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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스타일의 소화불량,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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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의 재미, 5%의 교훈.”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신조답게, <사무라이 픽션>은 순수한 오락 영화다. 캐릭터들은 만화 같고, 영화의 리듬은 MTV와 일치하며, 영화음악은 록에서 댄스 비트까지 오간다. 히로유키 감독은 평소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사와 아키라를 흠모한다고 전해진다. 감독은 <사무라이 픽션>에서 일본의 전통 시대극 분위기를 흑백 영상으로 살리되, 철저하게 찰나적 재미를 추구한다. 주인공 헤이지로는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칼을 다룰 줄도 모른다. 엉뚱하게 돌팔매 연습만 죽어라 한다. 그리고 징징대는 목소리로 “꼭 없애버릴 테다”라고 뇌까린다. 황당함의 견지에서 한편의 만화다.
<사무라이 픽션>은 스타일이 살아 있는 영화다. 이야기 구조엔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도 웃고 즐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일본 시대극의 규칙은 무시되거나 아예 비틀린다. 잠복중이던 닌자는 천장에서 몸을 날린 뒤 바닥에 철퍼덕
한편의 ‘사무라이 코미디’, <사무라이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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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실종됐다. 이건 큰일인가. 사건 축에도 못 끼는가. 의외의 소득인가. 즐거움인가. <플란다스의 개>에선 그 모든 것이다. 강아지를 생의 마지막 위안으로 여기던 노파에겐 죽음이고, 그보단 덜 쓰라리다 해도 강아지를 동생처럼 돌보던 아이에겐 사랑의 상실이다. 반면 신경 예민한 시간강사에겐 소음 제거라는 목표의 달성이고, 개의 육질에 매혹된 경비원과 부랑자에겐 영양 보충의 귀한 계기다. 엉뚱하게도 경비실 여직원에겐 자아실현의 기회도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강아지 실종이라는 작은 사건을 아파트라는 소시민의 생활공간에 던져놓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기치 못할 소동에 빠져드는지를 관찰하는 짓궂은 농담이다.
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난 단편 <지리멸렬>에서처럼, 생활공간에서 일어난 일상적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비루한 욕구를 유머러스하게 극화하고 있다. 제목 때문에 <플란다스의 개>에서 따뜻한 동화의 위안
소시민들의 비루한 욕구, <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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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널리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앨런 루돌프는 미국 인디영화계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인물이다. 70년대 <내쉬빌> 등 로버트 알트먼 영화 4편의 조감독으로 입문, <메이드 인 헤븐> <위험한 상상> <미세스 파커> 등을 만든 루돌프는 9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애프터글로>를 통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브루스 윌리스의 챔피언>은 그가 <위험한 상상>에서 같이 작업했던 브루스 윌리스를 파트너 삼아 만든 신작. 앨런 루돌프의 시나리오를 본 브루스 윌리스가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고 닉 놀테, 바버라 허시, 알버트 피니 등 중량감 있는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영화의 원작인 커트 보니깃 주니어의 소설은 60년대 미국 반문화운동이 70년대 풍요와 성공을 추구하는 소비주의 문화에 흡수되는 과정을 풍자한 작품. 주인공 드웨인 후버는 그 전형이 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의 첨병인 자동차 판매업
60년대와 70년대의 극단적 대립, <브루스 윌리스의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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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덜룩한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끈적거리는 쾌감까지 포기할 순 없다. 스릴러를 즐기기 위한 기본자세는 스크린에 시선을 맡겨두고 꼬인 매듭을 풀기 위해 머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땀에 절어 있는 몸뚱이를 일으킬 때 느슨한 정신을 긴장케 하는 한기까지 파고든다면 아주 훌륭한 관람이 될 테지만, <이노센스>는 그 경지엔 이르지 못한 범상한 범죄스릴러다.
<이노센스>는 한 남자의 아내와 정부가 공범이 되어 남자를 죽인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실은 남자는 죽지 않고 살아나, 심장병을 앓던 아내가 쇼크사해버린다. 아내의 재산을 노린 릭과 정부 엘시의 음모였던 것이다. 전반부는 영화 <디아볼릭>의 설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내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릭과 엘시는 서로 틀어지고 결국 감옥과 재판정에 서게 된다. 신문기자 엘든의 증언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데, 엘든의 증언까지 계산해놓은 음모의 전모는 마지막에 가서
범상한 범죄스릴러, <이노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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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하얀 눈이 수북이 뒤덮인 산모퉁이를 비집고 달려오던 기차가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지른다. 한칸짜리 증기기관차가 힘에 부쳐보이듯, 검은 연기와 기적소리는 이내 흩날리는 눈 속에 스며들고 만다. 기차가 멈춰 선 곳은 홋카이도 지선의 종점인 폐광촌 호로마이역. 하얀 눈과 어울려 낡아 보이긴 하지만 철도원 제복의 맵시가 멋스러운 역장이 어김없이 기차를 맞는다. 호로마이역에 인생을 묻은 철도원 사토 오토마츠다.
오토마츠의 풍모는 촌스러운 시골 역장의 모습이 아니다. 일면 근엄해보이기도 하지만 지그시 보고 있으면 정도 많고 고운 인상이다. 모두들 대처로 떠났지만 호로마이역에 청춘을 묻고 정년퇴임을 맞이하면서도 철도원의 기풍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호감이 간다. 이처럼 자신을 곧추세워온 오토마츠의 인생을 보노라면 짐짓 가슴이 뭉클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멜로드라마의 배경에 깔리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눈감아 주긴 어렵다. 오토마츠에게서는, 전후의 폐허를 딛고 ‘오늘의
동화적인 발상과 환상적인 표현, <철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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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 정말 대단한 장관이다.” 이라크 첫 공습을 수행한 미군의 소감이 그랬다. 과연 걸프전을 낭만적인 불꽃놀이나 무해한 전자오락에 비길 수 있을까. 잠시 잠깐 해외 뉴스를 오르내리던 걸프전의 이미지와 정보 뒷편에 뭔가 다른 사연이 숨어있을 법도 하잖은가. 미 국방성의 여과장치로 거르지 않은 걸프전 원액에 듣도보도 못한 화학 처리를 한 영화 <쓰리 킹즈>의 시작은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다. <쓰리 킹즈>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전쟁 액션 영화로 지칭하긴 마뜩찮다. 아예 휴전 직후를 이야기의 기점으로 잡고 있고, 전쟁 영화 특유의 무게잡는 스타일이나 구태의연한 스토리텔링도 구사하지 않는다. 곳곳에 폭소를 터뜨리게 할 지뢰가 묻혀 있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웃게나 만드는, 생각없는 코미디도 아니다. 날선 풍자와 비난이 따끔거리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족의 금괴가 숨겨진 후세인의 비밀 벙커를 습격하자는 계획을 세우며 결성된 ‘쓰
흥미진진한 액션 모험 영화, <쓰리 킹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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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의 갑판에서 살얼음 낀 검은 바다로 떨어진 지 3년. 나른한 태양 빛에 온종일 희롱당하는 아름다운 해변을 지닌 남국에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도착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인생을 선택하라”던 <트레인스포팅>의 이완 맥그리거와 비슷한 목소리로 뇌까린다. “내 이름은 리처드. 그것 말고 나에 대해 뭘 더 알 필요가 있나. 부모가 누군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런 건 다 부질없다.” 모름지기 영화의 쿨한 서두를 위해 이 정도 불친절은 감수할 수 있는 법. 영화의 전개와 함께 주인공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마약에 중독된 스코틀랜드 실업자 렌튼과 달리, 동남아 관광지의 미국인 배낭족이 삶의 진면목과 엑스터시를 맛보려면 약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속물’ 관광객을 벌레보듯 경멸하며 그들과 다르기 위해 애쓰는 리처드는 낯선 도전을 두려워 말자고 다짐하며 충동에 몸을 싣는다.
소품 <에일리언 트라이앵글>을 제외하면, 대니 보일
파라다이스의 숨막히는 풍광, <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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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살인극에 휘말리는 산장의 가족들이 ‘코믹 잔혹’한 웃음을 선사했던 데뷔작 <조용한 가족>과 마찬가지로, 김지운 감독의 두번째 영화 <반칙왕>은 웃음의 색깔이 좀 이상한 코미디다. 실적 위주의 사회에서 부적응자에 가까운 은행원의 지지부진한 일상과 이제는 한물간 프로레슬링의 세계가 엉뚱하게 맞물려 쓴웃음과 폭소의 묘한 배합을 이룬다. 물론 웃기고 짠한 부조리극처럼 매순간 희비가 교차하는 게 세상살이인지라, 전혀 낯설기만한 배합은 아니지만. 출근길 지하철 유리창에 눌린 임대호의 얼굴처럼 주눅든 소시민의 일상에서 사각의 링 위로 뛰쳐나간 일탈은 소박한 자아 찾기의 과정을 짠한 웃음으로 풀어나간다.
TV 속 프로레슬링 장면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몇개의 장으로 나뉜다. 우선 은행원 임대호의 윤기없는 일상을 따라가는 ‘공포의 헤드록’부터 유비호와 혈투를 벌이는 ‘사각의 진혼곡’까지. 지각대장에다, 은행직원 중 유일하게 한 계좌도 못 튼 대호는 부지점장에게 눈엣
소박한 자아 찾기의 과정, <반칙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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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 이 정도 코미디 연기는 그의 이력에는 차고도 넘친다. 크리스 콜롬버스 감독? <나홀로 집에>나 <스텝 맘>을 만드는 재주와 시나리오 작가의 역량은 살만하지만 끌리는 감독은 아니다. 원작자는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이라는 좀 딱딱하게 들리는 원칙을 세운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세운 이 법칙을 바탕으로 ‘로봇’에 관한 소설들과 과학 이야기들을 펼쳐 보인 기념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SF소설가 정도로 알려진 아이작 아시모프는 1976년에 <바이센테니얼 맨>이라는 중편 하나를 썼다. 지면상 옮길 수는 없지만 아시모프는 마치 화두처럼 소설의 서두에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을 써놓았다. 원작은 이후 이 법칙을 바탕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간다. 앤드류는 이 법칙의 지배를 벗어나 법정 투쟁을 불사하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윤색과정에서 ‘로봇 공
로봇과 인간의 사랑, <바이센테니얼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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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전사>는 피와 살점이 튀는 활극이지만, 서사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실존인물 아메드 이븐 파들란의 모험담을 토대로, 마이클 크라이튼이 펴낸 소설 <시체 먹는 사람들>이 영화의 원전. 따라서 이야기는 북구인의 삶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아랍 시인 아메드의 순진한 시점에서 전개된다. 북구의 오지를 삶의 터전으로 나눈 바이킹의 선조들과 식인 부족들의 대결 구도 사이에서 그가 전사의 용태를 갖춰가는 과정엔, 서로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이뤄지는 교환수업의 의미가 보태진다. 아랍인은 북구인에게 글의 쓰임새와 일신교의 의미를, 북구인은 아랍인에게 자기방어의 능력을 일깨워 준다. 우정과 의리는 민족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해묵은 주제와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강렬한 요소는 역사적인 맥락이나 배경도, 신의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비장미와 역동감의 전투신이다. 안개 속에 펼쳐지는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장대한 숲과 벌판, 500여명의 기
전형적인 마초적 세계관, <13번째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