조롱하는 한국의 기괴한 문화와 맞닿아 있다. 일상이 파괴된 유족들에게 남은 희망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빛바랜 가치뿐이다. <기념 촬영>과 &l
[리뷰] ‘세월: 라이프 고즈 온’, 애도를 고민하지 않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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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부활절 축제 준비에 한창인 래빗스쿨의 풍경으로 시작된다. 그곳에서는 매해 부활절을 상징하는 황금알을 수호할 네명의 부활절 기사단을 선정한다. 그 주인공은 루이즈와 앤디, 에미(엘리스 에이커만), 그리고 사고뭉치 맥스(노아 레비)다. 맥스는 선정된 날 라이브방송과 드론을 동원해 부활절을 방해하려는 멋쟁이 토끼단의 대장 레오와 다툼을 벌이고, 레오는 래빗스쿨에서 쫓겨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레오는 토끼의 영원한 숙적인 여우 가족과 손잡고 부활절 축제를 망치려 한다.
<래빗스쿨2: 부활절 대소동>은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에 상영된 동명의 독일 애니메이션인 <래빗스쿨>의 속편이다. 캐릭터 디자인, 스토리, O.S.T 등 영화의 요소 대부분이 전형적이며 특히 빌런을 라이브방송 등 인터넷 문화와 연결하려는 설정은 다소 도식적으로 보인다. 슈퍼히어로 장르 공식을 따라가는 만큼 각 캐릭터의 초능력과 정신적 성장을 제대로 그려내야 했으나 “능력보다는
[리뷰] ‘래빗스쿨2: 부활절 대소동’, 동화를 기대하고 왔는데 교회에 온 듯한 당혹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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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디는 요즘 유행하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앵거스를 포함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누구 하나 음악에 진심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무대는 곁다리일 뿐 코치들의 짓궂고 무례한 농담의 수위에 따라 투표 결과가 달라진다. 어느 날 앵거스가 갑작스레 실종되자 버디는 ‘진짜 음악’을 세상에 들려주기 위해 그의 후임 자리를 도맡는다. 세계 정상급 록스타인 그가 맡게 된 연습생은 애석하게도 팝스타를 꿈꾸는 어린 걸 그룹이다. 철없는 아이들과 겨우 타협점을 찾지만 문제는 음악적 방향만이 아니다. 재치 있는 입담을 뽐내지 못하면 절대 투표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버디는 상대팀에 인신공격을 날리고 환호받는다. 결국 그도 시청률에 목매는 ‘방송국 놈들’이 되고 마는 것일까? <드림쏭3>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버디와 아이들이 진정한 음악의 힘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린다. 시리즈에서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던 주인공이 이번엔 미래의 꿈나
[리뷰] ‘드림쏭3’, 방송국 놈들에게 귀여운 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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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7일 광주 전남도청 뒷골목은 화평반점이라는 중식당의 개업 잔치로 시끌벅적하다. 일평생 남의 가게 주방장으로 살아온 아버지(강신일)가 드디어 자기 손으로 가게를 연 경삿날이기 때문이다. 맏며느리인 철수 엄마(김규리)는 만삭의 몸으로 홀 서빙을 돕고 결혼을 앞둔 삼촌(백성현)은 예비 신부와 인사를 드리러 온다. 온 동네 이웃들이 모여 축하를 건넨 화평반점의 첫날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손주 철수(송민재)는 목욕탕에 들러 세신까지 하면서 본격적인 첫 장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줄 알았던 철수네 가족의 기대와 달리 광주의 거리는 온통 계엄군과 최루탄으로 가득 찼다. 거리는 계엄령으로 봉쇄되고 무장한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유일한 자랑이었던 장남 철수 아빠(이정우)는 계엄군에 쫓겨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충무로에서 30년간 미술감독으로 지냈던 강승용 감독의 연출 데뷔작 <1980
[리뷰] ‘1980’, 덤덤해야 할 역사의 비명을 미원 범벅의 간짜장처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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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지는가. 영화 <댓글부대>는 자연스레 형성되는 집단적 의견이 아닌 명확한 목적과 음해 공작으로 완성되는 온라인 설전을 현실처럼 반영한다. 문제를 직관적으로 판별해내는 눈을 가졌으나 다소 허영심 높은 사회부 기자 임상진(손석구)은 대기업 뒤편에 숨겨진 비리를 조사하던 중 한 중소기업의 폭로를 단독으로 보도하게 된다. 국민의 대대적 관심이 필요한 이슈였지만 돌연 연예인 마약 사건이 터지더니 모든 게 무용해지고 만다. 고발 보도는 잊히다 못해 오보라는 오명을 얻고 용기낸 취재원은 억울함에 극단적 선택을 감행한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흐르는 시간보다 온라인상의 시간은 더 빠르고 조급하게 흐른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오직 절망과 허무함만이 남은 그때, 젊은 남자가 다가와 상진에게 팀알렙에 관한 정보를 넘긴다. 찡뻤킹(김성철), 찻탓캇(김동휘), 팹택(홍경)으로 구성된 이 팀은 온라인상에 벌어지는 갑론을박을 철저한 계산하에 조종하고 변
[리뷰] ‘댓글부대’, 사이버 세상 속 여론의 뒷면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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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가로지르는 등하굣길에 새로운 나무 이름을 익힐 수 있고, 이따금 들리는 사냥꾼의 총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아직 자연과 가까운 어느 작은 산골 마을. 도시에서 온 연예 기획사 직원들이 5월 착공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를 열어 지역 주민들과 만난다. 산이 곧 삶의 터전인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이들은 회사 두달 매출과 맞먹는 중소기업 코로나19 보조금 때문에 급조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상황이었고, 그 속셈이 마을 주민들에게도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정화조 위치를 바꾸지 않으면 이곳의 지하수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큰 피해가 올 것이며 사람들이 피운 모닥불 등을 이유로 대형 산불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문제 또한 설명회에서 제기된다. 특히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의 반발이 매섭다. 지역 주민들의 시선에서 시작된 영화는 상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일개 연예 기획사 직원일 뿐인 타카하시(고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의 시점에서 이 사안을 한번 더
[리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 불가능한 자연의 폭력성이 파괴적 개발주의와 충돌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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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는 관객의 굳은 선입견을 점잖게 훈계하는 대사를 초반부에 배치하고 시작하는 <파묘>는 바로 그 전제에 고통받는 척하면서 뻔뻔스럽게 그 전제를 배반하고 심지어 거기에 고상한 명분을 칠하면서 영화적 자살과도 같은 과도한 장식의 전시로 나아가는데, 오컬트에 특화된 재능의 소유자로 주목받던 장재현 감독은 이로써 오컬트와 괴수물을 난폭하게 결합했는데도 상찬받으며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영광의 월계수를 쓰게 되었다. 내게는 얼빠진 소리처럼 들리는 이 영화에 대한 온갖 고급한 비평적 담론과 SNS를 통해 넘쳐나는 진영 논리에 기반한 (좌파 반일영화라는 모 다큐멘터리 감독의 비난에 대한 대중의 응징이라는 투의) 찬가를 존중하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보다 담백한 접근이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쓴다.
싸움의 비장한 명분
<파묘>는 변칙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한 과격한 서사의 뒤틀림
[비평] 악의 존재를 전면화한 쾌락의 후유증, <파묘>가 내세우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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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여자는 일본어로 안내하는 승무원에게 짧게 대답하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장면 둘. 유년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에 이민 간 여자는 24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두고 “그 사람은 진짜 한국인(Korean-Korean)”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쪽에서는 일본어로, 다른 한쪽에선 영어로 한국인을 호명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 사람과 진짜 한국인. 서로 다른 영화에서 흘러나온 두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굴절된 거울상을 형성한다. 누군가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한국인’이라고 불린다. 어떤 연관성도 없는 두 영화의 인물들은 이렇게 뜻밖의 장면에서 같은 단어를 공유한다. 그런데 그들이 공유하는 단어가 같은 의미를 전하고 있는 걸까?
‘한국인’을 가리키는 두 편의 영화가 한국 안팎에서 나란히 도착했다. 한 영화는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며 극장가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고, 다른 한 영화는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얻은 호
[비평] <패스트 라이브즈>와 <파묘>에서 호명되는 ‘한국(인)’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