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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이 죽었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희미한 권력의 향내는 어김없이 나게 마련이어서 비탈길 비포장도로를 자전거 타고 가다 미끄러져 죽은 전임 이장 대신 새 이장을 누구로 할 것인지로 마을은 잠시 술렁인다. 그러다가 아무 생각없던 조춘삼(차승원)이 이장이 된다. 유망한 후보자들 그러니까 나이 지긋한 40, 50대 형님들 몇몇이서 머리를 맞대고 자기들 중 한명이 이장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숙덕거리던 그때 옆에 있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이번에는 좀 젊은 놈을 뽑아”라고 불호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그럴 만한 젊은 놈은 서른일곱 조춘삼뿐이다.
이장 노릇 중 하나가 선거철 벽보 붙이기다. 선거에 출마한 군수 후보들의 포스터를 붙이다가 조춘삼은 거기서 낯익은 얼굴 하나를 본다. 노대규(유해진).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동창생, 이라기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못할 것 같은 녀석. 이 녀석은 초등학교 내내 반장이던 내 밑에서 부반장이나 하던 놈이 아닌
농촌 훈남들의 우정에 관한 영화 <이장과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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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특히 문학은 더이상 읽지 않는다는 한국에서도 파올로 코엘류의 소설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그의 작품은 기독교에 입각한 종교적 성찰을 현대인의 삶에 쏙쏙 대입할 수 있는 경구 같은 문체로 매력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그림과 함께 한 구절쯤 인용해 블로그에 올리기 좋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삶에 지친 영혼에 신경안정제 역할을 해주는 그의 98년작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가 일본 감독 호리에 게이에 의해 영화화됐다. 영화는 원작이 있던 곳으로부터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전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인 ‘자살’이라는 소재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적 배경인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국적을 탈색시킨 정신병동 덕에 둘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원작에서 스물네살이었던 베로니카는 영화에서 스물여덟의 토와(마키 요코)가 된다.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으니까’라는 이유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정신병동에서 깨
삶을 달래주는 달콤한 위안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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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스릴러도 좋지만 내공보다 욕심이 앞서면 곤란하다. <푸코의 진자> 중엔 디오탈레비와 아르덴티 대령이 수의 신비를 논하며 성당기사단에 관해 추론하는 장면이 있다. 성당기사단원 수인 36을 분해하고 더하고 곱하며 역사를 관장하는 신의 조화를 짜맞춰내는 이 대목에서 이들은 순수한 지적 쾌감을 넘어서는 신성한 황홀경에 빠진다. <푸코의 진자>의 기지는 기기묘묘한 숫자놀음을 절묘한 지적 감동으로 받아들일지 썰렁한 궤변으로 넘길지를 독자의 몫으로 남기지만, 짐 캐리의 심각한 스릴러 <넘버 23>은 줄곧 “이거 봐, 정말 교묘하지?”라는 믿음을 강요하다 썰렁하게 끝난다.
월터 스패로우(짐 캐리)의 평온한 일상은 부인 아가사(버지니아 매드슨)가 사온 한권의 책으로 무너진다. 저자도 출판사도 불확실한 극중 소설 <넘버 23>은 “숫자 23의 법칙이 만물에 들어 있다”는 기묘한 망상 이야기다. 월터는 주인공 핑거링에 대한 묘사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
수 논리의 융단폭격 <넘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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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빼꼼’은 EBS와 투니버스에서 방영된 TV시리즈 <빼꼼>으로 이미 스타덤에 오른 ‘코믹 배우’다. 2~3분 내외의 단편인 <빼꼼> 시리즈에서 주연한 이 백곰 캐릭터는 쇼핑몰 회전문에 끼거나 러닝머신 위에 올라 허둥대며 웃음을 자아낸다. 논버벌 애니메이션(non-verbal animation)이라 대사는 “웅? 웅? 우어어~”가 전부. 100% 국내 기술의 3D그래픽으로 창조된 백곰의 실수연발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빼꼼> 시리즈는 2002년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주목받은 단편 <아이 러브 피크닉>을 TV시리즈화한 작품으로, 이미 영국 <BBC>, 미국 카툰네트워크, 프랑스 M6 등 20개국에 수출 계약을 체결한 ‘성공한’ 상품이기도 하다.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임아론 감독의 R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TV 시리즈 공개 이전인 2002년부터 준비해온 장편 프로젝트다.
우연히 마법의 펜던트
착한 애니메이션 <빼꼼의 머그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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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애니스톤이 브래드 피트와 갈라서지 않았더라도 이 결별 스토리에 캐스팅됐을까, 제니퍼 애니스톤이 빈스 본과 달아오르지 않았다면 이 엇박자 애정극이 그렇게 화제가 됐을까, 하는 1차원적 눈초리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개인 누구에게나 사랑의 발견은 100만볼트짜리 아드레날린 주사이며, 이별의 확인은 전 우주의 죽음을 알리는 선고다. 무수히 변주를 반복하는 사건의 디테일이 문제일 뿐이다.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는 짜릿한 연애 발생사를 최대한 간략하게 처리한 채 애정의 데드맨 워킹을 길게 주시하는 남녀상통지사다. 물론 사도마조히즘 로맨스는 아니다. 바람나거나, 불치병에 걸리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별예방 참고서로 삼을 만한 드라마다.
게리(빈스 본)는 시카고 거리를 누비는 관광 가이드답게 지칠 줄 모르는 유쾌한 입담과 에너지의 소유자다. 브룩(제니퍼 애니스톤)이 게리의 당찬 작업 스타일에 반한 배경에는 청담동 스타일의 갤러리에서 성질죽이고 봉급쟁이 큐레이터
이별예방 참고서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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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태수는 마약조직의 보스 구양원(문성근)의 돈을 강탈해 용케 도망친다. 태수를 쫓던 조직은 그 대신 일란성 쌍둥이 동생 태진을 붙들어간다. 그렇게 동생과 헤어진 태수(지진희)는 19년이 흐른 뒤에야 태진의 행방을 알게 돼 만날 약속을 정한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동생을 기다리던 태수는 누군가가 쏜 총에 의해 태진의 머리가 관통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어릴 적부터 싸움을 잘했고 성인이 된 뒤에도 ‘수’라는 이름의 특급 해결사로 활약해온 태수는 태진의 신분으로 위장한 채 철저한 복수를 노린다.
신영우의 만화 <더블 캐스팅>을 바탕으로 한 최양일 감독의 영화 <수>는 쌍둥이 동생 행세를 하는 태수가 태진의 죽음 뒤에 가려진 비밀을 파헤치고 응징하는 과정을 담는다. 태수는 태진이 다니던 경찰서 강력팀에 들어가게 되고, 동료 형사인 미나(강성연)가 태진의 애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태수는 또한 ‘수’를 뒤쫓고 있는 강력팀 형사(이기영)의
복수심 그 자체의 잔인성과 무한성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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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갖지 못한 자의 집착, 그리고 살인.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코로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한 남자의 굴곡 많은 일대기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프랑스의 한 시장 골목. 장 바티스트(벤 위쇼)는 생선이 토막째 잘려나가듯 탯줄이 잘려 버려진다. 하지만 지독한 생선 냄새는 바티스트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하고, 바티스트는 ‘진드기’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의 출생을 알린다. 아기를 버리다 걸린 여인은 시장 사람들에 의해 사형대로 보내지고, 죽음을 맞는다.
향이 결핍된 남자의 발달된 후각, 어머니의 죽음을 뒤로한 채 이어간 목숨. <향수…>의 주인공 바티스트의 삶은 결핍에서 시작한다. 식성이 좋고 인간의 향이 없다며 구박받던 고아원 생활에서도 그가 세상 모든 물건의 향을 맡으며 소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꽃에서 나는 향, 죽은 쥐에서 나는 향, 나뭇조각과 돌맹이에서 나
소설 내용에 충실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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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PD인 석호(최원영)는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아는 동생인 채영(김푸른)에게 전화를 건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며 운을 뗀 뒤, 이내 사귀고 싶다는 본색을 드러낸 석호는 다음날 채영을 만나 합의에 성공한다. 물론 석호의 진짜 본색은 채영과의 섹스다.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해보지만 채영은 그저 “나중에”, “다음에”를 반복하거나 “내가 그렇게 쉽게 보여?”라며 화를 낼 뿐이다. 영화는 다시 석호의 통화장면으로 돌아가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채영은 사실 또 다른 남자친구 선수(이정우)와 이미 모텔을 드나드는 사이. 채영은 선수에게 석호가 ‘그냥 아는 오빠’라고 말하지만, 선수 또한 ‘그냥 아는 누나’들이 많은 이름 그대로의 선수다. 어느 날 클럽에서 만난 연상녀 지연(고다미)과 하룻밤을 보낸 선수는 채영과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에도 지연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는다.
애인 있는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남자는 아버지도 아니고, 군대고참도 아니고 그녀의 ‘그냥 아는 오빠’다.
섹스로 연결된 다각형의 남녀관계 <내 여자의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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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엿보기와 엿듣기를 다루는 영화는, 예상치 못한 심리적 유대의 이야기로 전개되곤 한다. 역전된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납치범에 동화되는 현상)과 비슷한 증상이, 엿듣고 훔쳐보는 쪽에 나타나는 것이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건너편 집 여자를 엿보는 남자 토멕은, 보는 것을 아는 것과 동일시했고, 다시 그것을 사랑과 혼동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에 나오는 고독한 도청 전문가 해리는, 그런 함정을 알았기에 자신이 엿듣는 내용에 무관심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통일 5년 전 1984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에서 도청은, 공무다. 1980년대 중반 동독에서는 9만명이 넘는 비밀경찰(슈타지)과 약 17만명의 정보원이 활동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밀고로 유지되는 세계에서는 더 끈덕지게 의심하는 자가 유능한 멤버다. 주인공 게르트 비즐러(울리히 뮈헤)는
기이한 우정의 연대기 <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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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연인은 오직 서로 다른 품성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받는다. 존 큐런 감독의 <페인티드 베일>은 상대방이 갖지 못한 것들에 얽매여 스스로 마음의 감옥에 갇힌 연인의 사연을 따라간다. 1925년 영국, 사교 모임과 카드 게임을 즐기는 쾌활한 미인 키티(나오미 왓츠)는 영국 정부에 소속된 세균학자인 남편 월터(에드워드 노튼)를 따라 상하이로 건너온다. 월터의 사랑은 깊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 키티에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한다. 열정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키티는 그곳에서 매력적인 외교관 찰리 타운센드(리브 슈라이버)와 사랑에 빠진다. 언젠가는 아내가 자신을 돌아봐주리라는 소망이 배신당하자 월터는 그녀의 불륜을 벌하기 위해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 오지로 발령을 자원한다. 후덥지근한 중국 남서부의 낙후된 마을 메이탄푸에서 키티는 남편의 철저한 무시 속에 유배나 다름없는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다. 영국에 대한 중국의 악감정과 콜레라의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두 사
한편의 낭만시 <페인티드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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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해밀턴 지역의 가톨릭계 사립학교에 다니는 소년 랄프(애덤 버처)는 말썽쟁이 소년의 표본이다. 14살인 그는 이미 애연가이고, 일주일에 211번이나 신의 이름을 욕되게 부르는 죄인이고, 22번의 야한 생각을 하는 욕정어린 화신이며, 22번이라는 엄청난 횟수를 자랑하는 자위의 왕이다. 백주대낮 수영장에서도 그의 어린 욕정은 우스운 꼴로 발산된다. 엄숙한 학교 분위기에서 그런 행동은 지탄의 대상이자 체벌감이다. 교장 신부는 욕정을 다스리라며 강제로 크로스컨트리를 배우도록 명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랄프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니체라는 사람의 문장에 감동할 줄 아는 남다른 감성을 가졌고, 이 세상에서 기적이 이뤄진다는 섭리를 굳게 믿는 보기 드문 신념의 소유자다. 아빠는 죽고,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살고 있는 랄프. 그가 기적을 바라는 건 병으로 누워 있던 엄마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엄마가 병에서 낫는 건 기적이 일어나야만 가능하다고 했고, 그
기적을 좇는 소년의 의지 <리틀 러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