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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달빛 아래 송연하게 뻗어 있는 궁 안으로 우리는 홀리듯이 빨려들어간다. 거기에는 왕의 이야기가 있지 않고 궁녀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궁을 벗어날 수 없으며 궁의 문이 하나 둘 차례로 닫힐 때에야 우리의 시선은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궁에 갇힌 자들을 쫓아 시선을 움직이고 추리를 동원하는 것, 그러니까 오로지 이 내부의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이 <궁녀>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닫힌 공간에서 살인과 배신이 횡행하기 때문에 미스터리 추리극의 긴장은 늘 가중되는 것이다. 또한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폐쇄의 장소를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건 오랜 호러 장르의 법칙이기도 하다. <궁녀>는 폐쇄된 공간에서의 의문스런 범죄라는 오래된 장르적 과제를 팽팽한 긴장력으로 해내는 미스터리 사극이며 호러물이다.
궁에 살고 있는 자들은 모두 왕의 것이다. 수도사가 신의 소유인 것처럼 궁녀는 왕의
흥미롭고 성공적인 복합장르 <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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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나 결혼이라는 척도는 여자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물론 현실에서야 어중간한 여자들이 더 많겠지만 적어도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자주 쓰이는 분류법이다. <어깨너머의 연인>식으로 말하자면, 속옷을 짝짝이로 입는 여자와 세트로 갖춰 입는 여자 혹은 결혼보다는 연애 타입의 여자와 결혼이 체질인 여자, 이런 분류가 가능하다. 바야흐로 요즘은 이렇게 다른 부류의 여자라 할지라도 섹스에 있어서만큼은 큰 시각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전신운동 되겠다.” “일주일에 세번만 하면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대.” 이건 타입이 다른 두 여자가 나란히 앉아 포르노를 보면서 나누는 대사다.
포토그래퍼 정완(이미연)은 자신이 일하는 스튜디오 사장 영후와 우연히 가까워지지만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쿨’하고 싶은 정완의 생각과는 달리 그와 함께 나누는 일상은 제도와 관습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일깨워준다.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어.” 섹스하는 순간
‘쿨’해지지 않는 이율배반 <어깨너머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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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게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그 거짓말을 깨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거짓말을 계획한 사람도, 거짓말에 동참한 사람들도 모두 그 거짓말에 묶여 움직일 구석이 없어지는 상황.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바르게 살자>의 과제가 그렇다. 한적한 삼포시에 연쇄 은행강도사건이 발생한다. 때마침 이곳에 새 경찰서장으로 부임한 이승우(손병호)는 민심도 달래고 성과도 올릴 겸 경찰서 인력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모의강도훈련을 실시하기로 한다. 과시할 요량으로 언론까지 불러들인 이 모의훈련의 강도 역할로 지목된 사람은 교통과 순경 정도만(정재영). 서장은 그가 답답할 정도의 원칙주의자라는 점을 이용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둬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강도 역을 해줄 것”을 요청한다.
<바르게 살자>는 한마디로 극중극 드라마다. 이 극중극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 ‘정도만은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캐릭터 설정상의 전제. 둘째, 인질들이 정도
극중극 드라마 <바르게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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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의 선수 산티아고 무녜즈(쿠노 베커)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1편인 <골!>(2005)이 평범한 축구 꿈나무 소년의 잉글랜드 프로축구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 입단, 활약상을 그렸다면 <골2: 꿈을 향해 뛰어라>는 이 청년이 유럽 최고 축구구단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승승장구할 듯했던 산티아고의 인생은 조금씩 삐걱거린다. 뉴캐슬에서 먼저 레알로 이적한 선배 개빈(알레산드로 니볼라)과 가까워지면서 그는 연습보다 파티에 빠지게 되고, 여자친구와 불협화음을 겪고, 필드에서의 기회를 잃어간다.
1편처럼 <골2…>도 대단한 축구상식이 필요하지 않은 스포츠영화이고, ‘승리’라는 결과에서 모든 난관들의 보상을 찾는 단순한 플롯의 성장드라마다. 이렇게 전형적임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이라는 인상을 덜 주는 까닭은 이 영화가 쓸데없는 감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예산 공포영화 <하우스 오브 왁스>로 주목받았던
축구상식이 필요하지 않은 스포츠영화 <골2: 꿈을 향해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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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산 웰메이드 대중영화인 <사모안 웨딩>은 사모아족 4인조 ‘웨딩 크래셔’들의 좌충우돌 유쾌한 소동을 그린 로맨틱코미디다. 뉴질랜드 거주 사모아인이라는 설정은 다소 낯설지만, ‘결혼’과 ‘연애’를 두고 벌이는 소동이란 국경과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달콤씁쓸한 재미와 갈등을 주는 법이다. 결혼엔 생각도 가망도 없는 사모안족 네 친구들은 남 결혼식을 깽판 치며 다닌 지 수년째다. 이들만 떴다 하면 멀쩡한 결혼식이 난장판이 되니 마을의 목사는 급기야 이들에게 결혼식 참관 금지령을 내린다. 문제는 이 4인방 중 한명인 마이클의 동생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제법 염치는 있는지라 이 철부지 형님들은 어떻게든 마이클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애를 써본다. 그러다 얻은 아이디어가 바로 ‘참한 여자와 결혼식 가기’. 여자 파트너가 있다면 결혼식에서 문제를 일으킬 리 만무다. 그러나 심사숙고와 담을 쌓은 세파는 동거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책임감과도 담
뉴질랜드산 좌충우돌 코미디 <사모안 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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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도 온 지구가 눈으로 덮여서 착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객기 승객은 그 안에서 ‘늙어 죽어야’ 한다. 또 아프리카 우간다는 ‘무중력병’으로 사람들이 천사처럼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재해’를 겪고 있다. 토마스 빈터베르그가 각본을 쓰고 감독한 <올 어바웃 러브>는 이렇게 초현실주의적인 위트를 섞어서 문명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어느 부부의 애틋하고 숭고한 사랑 이야기가 균형추 역할을 한다(여주인공 클레어 데인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출연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실제로 줄리엣 역을 맡았었다).
멀지 않은 미래 2021년. 세계는 이상 기후와 종말론적 징후들로 가득 차 있다. 폴란드에서 학자로 살고 있는 존(와킨 피닉스)은 뉴욕에서 세계적인 스케이팅 스타로 활약하는 아내 엘레나(클레어 데인즈)와 별거 중이다. 두 사람의 마음은 멀어지고 존은 이혼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해 뉴욕공항에 도착한다. 환승시간에 잠시 서류를
세상에 남은 건 ‘사랑뿐’ <올 어바웃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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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클라이브 오언)는 한 임신부가 총을 든 킬러에게 쫓기는 것을 보고 얼떨결에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들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당근을 씹어대는 그는, 당근으로 상대방의 목을 관통하고 눈을 찌르는 등 기상천외한 액션을 펼치는 무뢰한이다. 그 임신부가 막 낳은 아이를 보호하게 된 그는 옛 연인이자 화류계의 여왕 퀸타나(모니카 벨루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급기야 두 사람은 또 다른 킬러 허츠(폴 지아매티)에게 함께 쫓기게 된다. 그러면서 스미스는 신생아들을 둘러싼 섬뜩한 음모가 정치권과 연루돼 있음을 알게 된다.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은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하는 액션영화다. 아니 때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예측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당근을 이용한 과격한 액션은 물론, 아이를 등에 업고 쌍권총을 날려대는 등 과거 홍콩 누아르의 과잉된 총격전을 더욱 극단적으로 연출한 장면들의 연쇄는 말 그대로 거침이 없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현란한 액션들의 연속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거침없는 액션의 질주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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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V무비에서 메이저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한해에 두세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용이 간다>는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다. 플레이스테이션2 성인용 게임 <용과 같이>( 龍が如く)를 영화화한 작품인데, 보통 게임에 기반을 둔 영화들이 매끄러운 스토리 전개로 게임의 단절적인 서사를 넘어서려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미이케의 작품은 과장된 캐릭터와 개연성에는 크게 구애되지 않는 게임의 속성을 영화에 고스란히 끌고 들어왔다.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다’라며 감독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드러난 영화는 ‘재미없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감독의 태도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이 영화는 재미를 위해 다소 황당무계한 에피소드들을 빠른 속도로 이어나간다.
스즈키 세이준의 <도쿄 유랑자>의 주인공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전설적인 야쿠자 키류 카즈마(기타무라 가즈키)가 10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카무로쵸에 돌아오자마자 은행에 보관되어
‘싸나이’들의 액션 <용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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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두개의 이야기로 직조된 공포 멜로다. 김민숙 감독이 맡은 첫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논개의 이야기가 재해석된다. 만약, 일본 장수를 껴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던 논개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는 일본군에 연인을 잃고 복수를 다짐하던 한 여인이 그마저 실패한 뒤, 혼령이 되어 지상을 떠돈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한은 핏물이 되어 일본 장수 기무라 주변을 맴돌고 그는 점차 광기로 치닫는다. 감독이 밝힌 대로 영화는 역사적인 관점을 취하는 대신, 사랑을 둘러싼 인간의 내면을 심리적 공포를 통해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인다. 특히 나비를 모티브로 사랑, 죽음, 광기 등의 관념을 형상화하는 영화의 미학은 눈여겨볼 만하다. 상상력 역시 기발하지만, 짧은 시간에 방대한 이야기를 끌어안다보니 종종 비약적인 전개가 거슬린다. <편지> <산책> 등을 연출했던 이정국 감독이 만든 두 번째 이야기는 과거에서 현재의 시점으
욕망이 빚어낸 공포 멜로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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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한 그림자가 온 지구면을 덮고 있는 요즘, 채털리 부인의 해피엔딩을 향해 데이비드 매킨지 감독의 <어사일럼>은 이렇게 묻는다. “욕망을 억압하는 신분사회로부터 ‘영원히’ 도망갈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와 교도관들이 지배하는 ‘어사일럼’(정신병에 걸린 범죄자들의 수용소)의 ‘외부’라는 것이 있기나 한가?”
1950년대 영국 북부의 한 ‘어사일럼’. 정신과 의사인 남편(휴 보네빌)을 따라 아들 찰리와 함께 사택으로 이주해온 스텔라(나타샤 리처드슨)는 무료하기만 하다. 출세주의자에 질투심 가득한 남편은 일에만 몰두하고 다른 의사 부인들과의 친교는 의례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사택 정원을 가꾸던 에드가(마튼 크소카스)와 그녀의 눈이 마주치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관계로 치닫는다. 줄거리의 앞부분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둘이 벌이는 긴박감있는 옥외정사에 할애되고, 후반부는 연이은 두 남녀의 탈출과 탈출 이후의 여정에 할애된다.
고전이 된 <채털리 부인>의 도
채털리 부인의 해피엔딩 <어사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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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센스, 센서빌리티> <설득> 등. 제인 오스틴의 여자들은 항상 돈과 사랑을 두고 겨룬다. 극성인 어머니와 예의와 이성에 따라 행동하려는 딸의 구도로 벌어지는 싸움이지만 이는 그 시대 여성들이 고민해야 하는 상반된 두 가지 요소를 반영한다. 가부장 중심적인 사회에서 좋은 가문과 결혼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이어갈지, 자신의 감정과 사랑을 존중해 결혼의 상대자를 고를지. 간혹 ‘그래봤자 시집 잘 가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동시에 제인 오스틴의 여자들이기에 제기할 수 있는 문제다. 현실을 고민한다는 건 현실을 불편하게 느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결혼할 나이가 됐지만 남자보다 글쓰기에 관심이 더 많은 여자 제인 오스틴(앤 해서웨이)은 런던에서 온 법학도 톰 리프로이(제임스 맥어보이)와 사랑에 빠진다. 처음엔 자신의 글을 비판했던 리프로이에게 반감이 컸지만 그가 건넨 H. 필딩의 소설 <톰 존스>
제인 오스틴 되기의 어려움 <비커밍 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