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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덧붙인 ‘지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영화에 개입하는 장소다. 그 장소의 면모를 고민해봤다.
도심 곳곳의 격자형 도로와 건물들을 정적인 부감으로 보여주는 1961년 원작 영화의 도입부와 달리,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잔해로 가득한 공사장의 바닥을 비추면서 스크린을 연다. 지면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공중에 떠올라 링컨 센터를 짓고 있는 뉴욕의 건설 현장으로 진입한다. 유려한 원테이크로 공간의 전경을 담아내던 화면은 천천히 하강하며 또 다른 바닥에 도달하고, 바닥의 철문이 열리자 어린 노동자의 몸이 지하로부터 걸어나온다. 뮤지컬영화 특유의 춤추고 노래하는 신체의 감각적 자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당도한 이 매혹적인 오프닝은 스필버그가 설정한 한 가지 전제를 환기한다. 여기에는 춤과 음악의 표현이 펼쳐지기 이전에 인물들의 신체가 발을 디디고 선 지반, 그리고 그 밑바닥의 지하(underground)가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지하, 뉴욕, 그리고 미국이라는 시공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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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문연구원 우주탐사그룹 선임연구원. 영화 속 혜성 충돌은 오늘날 우리 인류가 맞닥뜨린, 그러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전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문제들로 치환해볼 수 있다. 위기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대처하는 자세는 비슷할 것 같다.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돈 룩 업>을 봤다. 영화를 먼저 본 지인들은 내게 구체적인 힌트는 주지 않고 추천만 했다. 재밌는데 무섭다고 했다. 과학자와 정치가가 등장한다는 말에, 그거 참 재밌겠다 싶어 무선 이어폰을 끼고 개수대 맞은편에 태블릿을 올려두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고무장갑을 꼈다.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해치우는 동안 가볍게 영화나 보며 집안일의 지겨움을 쫓을 요량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찻주전자에 물이 끓는 휘파람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공포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찰나, 뜨거운 차 한잔과 간식을 들고 모니터 앞에 앉아 음악으로 지루함을 쫓으며 관측을 시작하는 천문학자가 보였다. 아니구나. 곧이어 기이한 소
천문학자가 본 '돈 룩 업', 신중한 과학적 묘사보다 눈길을 끈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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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배우의 얼굴은 영화를 위한 작은 장소다. 클로즈업된 얼굴에는 그 자체로 영화적인 힘이 내장되어 있다. 프랑스를 연기한 레아 세두의 얼굴은 영화적인 동시에 영화적인 것을 무너뜨린다.
브루노 뒤몽이 현재로 돌아왔다. <까미유 끌로델> <잔 다르크> 등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시대극과 어딘가 현실에서 한발 물러난 영화를 만들어오던 뒤몽은 미디어에 둘러싸인 인물의 삶을 조망하는 <프랑스>를 통해 완전한 현재에 뛰어든다. <프랑스>의 도입부는 마치 현재를 재정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너무 평범해서 도리어 이상한 첫 장면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스타 방송인 프랑스 드 뫼르(레아 세두)에게 사람들이 몰려든다. 카메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놓여 있다. 잠시 후 무리를 등지고 카메라쪽으로 걸어와 카메라 앞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선 프랑스는 이어폰을 통해 아들과 통화한 뒤 무리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 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가 카메라 시대에 던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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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두운 시기에 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받았다. 처음엔 끔찍한 상상이 제공하는 웃음을 통해, 마지막엔 기도로.
애덤 맥케이의 모든 작품을 보지는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만 그의 널리 알려진 최근 두 작품 <빅쇼트>와 <바이스>만을 놓고 생각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 하나는, 영화가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제4의 벽을 넘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이나 커트(제시 플레먼스)처럼 픽션 속 캐릭터가 관객을 향해 자신의 속마음을 직접 밝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빅쇼트>에선 이상한 표현이지만 ‘배우 마고 로비가 마고 로비로 등장’하여 어려운 경제 용어를 설명하기까지 한다. 오직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자료화면 같은 이 신은 사실상 그대로 들어낸다 하더라도 극의 전개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혹은 극단적으로 말해 자막 처리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자막 자체가 시간의
'돈 룩 업'에 즐비한 들어내도 되는 장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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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엄연히 존재하는데 잘 얘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 얘기를 계속하려 한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든 걸 지우고 싶었다. 가짜뉴스 말이다. 가짜뉴스로 인한 대중의 오해 말이다. 그것이 만든 타락한 시대 말이다. 피해자는 씻기 어려운 고통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앞뒤 자른 다음 교묘하게 편집하면 손쉬운 분노는 삽시간에 퍼진다. 화를 낼 준비가 된 이들이 여기에 열광한다. SNS는 조작된 진실을 들불로 만든다. 개인은 내가 구성한(줄 알지만 말초적 알고리즘이 만든) 나의 미디어를 믿는다. 전통 언론들의 부화뇌동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제 당사자의 고통은 씻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한국 미디어 이야기일까. 트럼프 시대를 가까스로 벗어났으나 여전히 그 망령이 잔존하는 미국 사회 이야기일까. 물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 이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마블 영화는 어떻게 미국의 현실을 반영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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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시리즈의 팬으로서 이번 영화에 대해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짚어보았다.
과거의 대중문화들이 현재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사이먼 레이놀즈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 달린 부제처럼 ‘중독’에 가까운 수준으로 말이다. 음악으로 국한해서 보자면 ‘쎄시봉’을 필두로 7080이 붐이었다가 ‘토토가’의 90년대를 거쳐 이젠 ‘싸이월드’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닿을 곳까지 왔다. 콘텐츠를 향유했던 장소는 물리적 공간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공간에서의 공통의 추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가 마지막 시기이자 무대가 아닐까 싶다. 그 시기에 진행된 PC의 광범위한 보급과 이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콘텐츠를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게 되었고 사회는 전보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기 시작한다.
이 마지막 시기에 등장했던 영화 중 문화 현상을 일으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실패한 속편이 된 두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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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내용은 익숙하다 못해 식상하다. 하나의 세계가 끝났음을 뒤늦게 받아들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남자 이야기는 닳고 닳을 만큼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의 손을 거치고 나니 전혀 다른 파장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숏/리버스숏 사이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
발신과 수신, 공감과 반응 사이에 놓인 '드라이브 마이 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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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의 여정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크라이 마초>는 자동차에 탄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동차를 운전해 목가적인 풍경을 지나쳐 주변에 말들이 묶여 있는 마구간의 사무실에 도착하는데, 도착하자마자 남자를 기다리던 한 동료에게 너무 늦었다는 말을 듣는다. 사물함을 제때 비우지 않았다는 범상한 말이지만, 서사의 논리 바깥에서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대사다. 90세의 이스트우드가 직접 연기한 마이크라는 남자는 스크린에 뒤늦게 도착한 존재다. 과거 로데오 챔피언이었던 그는 예기치 않은 낙마 사고 이후 보잘것없는 카우보이로 살아가고 있다. 이 노년의 카우보이는 더이상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마이크는 텅 빈 주인공이다. 그의 주변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이렇다 할 적대자도 없고, 이뤄내려는 욕망도 보이지 않는다. 종교적 믿음이나 고집스러운 신념을 드러내는 법도 없다. 액자에 걸린 흑백사진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그의 작은 집이 마이크의 상태를 지시한다.
'크라이 마초'의 기묘한 영화적 여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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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뭘 믿고 살아요?” “그건 저도 모르죠.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아죠.” 믿음을 잃은 사제에게 건네는 정신과 의사의 이 말이 어쩐지 조용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 한 남자가 흐느낀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고 적막만이 그의 울음소리를 감싼다. 남자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근처 승객들에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여러 번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을 때, 건너편 창가에 앉은 다른 남자가 말한다. “불쌍한 인간. 자기 집에서 슬퍼할 것이지 왜 여기서 저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끝없음에 관하여>를 만들기 이전 15년에 걸쳐 로이 안데르손 감독이 선보여온 ‘인간 3부작’을 가득 채운 불안과 소외의 정서를 드러낸다. 안데르손은 ‘인간 3부작’을 통해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삶의 부조리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도시의 냉담한 풍경을 그
작은 몸짓: '끝없음에 관하여'가 보여준 삶의 단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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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영화는 사랑 이야기를 예고하지만, 결국 마주해야 하는 것은 처절한 복수극이다. 영화는 관객이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성격을 착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왜 사랑을 기대해야 했고, 또 그 기대를 배반당해야 했을까. 그 이유에 관해 생각했다.
서부영화는 한때 이야기였다. 1900년을 전후한 시대, 침범이 빈번한 국경 지대를 배경으로 문명과 야만이 부딪히는 이야기가 지치지 않고 재생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부극은 쇠락했지만, 공간과 시대를 넘어 ‘새로움’을 경신하며 이어지고 있다. 서부극이 그 물질적 근거를 잃은 이후에도 <노매드랜드>가 보여주듯 광활하고 삭막한 공간 위에 고독한 여행자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웨스턴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웨스턴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음악이다. 최근에 발표된 두편의 중요한 서부극 <퍼스트 카우>와 <파워 오브 도그>는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파워 오브 도그'가 멜로드라마가 아닌 복수극이어야 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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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데타는 성녀일까 사기꾼일까. 영화의 마지막, 페샤에서 도망친 베네데타가 다시 페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를 의심했던 나의 과오를 깨달았다.
여자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무언가에 탄 상태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폴 버호벤 감독의 두편의 영화 <베네데타>와 <쇼걸>은 비슷하게 출발한다. 또한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이 서로 닮아 있다. 두 주인공은 욕망을 추진체 삼아 앞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뒤를 돌아보는 플래시백도 없다. 그렇게 영화가 끝에 다다르면 두 주인공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쇼걸>의 노미(엘리자베스 버클리)는 라스베이거스의 쇼 비즈니스 중심에서 스스로 나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히치하이킹을 한다. <베네데타>의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자신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쳐온 페샤로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베네데타는 왜 자신에게 지옥이 된 그곳으로 스스로 걸어간
'베네데타' 접속에서 접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