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라도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릴 것이다. 두 번째 장편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 이어 <뜨거운 녀석들>을 내놓은 에드거 라이트는 <저수지의 개들>을 만든 뒤 <펄프 픽션>으로 곧바로 승천하던 무렵의 쿠엔틴 타란티노를 보는 듯하다. 두 감독은 모두 유희정신을 기본 동력으로 삼고,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취향을 양 날개 삼아, 재기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라이트가 타란티노의 아류인 것은 아니다. 그는 좀더 친근하고 유머러스하며 정치적이다. 길고 긴 재담을 늘어놓거나 이리저리 비틀어낸 구조의 묘미를 즐기는 것보다는 신과 신 사이의 연결 방식에 훨씬 더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란티노의 영화가 점점 더 심플해지는 데 비해서 라이트의 영화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좌천되어 한가로운 시골 마을 샌포드로 가게 된 엘리트 경찰 니콜라스 엔젤(사이먼 페그). 대니 버터맨(닉 프로스트)과 콤비를 이룬 엔
파시즘에 맞서는 열혈 경찰 <뜨거운 녀석들>
-
“개인지 늑대인지 구별하기 힘든 어둠 직전의 시간을 프랑스 사람들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투명하게 인식하는 짧은 시간이다”라고 감독 전수일은 밝힌 적이 있다. 프랑스인의 존재와 인식에 대한 격언이 한국으로 넘어와, 그것도 유년 시절 자신의 집을 찾아 종일 마을을 헤맨 뒤 결국 허탕을 치는 한 실향민 2세의 이야기로 넘어와 역사의 시간을 기억하는 애달픔이 되고야 만다. 술에 취한 주인공 남자는 술집 주인을 붙들고 엉뚱하게 묻는다. “아주머니, 제가 어디 살았는지 아세요?”
부산의 영화감독 상규(안길강)는 고향 속초에 사는 숙모가 6·25 때 헤어진 숙부를 찾으러 중국 옌지에 가는 데 동행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길 고속버스 안에서 상규는 우연히 눈에 들어온 여자 영화(김선재)에게 관심이 쏠린다. 속초 민박집에서 영화를 다시 만난 상규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으러 태백에 가는 중이라는 그녀의 여행을 따라 나선다. 거기서 그들을
쓸쓸한 여행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유괴살인범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여자의 사투를 그린 공포스릴러물. 최고의 주가를 누리는 여성 톱모델이 어딘가로 납치되어 고통스런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탈출하려 애쓰나 번번이 실패하고, 옆방에 감금된 남자와 힘을 합쳐 또 탈출을 시도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서 침대에 사지가 묶인 채 서서히 피를 뽑히는 희생자와 이 죽어가는 희생자를 대망치로 내려찍는 감금자를 보여준다. 서막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공포와 스릴은 이후 얼굴에 염산 붓기, 오장육부 믹서로 갈아 주스 만들기, 귀여운 강아지 쏴 죽이기 등 더욱 다양하게 불쾌하고 수위 높은 아이디어들로 90여분간 개휴를 반복한다. <4.4.4.>는 완벽한 감시·통제체계가 마련된 공간 안에서 감금자와 피랍자가 벌이는 게임이며, 플롯의 앞길은 쉽게 내다보인다. 영화가 재미없고 기분 나쁜 건 그러나 뻔한 플롯 때문이 아니다. 게임의 운영자인 감금자 캐릭터에 무작정 강도 높은 클리셰들만 주렁주렁 달아놓고 일관성과 의도라곤 찾아볼
매력없는 감금자와의 게임 <4.4.4.>
-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로 국내에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각본, 원화, 연출 등을 일임하는 1인 제작방식으로 파란을 일으킨 감독이 팀 작업으로 전환한 뒤 내놓은 두 번째 작품으로, 3개의 단편이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첫 에피소드 <벚꽃 이야기>는 전학으로 헤어지게 된 단짝 다카키와 아카리가 재회하기까지 과정을, 두 번째 에피소드 <코스모나우트>는 다카키를 짝사랑하는 카나에의 이야기를, 마지막 에피소드 <초속 5센티미터>는 성인이 된 다카키와 아카리의 후일담을 담는다.
세 단편을 아우르는 제목이기도 한 ‘초속 5센티미터’란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를 의미하는데, 감독은 그 밖에도 일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속도들을 대입해가며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맞닿는 지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티끌 하나 묻어나지 않을 것처럼 순수한 사랑, 헤어짐과 애절한 그리움. 전작들을 관통해온 테마는 <초속
마음이 맞닿는 지점 <초속 5센티미터>
-
-
보험사정원 전준오(황정민)는 새벽 2시30분 습관처럼 깨어난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려면 알코올이 필요하다.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못 견딜 것 같다”는 그의 악몽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이다. 소년 시절, 그는 동생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그 원인에 일조했다. 출근 첫날, “자살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희미한 목소리의 전화 목소리를 향해 그는 ‘절대로 상담자 개인의 정보를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근무 매뉴얼을 어기고 만다. 설사 보험금을 받을 수 있더라도 자살을 해선 안 되는 이유를 고언하는 그의 간절한 태도는 슬픈 과거에서 탈출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다. 살아가도 될 만한 인간의 그 무언가를 믿고 지원하지 않고서는 버틸 재간이 없다. 그 미덕을 노출하는 순간, 이건 지독한 약점이 되어 공포의 게임을 호명하게 되고 그 자리에 초대받는다. 사람을 구하기 위한 안전망인 보험이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로 돌변하는 역설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냉기가 흐르는 사이코패스 <검은집>
-
김진아 감독은 여성의 욕망에 천착한다. <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와 <그 집 앞>에서 그녀의 화두는 침묵하는 여성의 욕망을 수면 위로 떠올려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두번째 사랑> 역시 그런 맥락에 있지만, 자기고백 색채가 짙었던 전작들에 비해, 정통멜로의 관습을 비교적 충실히 따라가며 차분히 극적 긴장을 쌓아올리는 작품이다.
가정이 불안정한 백인 중산층 유부녀(베라 파미가)와 생존이 불안정한 동양인 하층민 남자(하정우)의 사랑은 말하자면, 애초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로 촘촘히 둘러싸인, 이미 비극적 결말을 내재한 것이다. 계급과 인종은 이 비극적 멜로의 씨앗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인물들의 힘으로 거둬낼 수 없는 그 장벽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랑에 빠져드는 두 남녀의 심리적 변화와 겉잡을 수 없는 욕망 그 자체다. 그러나 영화는 인물들의 내면에 함께 동요하지 않고 시종일관 고요한 시선을 유지한다. 인
세련된 불륜 <두 번째 사랑>
-
동시대 젊은이들의 달빛과도 같은 은은한 열광을 받고 있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의 감독 이누도 잇신이 찾아온다. 덩달아 쌍수 들고 환영할 사람도 많으니, 인기 아이돌 ‘아라시’의 다섯 멤버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언더그라운드적 존재이며 다수의 서정만화를 남겼던 나가시마 신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드라마 <황색눈물>을 골격으로 했다. 만화가, 소설가, 가수, 화가를 지망하는 네명의 청춘들과, 이들의 파이팅을 묵묵히 지원하는 노동청년. 이 예술구락부원들이 예술가적 자유를 꿈꾸며 에이스케(니노미야 가즈나리)의 좁은 자취방에 모여들며 영화가 전개된다. 주변부 삶에 애정을 보여왔던 이누도 잇신은 사실상 일본의 현재와 과거에도 관심이 많다. 일등과 금메달만을 기억하던 일본의 고도성장기인 1963년을 뒤돌아보며 감독은 조심스레 세대론을 전달한다. 전쟁 전 세대인 에이스케 어머니의 병과 죽음, 에이스케와 그의 예술을
이누도 잇신과 아라시가 찾아온다, <황색 눈물>
-
한탕에 성공한 뒤 각자의 삶을 살고 있던 오션스 일당을 루벤(엘리엇 굴드)이 라스베이거스로 다시 불러모은다. 동업을 약속했던 윌리 뱅크(알 파치노)의 배신으로 몸져 누워 친구들의 걱정을 산 탓이다. 루벤을 위로하고자 한때 적이었던 테리 베네딕트(앤디 가르시아)까지 끌어들인 대니(조지 클루니), 러스티(브래드 피트), 라이너스(맷 데이먼)를 비롯한 오션스 일당은 복수를 다짐한다. 뱅크가 루벤의 땅에 건립할 호텔 카지노에서 엄청난 잭팟을 터뜨리는 동시에 꼭대기층에 보관된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훔치려는 것. 문제는 뱅크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고의 호텔을 의미하는 ‘다이아몬드 5개 등급’ 호텔을 여럿 지닌 그는 작은 실수에도 “자네, 해고야!”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처럼 편집광적인 완벽주의자다. 호텔의 개장을 지휘하는 개인비서 아비게일 스폰더(엘렌 바킨) 역시 남자에 약하다는 것을 빼면 약점을 찾을 수 없는 고약한 일중독자. 그들을 속이려면 더욱 철저한 작전이 필요하다.
꽤나 치밀하게 조율되는 사기 교향곡, <오션스 13>
-
보그의 패션에디터인 잭스(브리트니 머피)의 사생활은 판타지 그 자체다. ‘간지’나는 직업과 적당한 매력을 지닌 섹스파트너, 다정다감한 게이 룸메이트에 시종일관 유쾌한 친구들이 그녀의 쿨한 삶을 채워준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하고는 절대 자지 않는 잭스의 고민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사랑에 대한 욕구불만이다. 그런 잭스 앞에 어느 날 외모에서 성격까지 부족함이 없는 파올로(샌티에고 카브레라)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는 잘생기고 매너 좋고 속물도 아닌 이런 남자가 과연 이성애자일지 의심스럽다.
<러브&트러블>은 잭스의 어설픈 ‘게이다’가 빚어낸 소동극이다. 세계적인 패션지 보그의 패션에디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남들은 모르는 세계에 현미경을 갖다대는 식의 접근은 없다. 오히려 <러브&트러블>의 매력은 패션지를 보는 독자들의 즐거움과 닮았다. 방귀 뀌는 스타일을 가지고 연애심리를 풀이하는 등의 재치있는 대사
좋은 수다거리, <러브 & 트러블>
-
취업 센터에서 일하는 사토시(수다 겐지)는 포르노영화를 수집하는 데 광적으로 열을 올리는 사내다. 고교생 아이바(아이바 루비)는 친구와 함께 성인용품 판매점을 구경하다가 사토시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모호한 친구 사이가 된다. 센터를 찾은 사요리(시온 마치다)에게 첫눈에 반한 사토시는 스토킹을 결심하고, 아이바에게 사요리의 사생활을 캐줄 것을 부탁한다. <스토킹 그리고 섹스>는 세 주인공이 형성하는 기괴한 삼각관계를 통해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을 그린다. 감독은 훔쳐보기를 통해 뒤틀린 갈증을 채우는 인물들의 모습에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 유의 주제의식을 불어넣으려는 듯 종종 허물어진 폐차장 풍경, 어깨를 늘어뜨린 채 홀로 걸어가는 소녀 등 황량한 이미지를 삽입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맥락없이 난무하는 나체의 전시 속에서 어색한 겉치례로 느껴질 뿐이다. 억지스러운 상황극과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 무엇보다 곳곳에서 황망하게 출몰하는 낯 뜨거운 장면들은 관음에 대해 이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 <스토킹 그리고 섹스>
-
남편이 죽었다. 긴 세월 무난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건만, 남편의 장례식 날 걸려온 낯선 여자의 전화에 모범주부 도시코(후부키 준)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상하리만큼 서럽게 오열하던 그녀는 불길한 예감대로 남편의 애인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모르던 남편의 비밀은 비단 애인의 존재뿐만이 아니었는데…. 다 키운 줄 알았던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한줌의 도움도 못 주고 각자의 사정만 칭얼칭얼 늘어놓는다. 심란한 마음에 도심의 캡슐호텔에서 외박을 감행한 도시코는 그곳의 수상쩍은 인간 군상에게서 세상을 배운다. 건망증과 고집센 성격으로 늘 티격태격하는 여고 동창들이 그녀의 동지로 옆에 서준다.
<다마모에>는 자기를 위해선 작은 물건 한번 사본 적 없는 한 여성의 변신 이야기다. ‘중년 여성의 자아 찾기’라는 쉬운 표현로 요약해버리기엔 그 결이 풍성하다. 남을 돌보고 배려하지 않으면 제 성에 안 차 괴로워하는 주부의 내면과 그녀가 부딪히는 뻔뻔한 세상이 흥미진진하고 구체적으로
중년 영화의 매력, <다마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