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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져: 죽은자들의 경고>는 홍콩의 형제 감독 대니 팡과 옥사이드 팡(<디 아이> <디 아이2>)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샘 레이미(<스파이더 맨> 시리즈) 감독이 <주온>의 시미즈 다카시 감독과 만든 <그루지>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작한 호러영화로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링> <그루지>를 잇는 아시아 출신 할리우드 호러영화로 개봉 첫주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지만, 그 다음주 바로 10위로 밀려나며 잊혀진 영화이기도 하다.
팡 브러더스는 낯익은 공포영화의 코드를 충실히 활용한다. 이야기의 무대는 참극의 비밀을 간직한 미국 외딴 벌판의 농가, 주인공은 도시에서 밀려나 시골에서 새 출발을 하려는 일가족이다. 새 보금자리에서 아이들은 알 수 없는 공포에 계속 노출되고, 어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아 출신의 10대 여주인공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부모 때문에 고립감을 느끼고, 어
장면 장면의 공포감 등골이 서늘 <메신저: 죽은 자들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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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을 사랑하는 소심한 괴물 슈렉(마이크 마이어스)이 헤어나오기 힘든 늪 속으로 자꾸 빠져든다. 1편에서 차지한 공주의 사랑과 2편에서 공주의 가족에게 인정받은 사랑이 거꾸로 그의 발목을 수렁으로 인도한다. 개구리 왕이 돼버린 피오나 공주의 아버지는 슈렉에게 왕위를 물려받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짝퉁 할리우드인 ‘겁나먼 왕국’을 다스린다는 건 자유로운 패러디의 영혼 슈렉에게 끔찍한 고문이다. 화려한 옷치장부터가 고통이며 거대한 소동의 원인이 된다. 슈렉에게 다행스러운 건 피오나의 먼 친척 아티(저스틴 팀버레이크)를 찾아 대신 왕위를 물려주면 된다는 것이다. 슈렉의 인기를 능가할 지경에 이른 동키(에디 머피)와 장화 신은 고양이(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함께 아티를 데려오는 모험이 시작된다.
또 하나의 수렁은 피오나(카메론 디아즈)가 베이비 슈렉을 낳을 예정이라는 점이다. 통제 불가능한 아기를 다스린다는 것 역시 슈렉에겐 악몽이다. 아티 같은 타협책이 있을 리 없으니 계속 악몽에 시달리거
슈렉의 훈계극 <슈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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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병을 앓다 목숨까지 잃은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머물 때다. 혼례를 위해 준비했던 아름다운 치마를 관 위에 손수 덮어주는 데 예서 멈추지 않는다. 황진이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더이상 고고한 양반집 규수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생생한 육성으로 고한다. 그런데 기생 명월으로 재탄생하겠다는 이 선언의 타이밍 후보는 좀더 있었다. 가령, 파혼당한 뒤 출생의 비밀과 성인군자로 위장하는 데 성공했던 ‘색마’ 아버지의 정체를 동시에 알고 분노에 차서 아버지의 족자를 집어던질 때라든지, 기생이 되기로 작정한 뒤 신분이 달랐던 놈(유지태)과 처음으로 몸의 정분을 나눌 때는 어땠을까.
배치가 바뀌었다면 환골탈태의 선언적 의미도 좀더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와 관련한 신이었다면, 권세있는 수컷의 위선을 작파해보겠다는 쪽으로 기울어 읽힐 것이고, 놈과 관련한 신이었다면, 계급의 위계를 나름대로 무너뜨리고 살겠다는 독한 작정으로 보일 것이다. 상사병 상여장면에 문뜩 끼어든 황진이의 선언에는 이런
생략과 과잉이 충돌하는 불균질의 드라마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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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 속 홍콩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아틀란티스나 희망봉처럼 특정한 정서의 기호다. 사연없고 치떨리는 기억 하나 없는 도시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1997년 중국 반환과 21세기 들어 홍콩을 엄습한 전염병은, 홍콩을, 뿌리 뽑힌 자의 만성적 고독과 사춘기적 불안을 도맡아 상징하게 만들었다. 유위강, 맥조휘 감독은 그 이미지에 아예 ‘무간지옥’, ‘상처받은 도시’라는 이름을 붙여 영화 제목으로 앞세웠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의 영어 제목은 ‘고통의 고백’(Confession of Pain)이다. 고통받는 자들은 이번에도 두 남자다. 양조위와 금성무는 1995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나진 않고 따로따로 방황했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에서도 둘의 성격은 <중경삼림>의 캐릭터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12년 전 연인을 떠나보내고 한밤중 스낵 코너에 말없이 들러 요기를 하던 양조
고통받는 두 남자 <상성: 상처받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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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여행 중이다. 갑자기 사라졌던 연인 E를 찾으러 델리에서 히말라야를 거쳐 라다크로 향하고 있다. 그녀는 K에게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가장 잔인했던 나를 용서하지 않길 바란다”는 엽서만을 보내왔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왜 떠난 것일까를 묻기 전에 K는 3년 전 그녀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들고서 머나먼 천상고원을 찾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천상고원>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욕망> <달려라 장미> 등을 만든 김응수 감독의 4번째 장편영화. ‘누군가를’ 만나서 ‘무엇인가’ 벌이는 흔한 로드무비를 기대했다가는, 히말라야 산맥의 광활한 풍광을 맘껏 즐기려고 맘먹었다가는, 금세 고산병에 시달리는 K처럼 말을 잃고 눈이 감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뒤섞은 <천상고원>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심리적 로드무비가 적당할 것이다. 라다크로 가는 도중 K는 김태훈이라는 한 남자를
전염성 강한 로드무비 <천상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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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물이며, 왜 눈인가. 저주받은 물을 소재로 고독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하는 영화 <데스워터>는 임팩트가 없다.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기자가 음침한 공간을 따라가지만 영화는 100분이 넘는 상영시간을 단 한번의 놀램도 없이 지루하게 끌고 간다. 물론 일본 공포영화의 리듬이 한국처럼 가파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데스워터>는 <주온>의 스산한 공포를 전해주지 못한다.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감독이 소재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 저주받은 물을 마신 사람에게 환각 증상이 나타난다는 점은 질병의 증상으로 이해한다 해도, 물에 대한 공포가 눈에 비치는 세상에 대한 공포로 변주되는 과정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특히 <데스워터>는 천천히 분위기를 조성한 뒤 공포적 요소를 등장시키는데, 그 타이밍이 꼭 한 박자씩 느리다. 그리고 그 장치가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사건을 따라가는 기자의 발걸음은
한 박자씩 느린 공포 <데스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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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960년대는 뜨겁기만 한 시대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스코트 매킨지), 사랑할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찾아 헤매는(제퍼슨 에어플레인)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클럽 ‘맥스 캔자스 시티’의 어두운 무대에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냉소적이고 전위적인 록음악 연주에 몰두했다.
반전과 평화를 목놓아 외치는 뜨거운 세계의 다른 한편에 차가운 아방가르드의 지하세계가 있었다. 실험적인 연극에서 미니멀리즘적인 팝아트까지, 60년대 뉴욕 맨해튼의 예술계는 언더그라운드의 천국이었다. 그리고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정점은 앤디 워홀이었다. ‘팩토리 걸’은 스스로 ‘공장’이라고 불렀던 자신의 창작 스튜디오 안에서 현대 예술의 혁명을 제조했던 앤디 워홀의 여자, 에디 세즈윅에 관한 영화다.
1965년,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은 파티에 들렀다가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
예술가 그룹의 내부 엿보기 <팩토리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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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터너(올랜도 블룸)와 엘리자베스 스완(키라 나이틀리), 바르보사 선장(제프리 러시)이 싱가포르의 해적 사오펭(주윤발)을 찾아간다. 이유는 바다괴물 크라켄한테 잡아먹힌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구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이들은 잭 스패로우가 있어야만 해적연맹의 아홉 영주를 모아 연합함대를 구성할 수 있고, 해적 소탕에 쌍심지를 켠 동인도회사에 맞설 수 있다. 동인도회사의 커틀러 베켓 경(톰 홀랜더)은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과 그 선장 데비 존스(빌 나이)를 수하에 거느리게 된 터. 이 힘이 막강해서, 해적 연합함대는 다시 바다의 여신 칼립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는 끝없는 바다의 크기를 체험하려는 듯 전편들보다 더 멀리 노를 저어 아시아로 나아간다. 주윤발이 고약한 심보를 가진 해적으로 출연한다는 건 오래전에 노출된 사실. 전편들의 스펙터클에 밀리지만 않는다면 이번 3편의 재미도 어느 정도는 보장돼 있다. 축축하고 원시적
선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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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TV의 인기 공포 시리즈였던 <전설의 고향>에는 소복귀신이 마스코트처럼 등장하곤 했다. 하얀 옷의 긴 머리 여인이 입가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며 눈으론 독기를 내뿜었다. 여인의 한풀이성 저주는 인과응보 혹은 사필귀정의 드라마와 더불어 스르르 마무리되곤 했다. 극장판 <전설의 고향>은 핏줄기 대신 사다코처럼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한마디 말도 없이 차갑게 응징만 가하는 버전으로 변형됐다.
어린 쌍둥이 자매가 물에 빠져 언니 소연(박신혜)만 살아 나온 지 10년, 잔혹한 죽음의 행렬이 시작된다. 쌍둥이 자매에게 행했던 무언가를 감추어온 (듯한) 이들은 마치 응징처럼 죽임을 당하고, 10년 만에 의식을 차린 소연은 뒤죽박죽된 기억 속에 혹시 자신이 인간의 얼굴을 한 귀신은 아닌지 불길한 흔적들을 뚝뚝 흘리고 다닌다. 소연의 흔들리는 정체가 긴장 유지 장치의 일종인지 순수한 공포를 은밀히 감싸는 연막장치인지는, 대부분의 호러물이 그렇듯,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려야
사다코로 변한 소복귀신 <전설의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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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항상 집착으로 변해가는 걸까. 와타나베 마모루 감독의 2004년작 <도쿄 욕망>은 첫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소녀의 아픈 성장기다. 12년 전 엄마를 잃고 아빠와 단둘이 살아가는 여고생 유카(오다기리 리사)가 그 주인공. 유카는 9살 무렵 사촌인 리에코(사토미 요코)가 결혼할 상대라며 데려온 남자 이노우에(시모모토 시로)에게 한눈에 반한다. 좋아하지만, 고백할 수 없는 상황. 16살까지 혼자 속앓이를 해오던 유카는 리에코 부부가 같은 동네로 이사오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도 점점 커져 이노우에를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연출을 맡은 와타나베 마모루 감독은 일본 AV 영화계의 대표적인 중견감독이다. 1965년 데뷔작을 만든 이래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이 200편이 넘는다. 주로 감수성이 강한 에로틱 드라마를 만들어온 와타나베 감독은 <도쿄 욕망>에서도 10대의 첫사랑과 속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10대의 첫사랑과 속마음 <도쿄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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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삶에서, 건강한 욕망을 찬양하고 웃음으로 거짓 정치를 비웃는 체코의 거장 이리 멘젤 걸작 3부작의 완결편. <가까이서 본 기차>와 <줄 위의 종달새>가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했고, 1991년작 <거지의 오페라>가 마지막으로 관객을 찾는다. 앞선 두 작품이 체코의 대표적인 현대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면 <거지의 오페라>는 극작가이자 벨벳혁명을 주도한 끝에 체제 붕괴 뒤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이후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까지 역임했던 바츨라프 하벨의 희곡을 스크린에 옮긴 결과물이다. 거지들의 왕국을 지배하는 대도(大盜)와 그가 결탁한 권력자와 정부(情婦)들의 이야기 <거지의 오페라>는 18세기 초 런던에서 초연된 동명의 대중 오페라가 기원이며, 브레히트가 <서푼짜리 오페라>로 각색한 풍자극의 고전이기도 하다.
값비싼 보석부터 값을 매길 수 없는 여인의 마음까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매키
이리 멘젤 3부작의 완결편 <거지의 오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