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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의 첫 한달은 이유 없이 서러웠다. 이제는 더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일’을 하고 돈을 받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에 설레기보다 두려웠다. 하지만 한 사람 몫도 제대로 해낼 수 있게 되기 전, 첫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일자리를 구하던 몇달간은 그에 비할 수 없이 더 괴로웠다. 고칠 수도 없는 초라한 성적표와 보잘것없는 경력으로는 세상 어디서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면접에서 떨어진 날 밤에는 몇 시간씩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나는 어쩌다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나온 모든 시간과 경험을 부정하고 후회하면서 스스로를 미워했다. 이 넓은 세상에 내 자리 하나 만들지 못하고 ‘어른’의 줄에 서게 된 기분은 외롭고 초라했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바탕으로 한 tvN <미생>은 그렇게 내 자리 하나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최지은의 TVIEW] ‘평범한’ 삶에 대한 간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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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제보자> 또 한 명의 제보자
[정훈이 만화] <제보자> 또 한 명의 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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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보러 갔다. 보트를 타고 먼 바다를 향해 두 시간을 달린 다음 10분 동안 고래 한 마리의 등판과 아주 멀리서 점프하는 고래 두 마리를 보고, 다시 한 시간을 달려 항구로 돌아왔다. 고래란 원래 그렇게 허무한 법이지, 그런 거야, 집에 앉아 <고래사냥>을 봐도 고래는 나오지 않아. 그런데 갈 때는 두 시간이었던 거리가 올 때는 어떻게 한 시간이 되었을까. 보트가 폭주하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폭주하는 보트는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달리는 동시에 파도를 타며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떨어지고… 나는 허리가 나갔다…. 그해 내 나이 서른하나, 고래가 보고 싶다면 한살이라도 어릴 때 보도록 하자.
<캡틴 필립스>를 보면서 왠지 짠하다 싶었더니 고래 관광의 추억이 생각나서였다. 신체에 뼈와 가죽만 존재하는 해적 네명이(그중 한명은 별명이 ‘갈비씨’인데, 넷이 모여 있으면 누가 갈비씨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모터 단 조각배를 타고 달리는데, 내가 다 허리가 아팠다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바다는 넓고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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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자매>는 미국 사진작가 니콜라스 닉슨이 1975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아내와 그 자매들을 모아 촬영한 장기 연작이다. 포트레이트인 동시에 몸과 옷차림에 스며든 시간을 기록한 이 작품에서 닉슨은 네 사람을 항상 일정한 순서로 세워, 세월에 따른 자매들의 미묘한 관계 변화까지 포착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가 극장에 도착한 지금 말하자면 ‘시스터후드’?
9/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에 숨어 있는 아담한 영화관에서 셰인 카루스 감독의 <업스트림 컬러>를 보았다. 미술관 입장권 외에 따로 티켓은 살 필요가 없다. 아무도 팝콘을 먹지 않으며 예의를 좀 차리는 분위기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스크린 아래쪽 벽에 있는 전원을 용케 발견한 관객이 휴대폰 충전기를 꽂아두고 착석하는 광경을 보고, 상당히 감명받았다. 알뜰한 눈썰미다. 컴퓨터의 한글 자막을 스크린에 겹쳐 띄우는 방식의 상영이었는데 도중에 자막이 한동안 실종되는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가난한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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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만 열면 망하는 사람이다. 다 좋은데 그놈의 입이 방정이라고 어릴 적부터 심심찮게 지적을 받아오곤 했다. 음담패설이나 욕설은 난무하게 뿌릴 줄 알았으나 뭐, 그쯤이야 애교로 봐줄 수가 있다 했고 다행히 거짓말이나 뒷담화에 볼이 빨개지는 아이였으니 뭐, 그쯤이야 들켜가며 사는 게 사람답다 넘어가줄 수 있다 했다만 문제는 말의 속도였다. 그러니까 입에 모터를 문 아이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식구 여섯 가운데 유일하게 말이 빨랐다. 당연히 말과 말이 뒤엉켜 말을 더듬기 일쑤였다. 버스 전면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엄마 손에 이끌려 화술학원 문턱까지 다다른 적이 몇번인지 모른다. 그때마다 든 마음은 혹여 내가 불구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어떤 슬픔이었다. 입이 절로 닫혔다. 말수를 잃어갔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도 같다.
그러나 사회는 날 입 다문 아이로 살아가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다. 말을 해야 직장을 얻을 수 있었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가고 싶다 하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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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 이선(이제훈)을 ‘공평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계몽군주’ 정조에게 계승한 인물로 다시 쓰는 SBS <비밀의 문-의궤살인사건>은 주인공 이선보다 비극의 단초가 된 영조(한석규)쪽이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로 나타난다. 권력을 쥔 왕이면서, 그 권력의 시초에서 콤플렉스를 가지는 영조는 용포를 입은 군왕과 맨발로 흐느끼는 광인을 오가며 자신의 어둠을 그럴듯하게 드리운다. 극중 영조와 정반대 자리에 놓이는 이선은 어떨까? 그는 상식적이지 않은 죽음 이후 부인 혜경궁 홍씨와 아들 정조가 남긴 기록이 엇갈리며 추리의 대상으로 삼음직한 인물이다. 극 밖의 시청자에게는 이에 대한 답이 되어야 하는 한편, 극 안에서는 영조가 왕세제 연잉군이던 시절 노론의 비밀조직이 받아낸 수결문서 ‘맹의’를 목격한 도화서 화원 신흥복(서준영)의 죽음을 밝히는 추리의 당사자가 된다. 그러나 극 초반, 이선이 흥복의 죽음을 추적하는 동기가 연약한 나머지 본인의 캐릭터도, 추리의 긴장
[유선주의 TVIEW] 현실의 은유인 건 알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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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마담 뺑덕> 심청전의 뒷 얘기
[정훈이 만화] <마담 뺑덕> 심청전의 뒷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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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밤.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기습적으로 발의됐다는 기사를 읽고 있었다. 법정 근로시간을 사실상 60시간까지 늘리고, 휴일근로에 대해 가산임금을 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기사를 읽어내려가고 있는 그때, 갑자기 창문 밖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주택가가 진동했다. 알고 보니 한국이 축구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었다.
당혹. 이렇듯 선명하다 못해 기시감에 찌든 낡은 전형의 순간들과 조우할 때마다 마음이 어지럽다. 혹자는 노동으로 지치고 힘든 삶에 스포츠와 금메달이 한 줄기 위로 같은 거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빚더미와 교환하는 위로란 사실 자기기만이지 않은가.
경제효과 20조원. 또 한번의 설레발로 시작된 인천아시안게임은 운영 자체도 엉망진창이었지만, 1조원이라는 빚만 덩그러니 떠안게 된 희대의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시민들의 혈세가 이 빚을 위해 종이돈처럼 허공 속에서 불태워져야 한다. 참 비싼 환호성이고, 참 어이없는 위로다. 그것도 모자라 이날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비싼 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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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광화문에는 쓰레기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바로 일베충들이 풍기는 악취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부에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와중에, 일베충들은 닭을 시켜먹는 등 온갖 쓰레기 같은 짓으로 그들을 욕보이고 있다. 온라인에서 자기들끼리 누가 더 쓰레기 같은지, 누가 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지 배틀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으니까. 하지만 일베충들이 온라인을 빠져나와 오프라인에서 악취를 풍겨대니 정상적인 사람들의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쓰레기들은 역시 쓰레기통에 모여 있을 때가 가장 쾌적하다. 고로 일베 사이트는 우리 사회를 쾌적하게 만드는 쓰레기통이며, 절대 없어져서는 안 될 사회의 안전장치다.
주인공보다 사랑스러운 쓰레기통 캐릭터
영화에도 쓰레기통이 있다. 영화에서는 모든 캐릭터와 상황들이 제각각의 논리와 이유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 쉽지 극을 짜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거나 동기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개연성이 떨어져 극
[곡사의 아수라장] 없앨 수 없다면 한곳에 모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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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슬로우 비디오> 동체시력 능력자
[정훈이 만화] <슬로우 비디오> 동체시력 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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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친구의 정규직 아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지방에 있는 처가에 아이를 맡기고 주말에만 만나다 보니 아이가 괜찮을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이번 달 생활비나 걱정하거라. 태어난 지 여섯달 만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네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란(그렇다고 마음 아픈 가정사가 있거나 한 건 아니고, 동생을 임신한 전업주부 엄마가 그냥 키우기 귀찮다고 보낸 거였다) 나는 친구를 말리려고 했다. “괜찮아, 괜찮아. 알잖아, 나도….” “우리 애가 너처럼 될까 봐.” 아, 그래.
팔자에 없는 육아 칼럼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였던 고명하신 교수님 두분은 번갈아가며 ‘3. 3. 3원칙’이라는 걸 강조했는데, 아이는 세살까지 엄마가 키워야 하고, 하루 세 시간 아이와 온전히 함께 있어야 하며, 사흘 이상 아이와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 건가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요. 아니, 일단 교수님 딸도 시어머니한테 애들 맡기고 일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오늘도 동네북은 조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