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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검열80년 동안 가위질은 쉬지 않고 계속됐다. ‘오버’ 제스처의 극단이었던 검열의 연속. 이중엔 기가 찬 사례 또한 많았다. 일제는 이규설의 <농중조>(1926) 중 “노출이 심하다며” 가위를 들이댔다. 화숙 역을 맡았던 복혜숙의 ‘종아리’가 드러났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방을 맞았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19와 함께 민간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들어선 것도 잠깐. 군화 신은 독재자들은 검열을 진두지휘했다.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1965)에 용공혐의를 걸어 감독인 이만희를 구속하기까지 했다. 극중 자신들을 겁탈하려는 중공군을 쏘아죽인 인민군 장교를 두고 남쪽의 여포로들이 “멋있다”는 대사를 읊은 것이 꼬투리였다. 오죽했으면 감독이 재판정에서 김일성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그의 반응에 따라 용공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두 여보>(1970)는 “한 여인이 두 남편을 거느리는 것이 사회정서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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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엑스트라가 출연한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 <무사> 또는 <태백산맥>영국 DK출판사에서 펴낸 <Top 10 of Eveything 2002>에는 ‘엑스트라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영화’ 부문 3위로 한국영화 <우주괴인 왕마귀>(1967, 권혁진 감독)가 올라 있다. 무려 15만7천명을 동원했다는 것. 하지만 당시 이 영화의 제작사인 세기상사에 근무했던 정종화씨는 “홍보를 위해 부풀린 것. 유료로 고용된 엑스트라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문화평론가 이순진씨도 “참 많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김성수 감독의 <무사>(2001)가 50마리의 말과 기수를 기본으로 해서 많을 때 200명가량 동원해 112회 동안 찍었으니, 연인원 2만명 정도 규모의 엑스트라를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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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 Maker #4 : 김수용 최다 연출작, 가장 오랜만의 컴백, 가장 오랜기간 활동109. 이쯤되면 백팔번뇌도 저리 가라다.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한 김수용 감독. 1999년 <침향>까지 40여년 동안 109편의 작품을 낳았다. 1967년에는 <어느 여배우의 고백> <길잃은 철새> <애인> <산불> <빙점> <고발>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만선> 등 무려 10편의 영화를 내놓았다. 빚었다기보다 토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 <중광의 허튼소리>(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난도질당하자 메가폰을 던지고 10년 넘게 공백기를 가졌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연출 편수다. 신기한 것은 태작들 중에 수작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1967년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빨리 촬영이 완료된다는 건 캐스트의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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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싼 의상 김지미의 기모노<요화 배정자>(1966)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한국인이지만,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배정자 역할을 위해 김지미가 사들인 기모노는 무려 80만원 상당. 당시 샐러리맨들의 월급이 8천∼1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고가품이다. 여배우들의 편당 평균 개런티 20만원, 30만원 안팎을 챙겨 받던 A급 배우 김지미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 <요화 배정자>의 개런티 50만원(이 작품 이후로 김지미는 편당 40만원 이하에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다 더 큰 금액이다보니 배보다 더 큰 배꼽을 메우기란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재력으로만 손에 넣을 수 없는 명품이라, 항간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의 도움이 컸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한편 이해윤씨는 <사의 찬미>(1991) 당시 장미희가 입었던 의상이 가장 비싼 의상이라고 증언한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당시 전체 배우 의상비가 대략 2~3천만원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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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나라에서 촬영된 영화 <낮과 밤>(1984)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전세계 12개국, 21개 지역에서 촬영했다. “해외에서 국력 신장을 위해 땀흘리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다큐 기법을 동원해서” 만든 극영화로 이두용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매번 함께 움직여야 했던 인원만 대략 25명. 아무리 조심한다지만, 개인 짐은 물론이고 이동 때마다 각종 촬영 기자재가 제작진의 행선지와는 반대편의 나라로 운송되는 일이 빈번해 촬영일정이 지연되기도 했다. 숙식비는 물론이고, 비행기 티켓값을 아끼기 위해 이미 들렀던 곳을 경유해서 목적지에 가는 등의 수고도 치러야 했다고. 이두용 감독은 “이동시에 전세계 대부분의 항공기를 타면서 그 안에서도 촬영을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장면에 쓸 요량으로 KAL을 택했는데, 막상 비행기 뜨고 나서 찍으려고 하니 사전 허락없인 ‘불가’라고 했다. 그런 절차가 필요한 건 한국이 유일했다”고 돌이켰다.할리우드영화로서 가장 많은 나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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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특수효과영화 <불가사리>한국 영화계에 특수효과라는 개념을 가져온 작품은 1962년 광성영화사에서 만들어진 김명제 감독, 최무룡, 엄앵란 주연의 <불가사리>였다. 고려 말기에 역적들의 손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한 청년이 원한에 사무쳐 쇠를 갈아 마시는 불가사리라는 괴물로 환생,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괴기물인 이 영화는 1985년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불가사리>로 불붙은 특수효과영화는 <옹고집>(1963), <대괴수 용가리>(1967), <우주괴인 왕마귀>(1967) 등으로 이어진다. 일본 기술진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불가사리>의 특수효과는 지금은 물론이고 당대 기준으로도 그리 ‘특수’한 느낌의 ‘효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괴수 용가리>가 만들어지던 66년 당시 <영화잡지>는 “방화 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특수촬영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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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춘향전>(1935)의 야심은 ‘유성’에만 있지 않았다. 이필우는 1931년 디스크에 사운드를 따로 녹음하는 방식의 유성영화가 수입되자 4년 연구 끝에 필름에 직접 소리를 입히는 방식의 P.K.R 발성장치를 만들어낸다. 형인 이명우가 연출과 촬영을 맡고, 이필우가 조명과 녹음을 맡은 <춘향전>은 애초 동시녹음까지 욕심냈던 것. 하지만 현장은 머릿속의 구상을 헤집어놓았다. 처음 써보는 시스템이라 작동이 서툴렀고, 새벽 두부장수 소리부터 자동차 소리까지 덤벼드는 노이즈를 어찌할 수 없었다. 후시녹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상과정까지 거치고 나니 버려야 할 필름만 4만척. <농부가>를 집어넣으려 하였으나 충분한 경비를 얻지 못해 포기한 뒤 양악으로 대체한 것은 이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춘향전>이 놓친 최초의 동시녹음영화의 타이틀은 이듬해 <홍길동전>(1936)이 가져갔다.최후의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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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독립영화 흥행작 <파업전야>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파업전야>(1990)를 첫손에 꼽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다. 총관객 4만여명. <오! 꿈의 나라>에 이은 장산곶매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1990년 4월6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 11개 지역에서 동시상영됐다. 한수라는 평범한 노동자가 모순된 현실을 인식하고 투쟁에 동참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극영화. 당시 정부는 4월7일, 상영 이틀째인 서울의 예술극장 한마당에 난입해서 영사기재와 필름을 압수했을 뿐 아니라 4월13일 전남대 상영장에 헬기를 띄우고 1800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등 공권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공동투쟁위원회가 만들어지고, 4월15일부터 전국 8개 지역에서 동시상영 투쟁이 시작되는 등 전국적인 대열을 결집케 만들었다.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아기 업고 영화 만든” 감독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보라고 그래. <미망인>(1955)을 내놓으며 ‘여성 감독 1호’라는 수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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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변사 우정식무성영화 시절, “목소리를 가진” 변사는 스타 중의 스타였다. 행진곡에 맞춰 ‘모닝 코트’차림으로 등장한 변사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컨닝 램프가 부착된 무대 아래쪽 테이블에서 흥을 돋우었다. 최초의 변사로 기억되는 이는 우정식. 이보다 앞서 황실에서 활동사진을 설명하는 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직업적인 변사로 보기가 어렵다. 변사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때는 1912년 영화만을 전문으로 상영하는 경성고등연예관 개관을 전후해서라고 보는 것이 정설. 우정식은 이 무렵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악인의 볼따귀에 주먹을 날릴 때 “어드러 둥둥!” 하는 추임새는 그만의 특기였다고 한다. 이때 500여명 남짓한 관객도 함께 “어드러 둥둥!”을 외쳤다니 극장 안 열기는 뜨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 양반 출신인 그는 “말이 더디고 박력이 없어” 2권(卷)짜리 단편 활극에만 주로 기용됐다. 단성사의 서상호, 조선극장의 김조성, 우미관의 이병조 등 내로라 하는 경쟁자들이 들어선 시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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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을 70%쯤 찍은 김지운 감독과 만나기 6시간 전. 시사회장에 자리를 잡고, 거른 점심을 때워줄 빵을 베어물기 위해 허겁지겁 입을 벌린 찰나, 전화가 울린다. 침이 꼴깍 넘어간다. “감독님 혹시 또 무슨 변고라도” “어, 밤에 약속이 생겨서요. 좀 앞당길 수 있을까 하구요.” “약속이 11시예요 그럼 8시면 괜찮겠네요.” “그러면… 한… 8시 반에 만날까요” “아, 8시 반이요” “어어, 아니… 45분으로 하죠.”여기서 플래시백. 일요일에 걸려온 전화로 애초 화요일 저녁이었던 약속은 월요일로 당겨졌다가 정작 월요일에는 수요일로 밀렸다. 그런데 마감 늦겠다는 한숨에 마음이 약해진 김지운 감독이 화요일 밤 10시를 허락한 것까지가 ‘지난 이야기’였다.어쩄거나 약속 성사 과정부터 반전의 묘미와 공포를 절감하게 만든 김지운 감독과의 약속은 저녁 8시45분이라는 소심한 시각으로 마침내 낙착됐다.기다리는 사이 지난주 세트에서 김지운 감독이 지나가듯 던진 말
<장화,홍련> 김지운이 꾸는 한겨울밤의 악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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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영화는 까다로운 생물김지운 감독은 스스로 “배우를 엄청 많이 탄다”고 표현한다. 장화와 홍련을 무덤에서 일으켜세우고 집을 지어준 것은 감독이지만, 마룻장을 삐걱거리며 3층 목조가옥 안으로 걸어들어온 배우들은 영화 <장화, 홍련>의 실내를 변화시켰다. 사람을 대할 때는 대범하고 털털하면서도 주변의 소음, 냄새 같은 소소한 자극에 연신 “이게 뭐지” 하며 촉수를 곤두세우는 모습이 감독을 사로잡았던 염정아는 차고 강한 여자였던 계모 은주를 선병질의 과민한 인물로 탈바꿈시켰다. 그녀의 ‘계모’는 위압적인 강자가 아니라 지나치게 예민해서 상대를 질식시키는 강자다. 젊은 신인 임수정과 문근영에게는 영화의 공간과 한 덩이로 빚어졌을 때 관객을 매료하고야 말 모멘트가 있다. “이 아이가 정말 나를 보고 있나 나를 상대하고 있나” 시선에 따라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마스크를 가진 장화 역의 임수정이 우연히 콘택트 렌즈를 빠뜨린 날 김지운 감독은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장화,홍련> 김지운이 꾸는 한겨울밤의 악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