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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명성을 세계에 떨친 영화 <이티>(1982)가 20돌을 맞아 다시 극장에 걸린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일부 장면을 복원하고, 이티가 목욕하는 장면 등 5분 가량을 추가했다. 표본 채집을 위해 지구에 온 우주선에서 낙오된 어린 외계 생명체가 어느 가정집에 숨어들어 엘리엇(헨리 토머스)이라는 소년을 만난다.엘리엇은 형 마이클(로버트 맥노턴)과 여동생 거티(드류 베리모어)와 함께 이 외계인에게 ‘이티’란 이름을 붙여준다. 이티는 시들어가는 꽃을 되살리거나 자전거가 하늘을 날게 만드는 따위의 초능력을 지녔다. 아이들은 이티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산 위에 교신장치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외계인의 존재를 감지한 항공우주국은 이티를 잡아들이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온다. 재개봉 <이티>는 우선 팬터지와 특수효과 면에서 만감이 교차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기술수준이라면 이티를 간단히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했겠지만 그런 기술이 없던 당시 이티 안에는 키 62c
일부장면 그래픽 복원 <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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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상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24일 열린 74회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사회자인 우피 골드버그가 영화계를 “진흙탕 싸움”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아카데미상은 엄청난 홍보 물량경쟁과 로비로 얼룩져 있는 데다 위원회 스스로 미국과 가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영화를 선호해 `정치판'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흑인배우 시드니 포이티어의 공로상에 이어 할 베리와 덴절 워싱턴이 차례로 주연상으로 호명되자, 우스개 표현을 빌자면 머리 한 구석에서 “이거 진짜 할리우드 액션(오!노!) 아냐?”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물론 그들은 정말 상을 탈 만한 배우였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보여준 일방주의 정책으로 전세계의 비난을 받는 미국으로선, 미국인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정말 `감동적'인 순간으로 연출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빨갱이' 딱지를 붙여 자신들이 쫓아냈던 찰리 채플린에게 몇십 년만에 공로상으로 화해의 몸짓을 보냈던 기억도 떠올랐다. 다
흑인 남녀주연상 뒷말 많지만 그래도 기분좋은 `할리우드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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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에 출연한 마을 분들은 연기가 뭔지 모른다. 심지어 영화 본 지 하도 오래돼 영화가 뭔지도 모른다.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고 수줍었을 텐데, 생전 처음 카메라를 구경한 이 사람들의 연기 때문에 <집으로…>가 웃기고 또 슬프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영화 속 할머니 집 세트가 서 있는 지통마에서 시작해 읍내까지 내려온 하루 동안의 여정.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는 또 다른 <집으로…> 이야기를 모아왔다.이름 : 김을분 할머니역할 : 주인공내가 겪은 <집으로…> : 처음엔 안 하려고 했어. 영화가 뭔지도 모르고, 옷이 그렇게 생겨서 우리 아들 창피하잖아. 다 떨어진 거 입으려니까…. 우리가 아무리 못 살아도 그런 옷은 안 입고 살았어요. 감독이 아들한테 자꾸 졸라서 하긴 했는데, 첫날 무슨 얼굴을 그렇게 새카마니 해 놨는지. 손발이랑도 다 새카매서 첨엔 나가지도 못하겠더라고. 그러고 있으니까 허군(허재철 프로듀서)이 내손 꼭 잡
<집으로…>에서 배우 된 지통마 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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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향 감독의 우스개 표현을 빌리자면 <집으로…>는 “컨트리 블록버스터”이다. 몇십억 제작비가 예사인 요즘 영화계에서 제작비 14억원에 촬영일 100일, 필름은 고작 10만자이고, 기성배우들이 거의 출연하지 않았으니 달리 표현한 말도 없다. 그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했던 “비전문 배우와 영화를 찍으려면 기다림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신조처럼 가슴에 새기고 오지에서 100일을 보냈다. 그가 들려준 <집으로…> 가기까지 벌어졌던 촬영 에피소드들을 담아본다. 똥개 철이집의 `삼돌이'로 등장, 수시로 상우의 발길질에 걷어차인다. “훈련받은 똥개는 세상에 없다기에, 전국을 뒤져 똥개와 비슷하게 생긴 삽살개를 찾아냈다. 나이 10살. 사람으로 치면 거의 김을분 할머니(78)와 같은 나이기에 촬영만 하면 이내 녹초가 됐다.” 미친소 아이들에게 돌진하는 공포의 대상. 하지만 언제나 갈라진 길에선 왼쪽으로 도는 버릇이 있어 오른쪽으로만 피하면 그만이다. “집소여야 되고,
<집으로...>산골마을 주민들과 동락 돌발행동 많아 애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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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극은 아직도 꿈을 꾸는 사람이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푸른 기운 서린 안개 속에 뿌리없는 산봉우리를 세우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웅들의 수천년 무용담을 한번의 숨결로 풀어놓는다. “여자에게 꽃을 꺾어주는 낭만은 모르지만 내겐 기억이 곧 로맨티시즘”이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속에선 아직도 장대하고 낭만적인 신화가 굳건한 벽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 때문에 <촉산전>은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와 쉬어갈 줄 모르고 강렬하기만 한 영상이 뒤얽힌 실패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 <촉산>으로 첫마디를 뗐다고 할 수 있는 <촉산전>은 <소오강호>와 <동방불패> <선학신침> <청사> 등 중국신화의 흔적이 꾸준히 박혀 있는 서극 영화세계의 정점이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렇다. <촉산전>을 마주한 우리가 부당하게 박대받아온 서극의 이십년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무모한 용기가 빚어낸, 꿈같은
서극과 <촉산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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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서극이 태어난 곳은 홍콩이 아니라, 베트남이다.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함락하기 전, 서극은 13살의 나이로 홍콩에 왔다. 그 경험은 <영웅본색3>에서 그려진다. 이제 곧 사라질 도시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던 소년은 진정한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가 자라서 <영웅본색>의 소마가 된다. 싸움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청년은, 서서 죽을지언정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누아르의 용장(勇將)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무협지의 영웅들이기도 하다. 홍콩 역시 사이공과 어딘가 닮아 있는 곳이다. 1997년 이후의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 대륙의 어딘가에서 떠나왔고, 또 어디론가 떠나가야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곳. “홍콩은 늘 거품 위에서 살아간다. 홍콩사람들은 끊임없이 트렌드에 빠지고, 도박에 빠진다. 모두 이민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품 위에서 미끈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간의 웃음과 카타르시스를 원한다. 심각하게 그
서극과 <촉산전> [2] - 서극의 영화적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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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부르스 上解之夜 1984년, 감독 서극 출연 장애가, 엽청문, 종진도
서극은 무협과 액션 전문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서극은 코미디와 멜로 연출에도 능하다. 능숙한 멜로 감각을 입증한 영화가 초기의 걸작인 <상하이 브루스>다.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젊은 아가씨 슈와 병사 퉁은 슈초우 다리 밑에서 우연히 만난다. 서로 반해 사랑에 빠지지만, 전쟁의 와중에서 서로 헤어진다. 10년이 지난 뒤 작가인 통과 나이트클럽의 쇼걸인 슈는 같은 아파트에서 만나고 살아가지만, 과거를 떠올리지는 못한다. 상하이라는 도시와 50년대에 만들어진 홍콩 뮤지컬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고전적 멜로영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
도마단 刀馬旦 1986년, 감독 서극 출연 임청하, 종초홍, 엽청문
한때 서극은 <영웅본색>을 여성 버전으로 만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꽤 구체적으로 했다. 그건 현실로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
서극과 <촉산전> [3] - 서극영화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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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80년대 초반 홍콩 뉴웨이브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당신 소유의 제작사 필름 워크숍(電影工作室)을 세우기도 했다. 그 당시 홍콩의 분위기는 어땠는가?
=1984년 이전의 홍콩에선 영화 만드는 일은 그리 존경받지 못했다. 그 시절엔 극장 상영 프로그램을 채우기 위해 충분한 양의 영화를 생산하는 일만이 중요했다. 액션영화 몇편, 코미디영화 몇편. 이런 식이었다. 나는 전영공작실이 이전에 수백번이나 봤을 영화를 새롭게 통찰해 제작하는 회사가 되기를 바랬다. 갱영화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거나, 무협영화를 통해 정치적 희생양을 다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로맨틱한 발상이었다.
-당신이 액션을 구성하는 방식은, 특히 최근의 방식은 정말 흥미롭다.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한치도 어긋남이 없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런 장면들을 찍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무작정 들어가 카메라를 돌릴 수는 없다. <순류역류>를 예로 들어보자. 이
서극과 <촉산전> [4] - 서극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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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감독을 꿈꾸던 홍콩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고 경력을 쌓기 위해 TV방송사로 몰려들었다. 골든하베스트 등 몇몇 대형 스튜디오가 장악하고 있던 당시 홍콩영화계는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선한 재능을 받아들일 여유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1979년, 지루한 공기를 깨뜨리며 홍콩 뉴웨이브의 시작을 선언할 허안화와 엄호, 우인태 등이 포함돼 있었고, 누구보다도 서극이 있었다.
서극은 오우삼처럼 한 장르를 끝까지 밀고나간 적도 없고 허안화처럼 진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뉴웨이브의 부산물처럼 취급받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자신의 영화사 전영공작실을 통해 그가 수립한 시스템은 동세대 영화인들에게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를 줬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이름들은 그대로 홍콩영화의 전성기며, 지금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는 홍콩영화의 몸부림이다. 서극이 좀더 젊고 영화적으로 세련된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선구자였다고 평한 영화서적 &
서극과 <촉산전> [5] - 서극의 영화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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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만큼 작품마다 자기만의 선명한 미학적 서명을 새기는 감독은 정말 드물다. 그건 그의 작품 중에서 엉뚱한 유머가 가장 풍부한 <생활의 발견>에서도 변함없다. 영화라는 형식의 한계와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는 조금씩 움직인다. <생활의 발견>에서 그 움직임은 더 분명해졌다. 그의 움직임은 패턴화할 수 있는 변모의 길 중 하나가 아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생활의 발견>을 보고, 홍상수의 길을 되짚어본 두 평자의 글을 싣는다. 논쟁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두 평자의 의견은 결국 상반된 방향으로 간다. 심영섭은 홍상수에게 작가주의적 강박의 혐의를 벗겨내고 그의 영화가 더욱 깊어졌다고 말한다. 반면 김소희는 그가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더 멀어짐으로써 더욱 사소화되었다고 본다.
<생활의 발견>에서 홍상수는 더 유머러스해졌지만, 동시에 훨씬 더 큰 쟁점을 낳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제 <
심영섭의 <생활의 발견>론 : `오인된 홍상수`를 벗어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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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상수 감독의 지난 작품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자였다. 이것을 과거형으로 기술하는 것은 이제부터 찬반 호오의 경계선 저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식의 표명이라기보다는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세계에 대해 나 자신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오인이 있었던 게 아닌지 반추해보기 위한 것이다. 만약 나에게 오인이 있었다면(그건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오인된 세계를 구성한 핵심 정보는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로부터 왔다.
돌이켜보건대 그때는 80년대의 격렬한 정치투쟁이 사실상 막을 내리고 전장의 포연처럼 거리에 먼지만 자욱하던 시절로 기억된다. 홍상수의 영화가 펼쳐지는 것은 바로 이 풍경 속에서다. ‘돼지’를 쫓아 격렬하게 편 갈라 싸우던 사람들이 다들 자기만의 공간으로 되돌아가고, 갈 바를 잃은 돼지가 이리저리 헤매다 우물에 빠진다. 소란이 사라지고 난 먼지 속에서 가만가만 나타난 홍상수가 우물 안을 무연히 들여다본다. 거기에 아직 남아 있는 몇겹의 동그
김소희의 <생활의 발견>론 : 더욱 홍상수답게, 더욱 사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