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체는 말이 없다. 지워진 밤, 쏟아지는 잠이 한 바가지. 두 바가지. 세 바가지. 꾸벅꾸벅 졸다보면 응고혈은 과거형 시제. 시체는 과거형으로만 증언하는 한에서, 살아 있지 않은 육신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시체는 말이 없지만, 말이 있는 거다. 시체는 수다는 떨 수 없다. 하지만 그 대신 시체는 증언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체는 생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지만, 생의 끝자락에 대해선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예컨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대해서 말이다. 소싯적 보았던 추리퀴즈에선, ‘다잉 메시지’라고 했던 거 같다. 마그마라는 사람이 당신을 암살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죽는 순간에 범인의 이름을 어떻게든 알리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 죽어가는 당신의 눈앞엔 여러 가지 채소들이 즐비하다. 배추, 시금치, 양파, 토마토, 감자. 자, 무엇을 잡을 것인가?! 범인의 이름은 ‘마그마’다! 무엇을 잡을 것인가? 유치한 추리문제라고? 투덜대는 사이에서도 숨은 다해간다. 범인을
[곡사의 아수라장] 영화는 시체인가?
-
[정훈이 만화] <신의 한 수> 김회장 부자의 도주
[정훈이 만화] <신의 한 수> 김회장 부자의 도주
-
<그녀>의 OS 사만다(스칼렛 요한슨)가 육체 없는 자의식이라면, <언더 더 스킨>에서 지구인 외피를 뒤집어쓴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은 인간적 자아가 결여된 육신이다. 동시상영에 딱인 한쌍의 영화다. 남자들을 헛된 매혹에 빠뜨리는 자기 몸을 낯설어하며 거울을 바라보는 <언더 더 스킨>의 한 장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지구에서 영화 스타로 산다는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7/10
<랄프 스테드먼 스토리: 이상한 나라의 친구들>은 재미없기가 힘든 다큐멘터리다. 인물? 곤조 저널리스트 헌터 톰슨과 한팀으로 묶여 파란만장을 경험한 일러스트레이터다. 볼거리? 스테드먼의 카툰은 신랄하고 강렬해 편집해놓으면 신작 애니메이션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슬쩍 보여주는 작업 과정도 흥미진진하다. 인지도? 다름 아닌 스타 조니 뎁이 관객을 대리한 질문자로 등장한다. 한데 모르긴 해도 영화의 안전판으로 간주되었을 법한 조니 뎁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신음과 비명
-
며칠 전 감옥에서 출소한 후배를 만났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기피’했고 1년8개월 간 옥살이를 했다. 세월의 차이를 느꼈다. 내가 대학생 때 구속된 친구들은 수감 전 취조단계(고문)가 길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진작 감방은 고대하던 곳이었다. 경험담을 말하는 친구도 드물었다. 그 시절과 달리 이번엔 감옥 생활을 섬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역시 감옥은 좋은 의미든 아니든 인생 학교였다.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은 공지영의 원작 후반부에 집중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책에는 주인공 남동생이 성폭행당하는 내용이 있다. 소년은 어떤 무리에 의해 자위를 강제당한다. 책을 읽었을 때 가장 많이 울었던 장면이다. 두려움에 떨던 소년의 창피하고 서러운 눈물. 소년의 눈동자는 어디를 응시하고 있었을까. 얼마나 형이 간절했을까.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
후배의 이야기 중 내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수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권력과 공감
-
-
공금을 횡령한 동업자 대신 투자자에게 멱살 잡히고도 ‘그 선배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무기력하게 말하는 남편. 담보로 내준 홀아버지의 아파트까지 넘어갈 판국에 ‘당신 죄수복 입는 게 더 무섭다’라고 할 정도로 남편을 믿고 의지해온 아내. 퇴로가 없는 불행 앞에서 현실감각이 마비된 듯 위로만 주고받던 차석훈(권상우)과 나홍주(박하선) 부부는 홍콩에서 돈을 구했다는 동업자의 연락에 안도하며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건 자살한 동업자의 유서와 유류품뿐. 홍주는 보험금으로 아버지의 집을 지켜달라는 유서를 쓰고 바다에 뛰어들고, 마침 해변을 산책하다가 홍주를 구한 여자는 눈물의 포옹을 하는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음날 석훈에게 기묘한 제안을 한다. “사흘에 10억. 제가 차석훈씨의 시간을 사겠어요.”
부부를 시험하는 억대의 유혹. 그다지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SBS 드라마 <유혹>은 여기에 잦은 우연과 작위적인 인연까지 더한다. 10억원을 제안한
[유선주의 TVIEW] 말과 행동이 다를 때
-
[정훈이 만화] <끝까지 간다> 당황하지 않고...
[정훈이 만화] <끝까지 간다> 당황하지 않고...
-
몇년 전까지 청소를 일년에 대여섯번 하고 살았다(지금은 한달에 한번. 내가 부지런해진 건 아니고 집이 작아졌다). 사람이 어떻게 그러고 사나 싶을 텐데… 맞다, 사람은 그러고는 못 산다. 나는 먼지 알레르기가 생겼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아 피부과에 갔더니 의사는 평범한 사무직이라고 주장하는 내 직업을 의심했다. “그냥 사무실에만 있어서는 이럴 수가 없는데요. 공장이나 창고 같은 데서 일하는 거 아니에요? 먼지가 많은?” 나는 볼을 붉혔다. “그게 아니고 집에… 먼지가 좀….” 의사도 볼을 붉혔다, 저게 사는 거냐. “일단 약을 바르시고요… 청소를 하세요.” “네.”
병원에서 돌아와 청소를 하려고 집 안을 뒤집은 나는 자연의 경이와 마주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몇달을 묵은 먼지는 시간을 거슬러 흙으로 화했고(원래는 흙이 먼지가 된다) 100% 무기물인 타일 사이 실리콘은 검푸른 곰팡이의 보금자리로 변하여… 더 이상의 혐오스러운 묘사는 자체 검열한다. 어쨌든 지금껏 이 집에서 숨 쉬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가사도우미 부르려고 청소할 뻔
-
<레이드2: 반격의 시작>은 건물을 액션의 공모자로 적극 활용한다. 이 영화에서 구조물은 곧 철과 콘크리트로 된 둔기이며, 다채로운 액션 동선의 가이드라인으로 기능한다. 떼 지어 달려드는 적을 홀로 맞이한 주인공 라마(이코 우웨이스)는 비좁은 화장실 큐브를 요새로 삼는다. 그는 화장실 문을 수도 밸브처럼 열었다 닫으며 감당할 만한 수의 상대를 불러들여 때려눕힌다. 하지만 금세 뻗어버린 적들로 가득 찬 큐브는 라마를 점점 밖으로 밀어낸다.
7/4
“흔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달리 물량공세로 승부하지 않는다.” “보통의 블록버스터에서 보기 힘든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일정한 완성도를 갖춘 거대예산 영화의 리뷰에서 자주 접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여기서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는 ‘흔한, 보통’ 블록버스터는 예컨대 어떤 영화일까? <노아>?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엣지 오브 투모로우>? 다들 해당 사항이 없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마이클 베이 회고전
-
3차원 공간에서 거울대칭이지만 포개지지 않는 기하학적 구조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을 카이랄리티(chirality)라고 한다. 쉽게 말해 왼손과 오른손 외에 대칭 구조인 제3의 손 모양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자 역시 언제나 두 가지 결합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개념은 화학에서 자주 사용되며, 학자들도 ‘왼손’과 ‘오른손’이라는 표현으로 분자를 분류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염기를 공유하기에 하나의 조상에서 분화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론적으로 DNA 역시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해야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DNA는 오른손잡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우파 생명인 셈이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의 과정에서 경쟁력을 잃은 좌파 생명들이 멸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철저한 배태는 아주 드문 일인데, 아직까지 생물학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일부 우주생물학자들은 이것을 생명이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의 미생물이 유입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좌파 생명, 우파 생명
-
언제부터인가 해외 스타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네티즌은 주책없는 친척을 단속하듯 기자들을 향해 “제발 ‘두 유 라이크 김치?’나 ‘두 유 노우 <강남스타일>?’ 같은 질문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기 시작했다(‘김치’나 <강남스타일> 대신 ‘소녀시대’나 ‘박지성’을 넣을 수도 있다). 물론 김치와 <강남스타일>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건 예절과 배려의 문제다. 막 친구가 될까 말까 하는 누군가를 향해 ‘당연히 나에 대해 이 정도는 알아야지!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건데 너도 좋지?’라고 눈치 없이 굴지 않는 것 말이다.
그러니 ‘국뽕’, 즉 지나친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조롱하는 분위기에 등장한 JTBC <비정상회담>에 대해 우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KBS <미녀들의 수다>가 막을 내린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는데 여러명의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토크쇼라니, 무슨 얘기를 더 하려고? 특히 첫회에 MC들이 로빈 데이아나(프랑스)를 맞이하
[최지은의 TVIEW] 아슬아슬해서 좋다
-
[헌즈 다이어리] <주온: 끝의 시작> 그만 놔 줘!
[헌즈 다이어리] <주온: 끝의 시작> 그만 놔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