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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 어머니 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감독의 어머니는 6남매를 출가시킨 뒤 자신의 삶을 찾아 독립했다. 감독 역시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되어, 한명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딸로서 장한 어머니가 뒤늦게 여자가 되어가는 일상의 순간들을 담아낸다. 폭음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낯선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엄마를 바라보며 감독과 자식들은 상처받은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분장처럼 새하얀 화장을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서는 밝은 표정의 엄마를 한명의 여자로 받아들이기에 자식들은 그런 엄마가 민망하고 안쓰럽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어린 시절의 상처, 엄마의 상처가 고름이 되어 감독의 시선을 흐릴 무렵, 그녀들은 셋째언니의 터전, 러시아로 여행을 떠난다. 낯선 땅에서 과거와의 화해를 거부하던 언니 역시 딸들의 엄마가 되어 있다. 어색한 모녀들의 만남과 아픔의 눈물 뒤에 언니는 엄마가 되어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고, 감독은 언니를 통해 엄마의 이야기를 끌어안는다. 각자의 마음을 떠돌던 고통이 한자리에 모
세월을 함께한 여인들의 상처 어린 소통,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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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을 떨어져 살고 있는 늙은 자매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영상으로 전한다. 감독은 한국에 사는 할머니와 미국으로 이민 간 이모할머니에게 카메라를 대며 그녀들 사이에서 긴밀한 소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흔 가까이의 나이, 두 노인에게 남은 건 남편의 무덤과 출가한 자식들, 그리고 때때로 떠올리는 자매와의 그리운 추억뿐이다. 카메라는 서로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비추고 한옥과 LA의 풍경을 번갈아 담아내며 한국과 미국의 그 먼 거리, 두 할머니의 긴 이별을 조금씩 좁히고 있다. 서로의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두 노인의 통화장면은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을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한다. 감독은 그 쓸쓸함을, 그녀들의 오래된 이야기를 담담하게 오가며 서로에게 전달할 반가운 영상편지를 완성한다. 그것은 감독이 할머니들에게 선사하는 생의 마지막 봄날일지 모른다. 보고 또 보아도 닳지 않는 봄날의 편지. 사진 속 나란히 서 있는 어린 두 자매의 파릇한 얼굴이 이 따사로운 영상편지 속에서
늙은 자매의 긴밀한 소통,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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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앞둔 세계적 지휘자 피에르 모항주(자크 페렝)에게 어머니의 부음이 전해진다. 침착하게 공연을 마친 뒤 귀국해 장례를 치른 그를 옛 친구가 방문한다. 친구가 내민 기숙학교 시절의 사진과 한권의 낡은 일기는 거장에게 음악의 영감을 처음 가르쳐준 스승의 기억을 불러낸다. <시네마천국>에서 영화감독 살바토레로 분했던 자크 페렝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번에는 음악가가 되어 똑같은 회상에 잠기는 그의 모습에 미소지을 것이다.
프랑스 국민 20%를 관객으로 동원한 흥행 여세를 몰아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 프랑스 후보작으로 출품된 <코러스>는, 몇 소절만 귀기울이면 아름다운 멜로디를 미리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 같다. 진실한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놓는 참다운 교사가 이 익숙한 노래의 주인공. 때는 1949년. 음악가로서 경력의 막장에 다다른 클레망 마티유(제라르 쥐노)는 전후 폐허에서 버림받고 비뚤어진 소년들을 모아놓은 초라한 기숙
불우한 아이들과 다정한 교사가 엮어가는, <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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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사카 마리는 진동을 예민한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다. “이것은 그의 몸이다. 나는 심장과 살갗으로 진동을 느낀다.” “측면에 붙은 스위치를 누르자 얇은 막이 진동을 하는 것 같다. 그 떨림이 나의 사고를 잘게 부수었다.” 자신의 소설 <바이브레이터> <뮤즈>에 이런 문장들을 적어넣은 아카사카 마리는 왠지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어서 이렇게 민감해진 거라는 인상을 주곤 한다. 핑크영화로 출발한 중견감독 히로키 류이치는 이처럼 여성의 육체를 가져야만 공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녀의 소설을 조심스럽고 세심한 터치로 감싸안아 스크린 위에 가져다놓았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둘러싸인 젊은 여자가 자신보다 어린 남자와 여행을 하고, 영원하지 않을지라도 고요한 침묵을 찾게 되는 여정. <바이브레이터>는 제목이 주는 선정적인 느낌과는 다르게 묻어버렸으나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상처를 깊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영화다.
르포라이터 하야카와 레이(데라지마 시노부
고요한 침묵을 찾게 되는 여정, <바이브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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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킬러 지미 튤립(브루스 윌리스)은 치과의사 오즈(매튜 페리)와 함께 갱단보스 야니 고골락을 살해하고 조직의 돈을 훔쳐 달아났다. 4년 뒤, 야니의 아버지 라즐로(케빈 폴락)가 복수를 다짐하면서 감옥에서 나온다. 라즐로는 지미를 찾아내기 위해 지미의 전처이자 오즈의 아내인 신시아를 유괴하고, 지미에게 도움을 청하러 떠난 오즈의 뒤를 쫓아간다. 지미는 그 사이 킬러 지망생인 아내 질에게 잔소리나 퍼붓고 가사에만 몰두하는 별볼일 없는 남자가 되어 있다. “너 살자고 나 죽을 수 없다”면서 매몰차게 외면하는 지미. 그는 은신처를 습격해온 라즐로 일당을 피해 하는 수 없이 질과 오즈와 달아나지만, 뭔가 생각해둔 계획이 있는 듯하다.
<나인 야드2>는 4년 만에 제작된 <나인 야드>의 속편이다. 그사이 아기자기한 굴곡과 반전을 잊었다고 해도 음각과 양각처럼 서로를 채워주던 두명의 남자는 잊지 못했을 것이다. 지미와 오즈 혹은 브루스 윌리스와 매튜 페리. 스포츠
2억 8천만 불을 둘러싼 유쾌한 대박 전쟁, <나인 야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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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잃은 눈동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 그리고 죽음처럼 고요한 표정. 영화 전체의 공기가 안개처럼 탁하고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건 모두 이 어린 딸, 다코타 패닝의 연기 덕분이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서늘함을 뿜어내는 이 어린 소녀의 연기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소름끼친다. 그러나 소녀의 표정에서 슬픈 두려움을 끌어내기에 영화가 내세우는 공포의 미학은 다소 낡고 전형적이다. 갑작스런 엄마의 자살로 실의에 빠진 딸을 위해 데이비드(로버트 드 니로)는 도시 외곽으로 이사를 한다. 새로운 공간에 점차 적응해가던 딸 에밀리(다코타 패닝)는 어느 날부터인가 상상 속의 친구 찰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에밀리가 찰리의 존재에 확신을 가질수록 집안 곳곳에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데이비드 역시 찰리가 단순한 허구의 인물이 아닐 수도 있음에 의심을 품고 그로부터 어린 딸을 구해내기 위해 비밀을 밝혀나간다.
영화가 노리는 지점은 나이트 샤말란의 등장 이후 모든 공포영화의 강박
보이지 않는 존재와 벌이는 죽음의 게임,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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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었다. 1923년 오사카로 건너가는 배에 몸을 실은 앳된 청년 김준평. 풍요와 희망의 새 세상을 꿈꾸는 해맑은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나면, 십수년 뒤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광포해진 그(기타노 다케시)가 ‘집으로’ 귀환하던 그 밤으로 이어진다. 강간으로 아내 삼은 여인(스즈키 교카)을 저버리고, 친지의 피와 땀을 쥐어짜 돈을 모으고, 가족과 이웃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굴복시킨 사람. <피와 뼈>는 “아버지는 내 인생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고 단언하는 아들 마사오(아라이 히로후미)의 시선으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지만,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 남자가 사는 법’을 소개한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개달리다>에서 재일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냈던 최양일 감독이 6년을 투자해 양석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피와 뼈>는 재일동포 1세대의 파란만장한 일본 정착에 관한 이야기지만
처절하고 잔혹한 괴물의 초상, <피와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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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가 ‘백인의 육체’ 컨트리에 ‘흑인의 영혼’ R&B를 불어넣는 순간 록은 탄생한다. 레이 찰스가 신을 향해 부르던 가스펠에 첫사랑 델라(케리 워싱턴)를 향한 열정으로 써내려간 <I’ve got a woman>이 발표되면서 솔은 대중음악이라는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레이>는 레이의 생애를 순회공연처럼 떠도는 로드무비다. 영화가 시작되면 흙먼지가 날리는 고향의 정류장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컨트리, 가스펠, 솔, 재즈, 리듬&블루스를 자유자재로 가로지르고 탐험하는 레이 찰스의 음악적 여정도 그러하다. 레이는 언제나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난다. 그의 몸도 마음도 길 위를 거닌다.
대공황 시대 미국 남부 올바니에서 태어난 레이 찰스 로빈슨(제이미 폭스)은 동생 조지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으로 7살에 시력을 잃는다. 소작농이던 어머니 아레사(샤론 워런)는 충격적인 사고와 겹치는 불운에도
어느 에고이스트의 치열한 예술가적 자화상,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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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팬은 해마다 웬디를 찾아오겠다던 약속을 잊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푸우를 잊었다. 메리 포핀스가 돌보던 뱅크스가의 아기들은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다. 동화들은 그런 식으로 넌지시 우리에게 경고했다. 너희는 중요한 것을 기어코 잃어버릴 거라고, 위안이 있다면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깡그리 망각한다는 점뿐이라고, 어른의 쓸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순정한 아름다움에는 ‘흑막’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 것은. 판타지는 언제나 어둡고 두려운 무엇인가의 대극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타는 목마름이 길어올린 샘물이고, 갈 데까지 간 불면이 붙든 최면술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피터 팬>(1904년 초연)의 사연을 캔다. 영원한 유년을 구가하는 판타지가 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1860∼1937)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2년의 시간을 추적하고 상상한다. 따라서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J. M. 배리의 전기영화라기
세상 모든 동화들의 아름다운 시작, <네버랜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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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독일)는 생기 잃은 창백한 얼굴이 됐지만 그 얼굴의 절반마저 마비돼버렸다. 이러지 말라며 욕실 문을 두드리는 어린 딸을 두고 가스를 들이켜며 자살을 기도할 만큼 생의 의지를 잃었다. 어머니(=독일)를 이렇게 만든 건 나치(=전쟁)이며 남편(=남자, 아버지)이다. 이처럼 <독일, 창백한 어머니>가 나치와 남자를 고발하는 방식은 파스빈더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닮았으며, 어머니 곁에 있는 아이가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하며 창백해지는 모습은 폴커 슐뢴도르프의 <양철북>을 연상시킨다. 영화사적으로 정리하자면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전후 독일사회의 정체성을 회의적으로 짚었던 뉴저먼시네마의 맥락 위에 서 있는 셈이다.
비슷한 테마이지만 연출 기법은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브레히트적이다. 메시지는 훨씬 단단하고 선언적이며 이를 전달하는 스크린은 마치 연극무대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 소격효과를 노린다. 그게 너무 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어머니, <독일, 창백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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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머릿속엔 퇴행적 욕구가 잠복해 있다. 머리가 굵어지면 그 퇴행욕구를 세련되게 위장하고 퇴행을 미화한다. 술을 마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릴 적 구강기에 대한 강한 아쉬움 때문이다.
술병 주둥이는 어른 남자에게는 엄마의 젖꼭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같은 술이라도 와인은 다른 대접을 받는다. 와인엔 그런 퇴행 욕구를 덮을 만한 두터운 문화적 휘장이 있다. 오랜 역사, 다양한 품종은 섬세한 취향을 요구하고 이 취향은 어른스러운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이 취향을 위해선 많은 돈이 든다.
결혼을 앞둔 일주일 동안 와이너리(포도주를 만드는 농가)를 돌아다니며 마지막 자유를 누려보겠다는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과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러 나선 마일즈(폴 지아매티)의 여행 이야기는 사실 귀가 솔깃해질 내용은 아니다.
“우리 나이에 돈, 능력 없으면 도축장 끌려가는 소”라고 느끼는 중년 남자 둘이 길을 떠난다는 내용만 들으면 벌써 이런 감탄사가 절로 떠오른다. 꽤나 지루하
가볍고 상쾌, 살짝 여운까지 있는 와인 같은 영화, <사이드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