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대전 막바지인 1944년, 핀란드의 라플란드 광야에서 한 남성(요르마 톰밀라)이 핀란드와 나치 독일군의 전쟁을 뒤로한 채 금광 캐기에 열중하고 있다. 상반신이 흉터로 가득한 이 중년 남자의 정체는 퇴각하는 나치 부대와 마주치면서 밝혀진다. 그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핀란드 특수부대 출신 아타미 코피. 죽은 듯 살려 했으나 나치 장교 브루노(악셀 헨니)가 금을 노리자 불멸자라 불리는 이 사나이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불굴의 의지’라는 뜻의 핀란드어를 제목으로 한 <시수>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처럼 잔인하지만 조용하며, <존 윅>만큼의 킬러 액션을 선보이지만 스타일리시하진 않다. 혼자 살아남은 죗값을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나가는 것으로 치르려는 한 남자의 황폐한 내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게 이 영화의 목표다. 미화하지 않겠다는 듯한 사실적인 연출로 묘사된 대결 신과 시종 피 칠갑 상태인 아타미의 얼굴 숏은 어떤 화려한 기술을 펼칠 여력도 세상을 살아갈
[리뷰] ‘시수’, 말이 필요없는 핀란드에서 온 불멸자
-
태평양전쟁 중인 일본, 11살 소년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도쿄의 대화재로 엄마를 잃는다.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기무라 다쿠야)는 도쿄를 떠나 시골의 저택으로 이사를 온다. 왜가리 저택으로 불리는 이곳은 전일본과 서양 저택을 섞은 독특한 곳으로 과거 저택의 주인이었던 큰할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곳에서 마히토의 아버지는 죽은 엄마의 여동생 나츠코(기무라 요시노)와 결혼을 하고 마히토는 복잡한 심경을 숨긴 채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왜가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마히토 앞에 나타나 엄마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얼마 뒤 새어머니 나츠코가 사라지자 왜가리 남자(스다 마사키)를 의심하고 쫓아간 마히토는 왜가리 남자와 함께 다른 차원으로 끌려들어간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뒤섞인 그곳에서 마히토는 저택의 비밀과 세계의 운명을 마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 한번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왔다. 20세기 애니메이션의 정점에 오른 전설이 다시 돌아올 땐 언
[리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내는 삶의, 존재의,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움
-
홍상수의 영화를 보거나 들으려 하기에 앞서 이해부터 하려고 들 때 생겨나는 오해들이 있다. 이러한 오해들이 예비된 함정에 대하여 누구도(어쩌면 홍상수 그 자신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홍상수는 그 함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뒤바꿔놓는다. <우리의 하루>에서 시인 홍의주(기주봉)가 함께 대화하던 배우 지망생에게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 맞냐며 질문을 되풀이할 때, 이 대사는 술을 마시기도 전부터 부리는 주정이 아니라 그러한 매혹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여기 두개의 하루가 있다. 하나는 시인 홍의주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배우 상원(김민희)의 것이다. 혼자 사는 홍의주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대화를 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낯선 사람과 잠시 함께 살게 된 상원은 또 다른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역시
[리뷰] ‘우리의 하루’, 영화에 담긴 적어도 네 개의 하루
-
진부한 어휘를 경계하고, 진심이 아닌 걸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이들은 자주 세계와 대치하기 마련이다.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는 그런 인물이 두명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녀 사이다. 둘은 세상과 싸우는 동시에 그 고통의 현장을 보이느라 서로에게도 많은 상처를 입혔다. 영화는 젊은 여성인 채영이 일대일 상담에 참여하는 걸 보여주며 시작한다. “내가 잘했어”라는 말을 하라고 요청받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그는 이 상황이 불편해 보인다. 대신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의 사이사이, 내레이션과 그림일기 장면을 통해 그는 10대 때부터 겪었던 자신의 내밀한 욕구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채영은 15살, 극단적인 식사 거부로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거식증 치료를 받고 퇴원하자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곧 폭식증이 시작되었다. 음식을 두고 벌어지는 채영의 불안정한 나날들을 지켜보며 엄마인 상옥 또한
[리뷰]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애증의 관계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연대와 불화의 방식
-
-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영화 <더 웨일>
사회가 만든 편견을 깨트리게 도와주고,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간직한 각기 다른 형태의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영화다. 모두 한번쯤 꼭 봤으면!
tvN <놀라운 토요일>
TV프로그램을 본다는 느낌보다 같이 노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즉흥적으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유쾌한 에너지가 너무 좋다. 문제를 맞히는 게 정말 중요한가? 그냥 그 신나고 즐거운 게 좋은 거지.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
일본 드라마로 주인공이 다시 태어나며 삶을 반복하는 이야기다. 온기가 느껴지는 따뜻한 서사 속에서 인간에게 왜 우정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유난스럽게 ‘친구 최고!’를 외치기보다 우정이 어떻게 인간의 연대를 의미하는지, 우리 삶이 그것으로 어떻게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
[LIST] 은희경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
<방랑자>
왓챠, 웨이브, 티빙 플레이지수 ▶▶▶▶
어느 겨울의 시골 개울가, 젊은 여자의 얼어붙은 시신이 발견된다. 그녀의 이름은 모나(상드린 보네르). 영화는 시간을 되돌려 모나의 표류의 여정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모나가 마주친 사람들의 파편적인 기억과 인상은 모나라는 사람의 일부를 구성해나가고, 모나는 번번이 그들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모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의 언어는 모나의 발걸음을 좇지 못하고 내면에 가닿지 못한다. 방랑의 끝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관객들은 한계적 공허와 고독을 느끼게 된다. 다큐-픽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삶의 본질과 속성을 냉혹하고도 미학적으로 포착한 아녜스 바르다의 걸작.
<어나더 어스>
디즈니+ 플레이지수 ▶▶▶
MIT 입학을 앞둔 17살 로다(브릿 말링)는 어느 날 운전을 하다 일가족이 타고 있는 차를 들이받는다. 사고로 작곡가 존(윌리엄 마포더)의 임신한 아내와 어린 아들은 그
[OTT 추천] ‘방랑자’ ‘어나더 어스’ ‘모성’ ‘스타렛’
-
넷플릭스 / 감독 이정효 각본 장유하 출연 배수지, 양세종 / 플레이지수 ▶▶▶
민송대학교 학생 원준(양세종)은 새로 들어간 셰어하우스에서 전직 아이돌 이두나(배수지)를 만난다. 모종의 사연으로 인해 인기 아이돌 생활을 그만두고 연극영화과 대학생으로 지내고 있는 두나는 아이돌이었다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직설적이고 시니컬한 언행으로 원준을 놀라게 한다. 처음엔 원준을 경계하며 위악적 태도를 보이던 두나는 원준의 따듯한 마음씨와 다정한 성품에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두 사람은 그렇게 친구도 연인도 아닌 묘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른다. 한편 원준의 첫사랑 진주가 같은 대학 학생으로 원준의 앞에 나타나고, 원준은 풋풋하고 설레는 고민에 빠진다.
민송아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이두나!>는 서사 자체보단 캐릭터와 배우의 매력이 극의 원동력이 되는 부류의 로맨틱 코미디다. 관계에 서투른, 그래서 함께 있을 때 보다 흥미로운 조화를 선보이는 두 남녀가 만나고
[OTT 리뷰] 이두나!
-
앤젤라(리디아 주잇)와 캐서린(올리비아 오닐)은 단짝 친구다. 평소처럼 등교하던 이들은 동시에 감쪽같이 사라진다. 실종 3일 후 이들은 어느 헛간에서 발견되고 이전과 달리 이상 증세를 보인다. 두 아이의 몸을 악마가 동시에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충격인 것은 두 아이 중 한명을 살리면 다른 한명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엑소시스트: 믿는 자>는 실종됐던 두 소녀가 악마에 빙의된 채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오컬트 호러 영화다. <할로윈>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리부트한 데이비드 고든 그린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올해 작고한 윌리엄 프리드킨의 명작 <엑소시스트>(1973)와 세계관을 공유한다. 두 영화를 잇는 연결 고리로 엘런 버스틴이 연기한 크리스 맥닐이 등장한다. 앤젤라의 아빠 빅터 필딩(레슬리 오덤 주니어)은 엑소시즘 전문가로 등장하는 크리스에게 상담을 받기도 한다. 영화가 주목하는 점은 아빠 빅터의 선택이다. 그는 지진으로 죽기 직
[리뷰] ‘엑소시스트: 믿는 자’, 프리드킨이 봤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
도시 어딘가에 떠돌 법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모았다. <괴담만찬>은 인기 웹툰 <테이스츠 오브 호러>를 원작으로 한 옴니버스 호러다.
여고생들이 따라 추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영상을 봤다가 피의 대가를 치르는 <딩동 챌린지>, 학업 스트레스가 심한 여학생이 네발 달린 짐승을 죽이면 성적이 오른다는 말에 혹해 잔인한 일을 벌이는 <네발 달린 짐승>, 카지노에서 큰돈을 딴 남자의 꺼림칙한 모텔 숙박 기를 그린 <잭팟>, 아파트 헬스장에서 발생하는 이상한 사고를 관찰 하는 <입주민 전용 헬스장>, 응급 구조사의 억압적인 회복 과정을 담은 <재활>, 먹방 BJ들의 선 넘는 대결을 지켜보는 <식탐>까지 총 6개 단편을 묶었다.
매일 스쳐 지나가는 범상한 사람들과 의식 없이 오가는 일상적 공간을 주인공과 주 무대로 설정해 좀더 내 것 같은 공포를 안긴다. 자기 방이나 어느 밀실에 혼자 있는 인물이 등 뒤
[리뷰] ‘괴담만찬’, 내 것 같은 공포를 안기지만 심심하다
-
수상스키 코치 루크(채범희)는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6년 사귄 애인 샤오차이(곽서요)에게 청혼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소집하고 캠핑장까지 빌린 그날 저녁, 무릎 꿇고 결혼반지 케이스를 열지만 샤오차이는 야속하게 그 뚜껑을 닫아버린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루크는 놀랍게도 프러포즈 디데이 아침, 자기 방 침대에서 깨어난다.
<세이 예스 어게인>은 타임루프 설정과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결합한 대만 청춘영화다. 루크가 반복되는 하루 동안 어떻게든 샤오차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유쾌하고 화사한 톤으로 담아낸다. 후반부에 이르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숙해진 주인공을 내세워 한 남자의 성장영화로 나아간다. 중요한 건 프러포즈 성공이 아닌 믿을 만한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루크를 지지하며 그가 결혼을 준비하는 시간을 진중한 시선으로 펼쳐 낸다. 대만영화답게 음악을 활용해 주인공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형성
[리뷰] ‘세이 예스 어게인’, 특색은 없어도 갖출 건 갖춘 대만 청춘영화
-
화가 살바도르 달리(벤 킹슬리)를 좋아해 그의 갤러리에서 일하는 젊은 예술가 제임스(크리스토퍼 브리니)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다. 달리에게 팬심을 담아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조수 제안을 받은 것. 달리가 전시회에 걸 작품을 성실히 그리는지 감시하라는 상사의 특명 아래 거장의 최측근이 된 제임스는 황홀경에 들어선다. <달리랜드>는 위대한 예술가보다 그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자기 세계를 재구축하는 평범한 한 청년에게 관심을 둔다. 제임스는 유명 인사가 한데 모인 성대한 파티와 달리의 붓질과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그의 작업실을 오가며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문화와 지식을 단시간에 흡수하는데, 영화는 임팩트 있는 사건을 계기로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현란하게 담아낸다. 아내 갈라(바르바라 주코바)와의 관계를 통해 달리라는 한 인간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또 다른 핵심이다.
서로를 갉아먹으면서도 원했던 부부의 정열적인 관계를 플래시백과 제삼자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리뷰] ‘달리랜드’, 달리랜드의 위대한 주인보다 초대된 젊은 예술가에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