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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혁이 입을 열었다. 저음의 목소리에서 단단하게 여며진 상처가 느껴졌다. 만인의 연인이자 지독한 속물인 줄리앙. 김주혁이 풀어낼 다음 사연은 “사랑따윈 필요없다”는 그의 것이다. “기존에 하던 역할이 아니었고 조금 섹시한 면도 있고 해서 탐이 났지요. (웃음)” <YMCA 야구단>의 오대현, <싱글즈>의 수헌, <프라하의 연인>의 최상현, <광식이 동생 광태>의 유광식, <청연>의 한지혁, ‘넘버 원 호스트’ 줄리앙은 곧고 번듯했던 이들과 다른 서슬 퍼런 남자다. “과거의 아픔이 있는 놈이에요. 표현은 냉소적이지만 사랑을 간절히 원해요. 사랑을 못 받고 자라왔기 때문에. 그 앞에 그 사람의 아픔을 꿰뚫는 여자가 나타난 거죠.”
어울리지 않는다는 여론에, 잘나가던 일본 드라마가 원작이라니 모험이 아닐 리 없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건 원작이에요. 원작과 달라야 해 부담스러웠는데 이건 정말 한심하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걸 뭘
남자, 부드럽게 도발하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김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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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이 눈을 감았다. 환하게 빛나던 미소가 사라지고 조금은 불편한 어둠이 찾아왔다. ‘아직은 사랑을 모른다’고 노래하던 소녀가 이젠 ‘사랑따윈, 필요없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어투에서 아련한 상처가 느껴진다. <댄서의 순정> 이후 1년여. 학교로 돌아갔던 문근영이 생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영화의 제목은 <사랑따윈 필요없어>, 역할은 세상에 마음을 닫은,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 민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당시) 딱 저 같았어요. 무언가 세상에 의미를 잃어버린, 하지만 사랑을 바라는 모습. 그냥 제 마음을 민이로 표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올해 초 문근영은 대학입시와 관련 구설에 시달렸다. 비난의 요지는 그녀가 정시로 대학에 가겠다고 말한 뒤, 수시로 입학을 했다는 것. “오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크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의도가 조금 달랐다는 거, 이러면 변명이 되는데. (웃음) 그래도 사람의 미래라는 게,
소녀, 껍질을 벗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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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간을 물들인다, 가을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애정에 굶주린 남녀를 보듬는 멜로물이다. 눈이 먼 류민(문근영)에게 줄리앙(김주혁)의 목소리가 와닿을 때 둘은 비슷한 상처를 지녔음을 직감한다. 빚에 허덕이던 줄리앙은 친오빠로 가장해 민에게 접근하지만 그의 연기는 의아하게도 류민의 마음을 녹인다. 사랑의 마법은 줄리앙 역시 물들이고 두 사람은 어느새 은근한 감정에 휩싸인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선이 어긋나 생기는 어려움은 물론 원작인 일본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의 지명도 역시 부담스럽긴 마찬가지. 게다가 두 배우, 나이차가 15살이다. 김주혁이 장진영, 엄정화, 김혜수, 전도연과 짝을 이룰 때 문근영은 국민여동생으로 칭송받았음을 떠올리면 낯선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어색하진 않았을까. 연기 호흡은 좋았을까. 많은 미디어에서 그들의 나이차를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치부할 때 불안한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어스름 속에서 포즈를 취한 두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김주혁,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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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은 미술대학을 나왔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림’ 그리는 데 능하다(조소를 전공했지만 그 또한 스케치가 필요한 일 아닌가). 우선, 그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할 당시 영화제의 성격과 방향 등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다. 부산프로모션플랜(PPP) 또한 그가 그린 그림의 일부였다. 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을 그만둔 뒤에도 그는 다시 부산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영화 촬영을 지원하는 부산영상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또 다른 대형 캔버스에 손을 댔다. 한국 최초의 영화마켓인 아시안필름마켓을 창설한 것이다. 10월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동안의 숨가쁜 일정을 마친 첫 아시안필름마켓에 관해 박광수 감독, 아니 공동 운영위원장에게 들었다.
- 첫 번째 아시안필름마켓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애초 기대했던 것만큼은 이룬 것 같다. 우선 기존의 PPP와 부산국제필름커미션·영화산업박람회(BIFCOM)이 지난해보다 훨씬 좋아졌다. PPP의 경우
올해 첫 개장한 아시안필름마켓의 박광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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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차’는 사람을 잡아먹는 반신반귀(半神半鬼)의 존재다. 시체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는 야차는 불교에서 전해지는 온갖 신(神)의 하나이면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들려주는 괴담 속의 식인귀이기도 하다. 류승완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야차>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공포영화에 어울릴 법한 진짜 야차가 등장하는 영화다. 궁금했다. <주먹이 운다>로 잠깐 다른 장르를 건너다본 류승완 감독은 순수한 액션의 쾌감을 추구하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시절이 떠오르게 하는 <짝패>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협과 호러를 교배했다고 알려진 <야차>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두 번째 단편 <악몽>이 공포영화이긴 했지만, 류승완 감독과 공포영화의 만남은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시놉시스도 완성되지 않아 정말 할 말이 없다”면서 걱정스러운
무협공포물 <야차> 준비 중인 류승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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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연기는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다. <여자, 정혜>를 시작으로 <가을로>에 이르기까지 김지수가 연기한 배역들에서는 감정의 파고가 쏟아져나온다기보다 은은히 배어나왔다. 격정적인 대사나 극적인 표정 변화가 아닌 그 사이의 알쏭달쏭한 감정의 잔물결은 시구의 풍부한 상징과 함축처럼 여백을 남겼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주 등장하지 않아도 영화 내내 가득한 존재감.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정유정은 출연 빈도로만 보면 아주 작은 역할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고, 사건의 열쇠를 쥔 여인이었다. <가을로>의 민주 역시 그렇다. 그녀는 회상장면에서나 존재 가능한,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여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다.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 존재로 인물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김지수와 김지수가 생각하는 <가을로>는 그래서 닮은꼴이다. “예쁜 시 한편 읽은 것 같다. 풍경화 같은 느낌이
여자는 여백에서 빛을 낸다, <가을로>의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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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행을 떠난다. 길에 새겨진 연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는 10년간 닫아두었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간다. <봄날은 간다> 이후 5년 만에 ‘멜로’로 돌아온 유지태는 다시 한번 부재의 아픔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허물어질듯 위태로워보였던 소년은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남자가 됐다. “실화를 소재로 했고,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공존하는 특별한 멜로영화라는 점에 끌렸다. <가을로>는 영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진심이 담긴 작품이다.”
목포, 경주, 태백 등으로 이어지는 <가을로>의 여행길은 무려 60곳이 넘는 로케이션을 통해 완성됐다. 촬영 당시 연극 <육분의 륙>을 병행하던 유지태는 몇달간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연습하며 전국 각지를 밟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정말 고통스러웠다. 어찌나 힘들었던지 메니에르병이라고 중심 감각을 잃는 병도 얻었다.” 고된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가
남자는 소리없이 깊어진다, <가을로>의 유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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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씨는 직접 만나보니 완전히 여장부다.” “지태씨는 나보다 어리지만 무게감있는 배우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가을로>의 비극적인 연인이라기보다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보듬을 줄 아는 오누이 같다. 촬영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 아름답기로 소문난 장소들을 찾아다녔던 두 사람이 추위와 폭설 때문에 고되고 길었던 긴 겨울 동안 호흡을 맞춘 덕분이리라. 그래서, 민주(김지수)가 곁에 없어도 현우(유지태)는 아스라한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민주는 현우의 환상 속에서 밝게 미소지을 수 있다. <가을로>에서 과거와 현재는 뒤섞이고, 사실과 환상은 경계없이 넘나들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확고한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 촬영장에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동안에도 김대승 감독과 셋이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크게 웃던 모습은 <가을로>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두 사람에게 서로를 아련히 바라보며 슬픈 듯
가을, 그리고 남과 여, <가을로>의 유지태,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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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범죄의 재구성>에서 감쪽같은 솜씨로 관객을 속여넘긴 최동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타짜>는 “눈보다 빠른 손”으로 서로를 속고 속이는 타짜들의 이야기다. 지난 추석, 한국영화의 접전 속에서 최다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한층 능수능란한 비주얼을 선보인다. 전작부터 함께 기술을 연마한 동갑내기 친구, 최영환 촬영감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혼이 담긴 구라’의 경지에 오른 화면을 선보인 최영환 촬영감독에게 ‘사기의 기술’을 캐물었다. 두번 놀랐다. 도무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하다며 사진 촬영을 위한 포즈를 한사코 거부하는 굳건한 고집에 한번. “촬영이 보이지 않는 촬영” 등 일반적인 촬영감독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되뇌는 촬영의 원칙을 반복하지 않는 솔직함에 한번. 기술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결국,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촬영에 대해 “그냥 막 찍는다”든가, “후진 화면”이라고 말해버리는 말투
‘저렇게도 찍네!’라는 말이 좋다, <타짜> 촬영감독 최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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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남자들의 거룩한 수다
장진 감독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곧잘 해온 감독이었다. <아는 여자>를 제외한다면 그의 영화들은 아이처럼 그림자놀이를 하고, 킬러지만 말투가 곱고, 강도이면서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남자답지 않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때문에 <거룩한 계보>는 장진 감독과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영화로 보였다. 질펀한 전라남도 사투리로 상대의 기를 꺾으며 한번, 두번, 세번, 정확하게 마음먹은 횟수만큼 사람 몸에 칼을 찔러넣는 조직폭력배들의 영화인 <거룩한 계보>. 그러나 이 영화의 남자들은 또한 함께 부르던 노래를 나지막한 휘파람으로 불어 친구에게 생존의 신호를 보내고, 죽은 줄 알았던 친구의 휘파람 소리에 엉엉 울어대는 연약하고 빈틈 많은 존재이기도 하다. 조직에 버림받은 치성(정재영)과 형제보다도 아꼈던 친구의 복수를 막아야만 하는 주중(정준호)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칼을 들이댈 것일까.
이런 영화를
<거룩한 계보>의 감독 장진과 주연배우 정재영, 정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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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가 분한 역할들은 실생활에서 만났다간 큰일날 사람들이다. 화폐위조 기술자 휘발유(<범죄의 재구성>), 룸살롱 영업상무(<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전국을 돌며 도박판을 벌이는 타짜 박무석(<타짜>)…. 그런데 이 사람들, 어쩐지 다 딱하고 안쓰러운데다 귀여운 구석이 있다. 김상호가 맡은 역할들은 악당이라 해도 악의 축이기보다는 생계형 하수인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으로 치면 일용직 노동자들과 맥을 같이한다. 생김새 역시 비장하고 사악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몸을 곧추세워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보다 어깨를 움츠리고 양 옆 눈치를 보는 모습이 익숙하다. 김상호가 <범죄의 재구성>을 첫 작품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낯익고 친숙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그의 인간적인 면이 뚝뚝 묻어나는 연기에 있다. 자연인 김상호가 그의 영화 속 페르소나와 얼마나 같고 다른지는 짧은 인터뷰 시간으로 다 헤아리기 힘들었지
<타짜>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배우 김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