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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이나 인터뷰를 더하지 않은 이 영화의 선택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안드리아 아놀드의 <카우>는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영화의 주인공은 낙농장의 젖소 루마이고, 루마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삶 자체가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기에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구성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루마의 정체성은 동물이라기보단 가축에 가깝다. 그렇기에 오프닝 시퀀스의 극적인 출산 장면이나 엔딩의 충격적인 죽음 장면보단 오히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가축으로서의 범상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이 영화의 성격을 더 잘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장에서 길러지는 가축에게 자유나 애정은 응당 주어지지 않는다. 숨 막히는 현실과 비극적 운명을 답답해하며 불현듯 이동과 여행, 탈출과 이별을 감행했던 아놀드의 극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그의 첫 다큐멘터리 <카우>의 ‘젖소’ 루마는 어딘가로 떠나지 못한 채 농장의 일부로 살아가야만
박정원 평론가의 '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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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마지막 통신이 꺼지고 착륙을 포기한 KL501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간다. 승객들은 휴대폰을 통해 각자의 가족과 마지막 통화까지 마친 상태다. 카메라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는 비행기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실루엣을 뒤에서 잡아준다. 마치 악당을 물리친 후 석양 저편으로 사라져주는 카우보이처럼. <비상선언>에서 섬뜩함을 느낀 순간은 생화학 테러를 벌인 류진석(임시완)의 광기 어린 표정을 마주했을 때가 아니다. 석양 저편으로 깔끔하게 퇴장하려는 비행기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불쾌한 소름이 돋았다. 바이러스 치료제가 불투명한 상황 탓에 한국에서마저 착륙을 거부당한 승객들은 자발적으로 하늘에 머물기로 한다. 목적지를 잃은 저 비행기는 어디를 향해 날아가는 걸까.
<비상선언>, 위험하기보다는 게으른
달리 질문하면 조종간을 잡은 박재혁(이병헌)은 비행기를 어디에 추락시킬 생각이었던 걸까. 바이러스가 가득하니 어느 산간 지방에 내리는 것도 나쁜 선택이었을 것이
송경원 기자의 ‘비상선언’과 ‘헌트’가 제거해버린 것들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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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풍경은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19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여파를 남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엔데믹 시대다. 관객은 얼마나 극장에 돌아왔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 기준으로 올해 7월1일부터 8월7일까지 관객 집계를 2019년 같은 기간의 수치와 비교해봤다. 2022년 해당 기간 관객수는 21,433,249명. 2019년 같은 기간은 28,825,027명으로, 올해가 2019년의 약 74%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실상 해제되고 <범죄도시2>가 ‘이제 사람들이 극장에 간다’는 신호를 준 뒤 여름 대작들이 개봉한 시기, 2019년 대비 4분의 3 정도의 관객이 극장을 찾은 것이다. 이유는? 상영작들도 다르고 코로나19 영향 또한 잔존해 있지만, 역시 관람료 인상의 영향이 클 것이다. 같은 기간 매출액을 비교해보자. 올해 해당 기간 극장 매출액은 222,270,137,116원. 2019년 같은 기간엔 241,936,701,679원이었다. 92% 수준이다. 4분
송형국 평론가의 ‘엔데믹 극장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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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퇴적되는 사건들의 장력은 영화의 끝에 가서 하나의 얼굴로 도착한다. 가뿐함과 충만함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크리스의 얼굴. 그 얼굴을 만들어낸 것들을 헤아려본다.
영화는 비행기를 타고 막 어딘가에 도착한 커플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비행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자동차에 짐을 실은 후 내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설정한다. 그러자 안내 음성이 나온다. “1시간48분 뒤에 도착합니다.”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은 절묘하게도 영화 자체의 러닝타임과 조응한다. 안내 음성을 듣고 기대에 찬 얼굴로 웃는 두 사람의 모습 또한 영화의 시작을 마주한 관객의 입장과 묘하게 중첩된다.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가 출발한다.
우연일지도 모르는 이 사소한 시간 단위의 일치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 속 영화’에 대한 희미한 예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기대감을 더욱 특수하게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이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성지’와도 같은 포뢰섬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커플로 등장하
김예솔비 평론가의 ‘베르히만 아일랜드’, 떠남의 몸짓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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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의 ‘외계인’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낯선 존재를 다루는 영화의 방법을 생각해봤다.
최동훈의 영화에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순간은 쌍둥이라는 설정에 관한 연출자의 일관된 관심이 드러날 때다. <범죄의 재구성>의 쌍둥이 형제와 <암살>의 안옥윤과 쌍둥이 언니 미츠코, <전우치>에서는 쌍둥이로 표현되는 대신 전생에 마주친 여인과 똑같이 생긴 현대의 인물 서인경이 등장한다. 이런 영화적 분신(分身)들을 최동훈은 적극적으로 배치해왔다. 똑같은 외모를 가진 쌍둥이의 출현은 목격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정체를 숨기는 속임수를 만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반대의 삶에 던져진 인물들의 운명적 소용돌이를 영화에 도입하는 기제로 쓰인다. <암살>의 주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면에서 안옥윤은 암살 대상인 친일파 아버지가 미츠코를 살해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거울이 깨져버리자, 건조한 임무의 수행자이던 안옥윤에게 멜로드라마적 정념의 복수자라는 면모가 덧붙는다. 안옥
김병규 평론가의 '외계+인' 1부와 '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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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의 진정한 주인공은 한산대첩이 아니라 바로 이순신이어야 했다.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이 개봉 이후 놀라운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개봉 8일 만에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가속도를 감안한다면, <명량>을 넘어설 기세다. 그렇다면 <한산>은 정말 이름값을 하는 역작으로 영화사에 남을 것인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한산>에 찬물을 끼얹거나, 대중성이냐 작품성이냐를 따지는 케케묵은 논쟁을 벌이고자 함이 아니다. <한산> 시사회에서 필자는 이 영화가 단순히 이순신을 ‘다룬’, 이순신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데 실망했다. 영화가 정식 개봉을 한 다음날 다시 한번 상영관을 찾았지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영화비평가와 대중에게 높은 평점을 받고 있는 이 영화가 이순신을 다룬 역사물임에도 이순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쳤다. 실제로 대중은 9점
남송우 교수의 ‘한산: 용의 출현’, 사실과 허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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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당선자. 20세기의 공포는 끝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이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알려지지 않은 요소로서 무의식을 발견해야만 했다면, <배드 럭 뱅잉>에서 인용된 무의식에 관한 농담은 그것이 또한 사회적인 구성물임을 이야기한다. 다음은 영화의 2부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의 ‘무의식’ 항목이다. 별다른 의학적 원인 없이 팔을 쓰지 못하던 노인이 정신분석가를 찾는다. 하지만 “하일 히틀러!”라고 정신분석가가 외치자 노인은 팔을 들어올려 나치 경례를 한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마비와 정상성의 상태를 오가는 노인의 팔이다. 나치 경례에 대한 금지 유무에 따라 마비되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팔이 다시 결합의 상태를 갖는 것처럼, 인간 신체의 부분들은 그것이 기입된 사회적 맥락에 의해 몸에서 분리되기도 하고 결합을 유지하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 포르노와 다를 바 없는 섹스 비디오에서 에미(카디아 파스칼리
소은성 평론가의 '배드 럭 뱅잉', 끝나지 않는 폭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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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으로 옹호하기는 힘들지만, 왜 이런 결과물이 나왔는지는 이해된다.
쓰는 내내 비판하고 싶은지 해명하고 싶은지 혼란을 겪다가, 선택을 유보한 채로 부딪쳐보기로 했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건 하나다. 재미. 관객의 평균적 즐거움을 건드릴 수 있다면 모든 비판은 헛소리로 만들어버릴 힘이 그의 영화에는 있었다. <외계+인> 1부는 최동훈의 영화 중 이례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다. 그중 재미를 기준으로 삼는 쪽에서 부정 의견이 많은 점은 의외의 현상이다. 재미없고 난삽하다는 의견이 혹평의 주된 반응이라면, 호평하는 쪽은 한국 외계 소재 영화의 시도와 기술적 성취 등을 이유로 삼는다. 다만 재미 면에서는 볼만하다는 정도의 다소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달라진 건 관객일까, 감독일까. 분명한 건 다수의 관객을 공략하려는 영화의 시도에 주황색 경고등이 켜졌다는 사실이다. 최동훈이 두개로 분리된 시대를 동시에 다룬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만큼
김소희 평론가의 '외계+인' 1부, 시대‘인식’적 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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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의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진다고도 했지만 그렇게 극적인 전환은 없었다. 대신 늦은 새벽 혼자 고요히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문득 뒤돌아보니 70일 남짓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이미 그에게 흠뻑 젖어 있다. 서서히 물들어 다른 상태로 나아가는 경험 속에서 나를 스쳐 지나간 두 영화를 다시 되새겨봤다.
시간과 함께 내 안의 언어가 익어간다. 입을 닫자 갈 곳 잃은 마음이 넘치고 번져 끝내 지워지지 않을 얼룩이 되어버렸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굳이 말을 보태어 영화의 형태를 훼손하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내 안의 빈약한 언어로 이 상태를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말을 더할수록 오해는 짙어지고 본질에서 멀어질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내게 지면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 내심 안도하며, 이 비껴간 인연에 감사하며 수줍은 마음을 저 깊은 시간의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때론 간격이 시야를 확장시킨다.
송경원 기자의 '헤어질 결심'과 '탑건: 매버릭'에 대한 뒤늦은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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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다음날 별스럽지 않은 사진 한장을 바라보다 어떤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로스트 도터>가 내 의식과 몸의 감각을 마구 자극한 결과일 것이다.
한 여인이 어둠 속을 서성이다 어느 둔덕에 선다. 배에 상처를 입었는지 블라우스는 피로 얼룩져 있고 몸은 휘청인다. 파도 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그녀는 심각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러고선 이내 물가에 쓰러지고 만다. 그녀의 이름은 레다(올리비아 콜맨)다. 그녀는 온몸으로 불안을 견뎌내온 강인한 여성이자 명민한 학자이고, 두딸의 어머니이자 모성 신화를 보기 좋게 깨버리는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이다. 레다는 까다롭지만 올곧고, 냉정하지만 열정적이기도 하며, 이기적이지만 공감력이 뛰어난 다면적인 인물이다. 학업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젊은 한때는 가정을 버리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향하기도 하며 절대적인 모성애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살았지만, 모녀
홍은미 평론가의 '로스트 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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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와 시각적 기술의 즐거움이 팽배한 <헤어질 결심>은 서사와 테크닉의 이상적인 효율성을 제공한다. 박찬욱의 시각적 레퍼토리는 스토리를 매혹적이고 어지러운 미장센으로 변형한다.
정탐과 수사의 모티프가 멜로드라마의 서사 경로와 교차하는 <헤어질 결심>의 개요는 대중 장르의 전형에 기대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전통적인 관계는 남자 형사와 그의 여성 용의자 사이의 친밀감이다. 미스터리한 여인에 대한 애착으로 그녀의 뒤를 밟는 탐사 플롯, 미망인과 그녀의 주변을 수사하는 형사의 위험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다룬 스릴러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다양한 전례들(<현기증>과 <보디 더블>, 심지어 <원초적 본능>)과 견주어지곤 한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의 실질은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참조목록들과 변별되는데 그 창의의 바탕이 평행하게 배열된 이야기들의 패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로맨틱 스릴러라는 게임의 규칙을 관
장병원 평론가의 '헤어질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