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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능가하는 <황제와 암살자>한국에서 첸카이거는 시네마테크의 보물에서 예술영화의 거장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국제화의 시작을 알린 <현 위의 인생> 이후 첸카이거는 칸에서 <패왕별희>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영화에 관한 평가들은 엇갈리기 시작했다. 다시 보아도 분명한 건(내 입장에서) <패왕별희>에서의 역사적 지표들은 이 영화를 알레고리적으로 읽도록 유혹하고 있는 함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황토지> <대열병> <해자왕>에 들어 있는 내셔널 알레고리, 또는 미학적 창조력을 어떻게 포장해야 서구의 관심권 안으로 더 진입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황토지><패왕별희>영화 속 주인공인 샬로와 데이의 동성애적 애증의 소사는 마치 중국 현대사의 분기점들과 다면적으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만 평행할 뿐이며, 비스듬히 지나치고 있다.
<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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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첸카이거는 다시 <투게더>로 돌아왔다. <황제와 암살자> <킬링 미 소프틀리> <투게더>는 그 의미상의 위치가 서로 다르다. 오히려 <황제와 암살자>는 알레고리화의 속임수를 덜어낸 첸카이거의 솔직함을 보는 것에 반갑다. <킬링 미 소프틀리>는 철저한 실패작이지만, 그 실패의 의미를 장르에 대한 인식부족과 시스템에 대한 역부족으로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그러나 <투게더>는 그 둘 모두와 다르다. <투게더>는 테크니컬한 면에서 결코 뒤처지는 영화가 아니다. 또 <황제와 암살자>에서 보여준 인성에 대한 연구는 이제 이 영화에서 소박한 믿음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다. 때문에, 이 영화를 기술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때 입을 막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첸카이거가 다시 한번 외국소설 중 하나를 골라 취향에 기대어 휴머니즘을 말했더라도 모순은 별로 커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첸카이거는 이
<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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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인데요... 사실 난 돈키호테입니다.
곧 개봉예정인 <지구를 지켜라!>는 그 제목만큼이나 엉뚱한 영화다. 외계인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불행이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병구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고군분투를 그리는 이 영화에는 황당한 상상력이 구석구석에서 출몰한다. 보는 이를 때론 당황하게, 때론 웃음짓게 할 이 영화는 1995년 이라는 단편영화로 주목받았던 장준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엿보이는 갖가지 희한한 발상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골때리는’ 이야기를 생각했을까. 데뷔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력과 후반작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회고하며 직접 쓴 ‘<지구를 지켜라!> 창작비화’를 보면 그 궁금증이 풀린다.
“비밀을 간직하고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실 난 존 레넌이다.” 이 인상적인 독백으로 시작하는 장준환 감독의 단편영화 은 1995년 발표 당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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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선인장>을 끝낸 직후 그는 봉준호, 김종훈 감독과 함께 <유령>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다. 차승재 대표가 던져준 “잠수함이 나오는 영화다. 일본이 나와야 한다”는 정도의 앙상한 ‘화두’를 놓고 각각 시나리오를 썼고, 이중 장준환의 버전이 채택됐다. 영화의 기본 설정뿐 아니라 자기파괴적인 성격의 캐릭터나 비극적인 결말부까지의 골격은 이때 만들어졌다. “시나리오 초고는 한달 만에 가뿐하게 썼다. 그런데 각색이 힘들었다. 나 혼자 괜히 무거워지면서 한국으로 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혼자 감동하고….” <2001 이매진>에서 얼핏 엿보였던 장준환 특유의 비관주의가 스스로를 지배한 탓이었다. 워낙 작업이 더뎌지다보니 두달 동안 달랑 석줄만을 고친 적도 있었다.
어렵사리 <유령> 시나리오를 마친 뒤, 99년 장준환은 몇개의 다리를 건너 캐나다로부터 시나리오 작업 제의를 받는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국인 제작자가 시나리오 손볼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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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디카프리오가 영화의 영감을 주다
2000년 어느 봄날 , 감독의 자취방
오늘도 감독은 12시쯤 눈을 떠 졸린 눈을 비비며 늦은 아침을 먹고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1년쯤 공들인 시나리오를 데뷔작으로는 너무 거대한 이야기라는 둥, 엄청난 특수효과와 CG를 소화하기 힘들다는 둥,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스스로 엎어버린 뒤 감독은 별반 즐거울 일이 없다. 감독은 거창한 얘기보다는 신인감독에게 맞는 적당한 규모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 ‘영화를 보면 색다른 영감이 떠오를까? 그래 오늘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은 감이 들어!’ 감독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영화 보러 나간다. 그의 뒷모습이 경쾌하다.
몇 시간 뒤, 돌아오는 버스 안
햇살 따가운 구석자리에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감독. 별 소득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착잡한 표정의 감독은 가판대에서 산 <씨네21>을 펼친다. 이리저리 기사를 뒤적이던 감독의 눈이 한 페이지에 꽂힌다.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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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당신은 외계인을 믿으십니까?
강사장/ 지구를 처음 발견한 건 칠십오 대조 선왕님이셨어
강사장/ 선왕께서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푸른 행성이라고 불렀지.당시 푸른 행성은 멍청한 파충류들이 지배하고 있었어.(중략)실험대 위에서 아기 공룡을 해부하는 외계인들. (시나리오 중)
2000년 가을, 수서 작업실
다시 찾아온 슬럼프. 시나리오의 진도도 잘 나가지도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 감독은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곧이어 굼벵이놀이로 전환, 뒹굴뒹굴 몸을 굴리던 감독의 눈에 며칠 전 길거리에서 받아서 바닥에 던져놓았던 전단 하나가 눈에 띈다. ‘외계로부터의 xx… 라엘리언 어쩌고저쩌고….’‘음… 저기에 가면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몇 시간 뒤, 종로 탑골공원 근처
전단지를 든 감독, 종로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다. 한참을 헤매다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감독은 얼마 전 자료조사차 마네킹 공장을 방문해 눈치없이 이것저것 물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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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에필로그
2003년 초 편집실
감독은 적이 당황하고 있다. “이 장면은 너무 어두워. 빼는 게 좋겠어.” 제작진들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힘겨운 촬영을 끝낸 가뿐한 상황임에도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모든 스탭과 배우가 고생했지만,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힘들어했던 주연 신하균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장면을 뺀다고 생각하니 감독은 하균 앞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구? 다음을 봐라.
플래시백- 2002년 여름 강원도의 어느 국도
감독은 병구가 친구인 태식으로부터 무시당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찍고 있다. 태식이 자신의 상처를 건드려 괴로운 병구의 내면이 드러나야 하는 장면이다. 병구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며 트럭을 운전한다는 설정은 이렇게 그의 아픔과 이상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감독은 생각한다. 근데 왠지 불안하다. 병구 역의 신하균이 수동기어를 어색하게 조작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드디어 감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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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촉구! <임소요>에서 <아들>까지, 반드시 ‘극장에서’ 만나고 싶은 걸작 10편 지지선언
수입은 해놓고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때로는 걸 만한 극장을 찾을 수 없어서, 때로는 수입사 스스로 흥행 가능성에 자신이 없어서, 때로는 심의문제가 걸려서. 영화사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이런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의 각종 매체에서 그해 베스트 10에 꼽힌 작품들이다.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경탄을 자아내고 열렬한 지지를 받은 영화들을 하루빨리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씨네21>의 이번 특집은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임소요> <큐어> <해피니스> <팜므파탈>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아들> <막달렌 시스터즈> <볼링 포 콜럼바인> <노 맨스 랜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1] - 임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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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어>(Cure)
내 안에 악마가 숨어 있어
나카다 히데오의 <링>과 이토 준지 원작의 공포영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 공포영화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고전인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은 1964년 작품이고, 고어영화인 이케다 도시하루의 <이블 데드 트랩>은 너무 잔혹해서 수입할 수 없다면 마지못해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1997년 작 <큐어>는 왜? 이미 수입까지 된 상황에서 <큐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83년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데뷔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누벨바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장르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바쳐온 감독이다. <인간합격> <카리스마>처럼 장르에서 벗어난 걸작들과 함께 <지옥의 경비원>에서 시작하여 <큐어>를 거쳐 <카이로>에 이르는 구로사와 기요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2] - 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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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니스>(Happiness)
신경쇠약직전의 미국으로 오세요
토드 솔론즈의 <해피니스>의 국내 배급사가 있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한국의 영화시장에 대한 내 상상력은 이처럼 배짱이 없다. <해피니스>에는 소아성욕자인 정신분석가, 사정을 못해 안달난 열한살 먹은 남자아이, 폰섹스에 열중하는 비루한 사내가 화면을 들락거린다. 그들의 삶은 어딘가 덧나 있지만, 그걸 알 길이 없다. 고로 이 악몽 같은 영화를 사랑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일단 보고 난 뒤라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영화를 잠시 기억에 가둬놓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기억의 휴지통에서 비워줄 ‘삭제’ 키는 어디에도 없다. 당장 내가 그렇다. 이 퍽퍽하고 짜증난 영화를 당분간 잊었다 싶은데, 이 영화는 수시로 악의적인 미소를 띠며 귀환한다.
<해피니스>가 돌아오는 기억의 궤도는 따로 있다. 그것은 외상의 흔적을 타고 흘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3] - 해피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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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Femme Fatale)
히치콕, 누아르에 입맞추다
유럽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너의 징후를 즐기라며 핏대를 세우고 의자를 옮겨다니던 슬라보예 지젝은, 여전히 현대 영화이론을 매혹시키고 있는 두 가지 소재를 선언하며 마지막 장의 첫 문단을 시작한다. ‘히치콕의 영화와 필름누아르.’ 이 둘은 한 등에 붙어 있지만, 한 몸통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히치콕은 히치콕이며, 누아르는 누아르이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영화이론가보다도 히치콕을 잘 알고 있는 히치콕 문하생 브라이언 드 팔마가 필름누아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히치콕적 누아르’는 그 어디에서도 손쉽게 탄생할 수 없다. 이 희박한 창조적 결합의 순간만으로도 <팜므파탈>의 존재는 희귀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묻어둔다면 언제 다시 히치콕과 누아르의 대면을 목도하게 될지는 정말 자신할 수 없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혹적 요부, ‘팜므파탈’. 때로는 순수함으로, 때로는 요염함으로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4] - 팜므파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