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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디스패치>에 관한 작품비평이라기보다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 관한 노트가 되었다. 눈길을 끄는 외관보다 더 독특한 내부를 생각해보았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연출자에 관해 비평하는 것은 은근히 까다로운 일이다. 그는 명성과 성취에 비해 늘 덜 회자된다. 정확히는 특정한 화제에서만 동어반복되는 편이다. 인상적인 ‘영상미’와 화려한 ‘색감’은 그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이지 않은가. 물론 감독 스스로가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화면을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데 천착하니 정녕 피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미장센은 즉각적으로 아름다우며 이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영화의 외피를 현란하게 재단하는 만큼 영화의 내부 질서 또한 능란하게 조직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유난히 비주얼리스트로서의 면모만 부각되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다.
그가 20년 전 연출한 <로얄 테넌바움>은 거짓말에 관한 영화였다. 오랫동안 머물던 호텔에서 쫓겨날 신세가
허구와 인공의 앤더슨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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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오페라극장이 과거의 오페라극장과 다른 점은 무대와 관람석의 중요도가 달라졌다는 거다. 파리의 두 오페라, 1875년에 건설된 오페라 가르니에와 1989년에 개관한 오페라 바스티유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화려한 중앙 계단이 귀족들의 과시용 무대라면 관람석의 격실 좌석(박스석)은 서로간 시선의 무대다. 오페라극장은 아니지만, 심지어 공연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다른 관객이 바라보는 장소라는 이유로 무대 위에 좌석을 설치한 극장도 있었다. 비율로 따지면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관람객을 위한 공간은 무대보다 더 크고 화려한데, 오페라 바스티유의 경우는 정반대다. 공연의 중간 휴식 동안 사교의 공간이 되는, 명칭도 다양한 오페라 가르니에의 관람객 공간은 현대에 와서 로비라 불리는 좀더 기능적인 공간으로 통일되었다. 현대의 오페라극장은 관객을 무대 위의 오페라에 몰입하게 하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즉 현대의 오페
클래식한, 혹은 올드한 독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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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이터널스>는 픽션을 가장한 논픽션 영화다. 영화의 목적은 새로운 히어로를 소개하는 데 있지 않고, 이들과 더불어 히어로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는 데 있다. 모든 관객이나 시리즈의 팬을 만족시킬 순 없겠지만, 영화 속 히어로의 생몰이 어딘가 믿을 수 없고 허무하다고 느꼈던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추모와 기억의 시간이 될 것이다.
개봉 전 공개된 <이터널스> 포스터 이미지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포스터에서 보이는 히어로 이미지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구축해온 히어로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에게 익숙한 히어로 이미지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포즈를 통해 전투의 강도와 그보다 강인한 힘을 예고한다. <이터널스>의 포스터 이미지에서 아무래도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강인한 힘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이동하는 듯한 히어로 무리다. 그들은 정면을 바라보거나 일치된 방향성
히어로의 수동성을 위한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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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를 보고 <라쇼몽>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구성적인 특징에서 그렇다. 영화는 1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장(맷 데이먼)과 자크(애덤 드라이버)의 결투에 얽힌 사연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간다. 그러다 2장에서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이것이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사람의 관점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까지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를 포함한 세 인물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같은 사건이 두번 혹은 세번씩 반복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란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라쇼몽>식’ 영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된 지 오래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라쇼몽>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2장이 시작되는 순간 영화의 전개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어지는 세개의 챕터에서 상이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가 반복함으로써 멈추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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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예술에는 쓸모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밝은 눈으로 짚는 일이 비평의 쓸모 중 하나쯤은 될 것이다.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고 작품의 외연을 넓히려는 비평의 노력이 지금으로선 절실하다고 느낀다. ‘프런트 라인’에 합류한 취지다.
21세기 웨스턴 장르의 정의는 다시 내려질까. 다음 영화들을 살펴보자.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 영화들 사이의 우연과 필연을 연결지어 살펴보자. <퍼스트 카우>(2019),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 이하 <레버넌트>), <로스트 인 더스트>(2016), <미나리>(2020), <노매드랜드>(2020), <뉴스 오브 더 월드>(2020)…. 2010년대 후반 이후 미국영화에 나타난 어떤 시류는,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하나의 하위 범주를 만들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퍼스트 카우>는 <레버넌트>와 1820
'퍼스트 카우'를 계기로 본 미국 서부영화의 새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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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야기가 메마르고, 질문이 없어진 자리에서 묻다
온몸이 마비된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의 육체가 발가벗겨진 채 의자에 묶여 있다. 런웨이 무대처럼 길게 뻗은 테이블 맞은편엔 하코넨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이 전리품을 감상하듯 적수의 패배를 음미 중이다. 축 늘어진 빨래마냥 의자에 간신히 걸쳐 있음에도 레토 공작의 몸은 잘 빚은 조각품처럼 탄탄한 생기를 잃지 않는다. 이윽고 하코넨 남작이 풍선처럼 괴이한 몸을 띄운 채 허공을 미끄러져 다가오자 레토는 마치 황소를 잡는 투우사처럼 이빨 사이 감춰두었던 독안개를 뿜는다. 넓고 황량하고 검은 방은 순식간에 독 안개에 뒤덮이고 어느새 현장을 벗어난 카메라는 바깥에서 문이 닫히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마치 무대의 막이 내리듯. 하나의 세계가 종언을 고하듯. 눈꺼풀이 감기듯.
황망한 기습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레토가 하코넨과 대치하고 마침내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이 시퀀스는 한폭의 그
3인3색 비평, 송경원 기자의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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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이 21세기에 부활한다면
인간을 중심에 두는 드니 빌뇌브의 스펙터클과 <듄>의 사막
드니 빌뇌브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친밀한 관계라는 말을 들었다. 연출자의 궤적을 보면 비슷한 부분이 많은 두 사람이다. 각각 캐나다와 영국에서 작은 영화로 시작했지만, 영화적으로 인정받으면서 할리우드로 이동해 점점 더 대작의 영역을 장식하는 감독으로 변했다. 윌리엄 와일러가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를 못 이기는 것처럼, 구로사와 아키라가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를 못 이기는 것처럼, 페데리코 펠리니가 루키노 비스콘티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못 이기는 것처럼, 스펙터클을 추구한 감독일수록 현혹의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펙터클이 죄는 아니다.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어쩌면 죄의 명목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스펙터클을 정의하려는 의도는 없다. 말하려는 것은 빌뇌브의 스펙터클이다. 나는 그의 스펙터클이 놀란의 그것이나 그들의 위대한 선배인 스탠리 큐브릭의
3인3색 비평, 이용철 평론가의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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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를 넘어설 각오가 필요해
프랭크 허버트의 <듄>영상화와 관련된 신화와 진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1965년에 처음 출간된 뒤로 두 가지 미신을 끌고 다녔다. 하나는 SF 역사상 최고 걸작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화가 불가능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듄>이 최고의 SF 소설 또는 소설 중 하나라는 주장은 거의 직관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일단 몇 페이지만 읽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대단한 야심작이기는 하다. 적어도 첫 번째 책은 재미있다. 장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하지만 걸작이 되기엔 문제가 많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책이 결국 한 무더기의 패스티시 덩어리라는 것이다. <듄>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인류가 항성간 여행을 통해 전 은하계를 커버하는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세계에서 백인 남자들이 공후백자남 놀이를 하며 만년의 시간을 날리고 있다. 이 자체가 통탄할 일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3인3색 비평, 듀나 평론가의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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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언젠가 자크 로지에는 “나는 뤼미에르 형제처럼 영화를 만든다”라고 말했고, <엄마와 창녀>에서 장 외스타슈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나의 자유는 남들의 표현을 훔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욤 브락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누벨바그의 끄트머리에 있는 두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다함께 여름!>의 시작과 끝에는 축제와 파티가 놓여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이고 또 흩어지는 무작위의 현장 한가운데서 기욤 브락은 예기치 못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순간의 기록을 렌즈에 담는다.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모든 방향으로 열린 사건의 잠재성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마주침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장소에서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나타나고 또 사라지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른 채로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비가시적인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을 테다. 마치 영화관을 오가는 이름 모를 유령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시작하
'다함께 여름!'의 일탈이 만든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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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한때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누군가의 일기처럼 보이고 들린 적이 있다. 이제는 아니다. 일기를 써야 하는 이는 관객이다. 그의 영화는 하루의 파편들이며, 파편은 흔한 감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안경을 쓴 상옥(이혜영)이 소파에 앉아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 후 아파트 단지의 전경을 보여주는 타이틀 시퀀스가 잠시 등장한 뒤, 이번에는 침대에서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잠든 상옥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화면 밖에 앉은 누군가의 손이 상옥이 누운 침대 곁에 가만히 놓인다. 카메라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패닝하면 상옥의 옆얼굴이 보인다. 상옥은 분명 바로 옆에서 잠들어 있는데 어떻게 상옥이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나. 기억하는 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이런 방식으로 인물의 분화를 새기는 트릭을 사용한 적은 없다. 그의 영화가 꿈처럼 분화된 시간을 그릴 때도 숏 내부에서만은 현실적인 조건과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잠든 인물
마주한 얼굴 사이에 놓인, 우리는 모르는 것: '당신얼굴 앞에서' 영화를 성립시키는 얼룩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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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 창궐한 시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집과 근무지 사이만 맴도는 생활을 하다 보니 변화라는 건 당최 감지할 수가 없다. 영화만이 변화를 인지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도 그 통로의 갈래 중 하나였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변하는 것들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덕수궁 돌담길 같은 것이다. 돌담길 곁을 수없이 지나는 동안 어린아이는 키가 좀더 자랐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여러 차례 바뀌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다시 돌아왔다. 변하는 것들은 박형서 작가의 산문집 제목 <뺨에 묻은 보석>의 보석처럼 여느 때는 알지 못하다가 덕수궁 돌담처럼 변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 있는 존재를 의식할 때 뺨을 한번 훑어보면 언제 어디서 흘렸는지 없어져 있다. 공연히 애꿎은 빈 볼만 매만질 때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나 환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회한, 그리움, 씁쓸함에 더 가깝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이별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