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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한동안 영화가 없어 난감했는데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도처에 영화가 있다. 영화의 물리적 조건은 점차 고립되고 단절되어 끝내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양한 실천이 이어지고 있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나의 실천에 대해 고백해보았다.
잇고, 흐르고, 새로 쓰이다
다시, 코로나19 시대의 이야기다. 질릴 법도 하지만 이건 이야기책의 문을 여는 ‘옛날 옛적…’이란 문구처럼 당분간 주변을 배회할 것 같다. 변화는 우리의 인지 바깥에서 사고처럼 닥쳐왔고, 사람들은 이제야 당도한 미래에 간신히 적응 중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시대의 스크린 문화, 미학으로서의 영화는 시대의 분기점에서 생존을 위한 여러 가능성을 두드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당면한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공간의 제약이다. 촬영, 상영 등 물질적 조건 이외에도 넓게는 상상력의 창조, 미세하게는 카메라의 위치까지 영화는 공간을 점유하며 운동한다. 하지만 이 운동 과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당
단절의 시대를 잇는 이야기들, <반쪽의 이야기>가 알려준 ‘내가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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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걷는 소년>의 기본 공간 배경은 제주도지만, 주인공인 김수(곽민규)를 중심에 놓고 좀더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크게 세개의 장소, 그러니까 인력사무소, 서핑클럽, 김수의 집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이상향처럼 엄마가 살고 있는 중국, 하이난이 (엽서처럼) 있다. 거친 단순화를 용서한다면 공간적 배경으로만 놓고 볼 때 <파도를 걷는 소년>은 김수가 이 세 장소를 번갈아 헤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주노동자 2세인 김수의 세계엔 원래 두개의 장소밖에 없었다. 엄마가 하이난으로 떠난 후, (혹은 그전부터) 김수는 인력사무소에서 일을 받아 외국인들을 불법이주시키고 취업을 알선해주며 수수료를 받아왔다. 그러다 (자세한 이유는 영화 속에서 설명되진 않지만) 어떤 폭력사건에 휘말렸고, 얼마 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또 다른 장소인 그의 집은 미루어보건대 엄마와 함께 살던 곳인데, 엄마가 떠나간 후 간신히 잠만 자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
'파도를 걷는 소년'을 보고 남은 의구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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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가야 할 때가 있다, 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곤 한다. <사냥의 시간>을 만든 윤성현 감독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피상성의 시대에 남은 허망한 욕망
<사냥의 시간>의 준석(이제훈)과 그 친구들은 대만으로의 탈주를 꿈꾼다. 공교롭게도, <사냥의 시간>의 관람 이전과 이후에 본 영화 속 인물도 비슷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연희(전도연)는 신분을 감춘 채 일본으로의 밀항을 모색하고, 드라마 <인간수업>의 배규리(박주현)는 한국 반대편에 있는 호주로 탈출할 돈을 구하기 위해 부모를 협박한다. 그들이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딘가를 꿈꾸는 것은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냥의 시간>의 대사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지금, 여기’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영화의 인물들은 빈 가방을 돈으로 가득 채운 채 각자의 열차에 올
'사냥의 시간' '인간수업'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속 인물의 선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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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말할 때 자주 발견되는 표현은 ‘사이다 전개’ 그리고 ‘마라맛’이다. 마라맛은 강하고 자극적인 막장의 ‘매운맛’에서 진화해 어딘가 고급스럽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감상을 맛에 비유하기 시작한 것은 말초적인 자극에 익숙해진 요즘의 창작-소비의 형태를 표상한다. 하이라이트 구간을 인터넷 클립이나 밈으로 흡수하기 좋은 상황에서 화제성을 노리는 드라마들은 이 맛의 지표에 의거한 채 폭력과 가학에 둔감해지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하이퍼리얼리즘을 내건 두편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보면서 캐릭터 재현과 폭력 묘사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싶어진 이유다. 여기에 한국 막장 드라마의 필수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들-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적 부의 묘사, 여성을 향한 멸시 등이 버무려지면 사방에서 폭죽처럼 불편함이 터져나온다. 여기저기, 해로운 것을 장르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이 재현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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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코스타의 <비탈리나 바렐라>의 한 장면에서, 남편 요아킴의 부고 소식을 듣고 폰타이냐스로 돌아온 비탈리나는 남편과 함께 살던 낡은 집에 홀로 앉아 말한다. “나는 당신이 죽었든 살았든 믿지 않아. 당신의 시체도, 당신의 묘지도, 관도 나는 볼 수 없었어. 정말 땅속에 묻혀 있긴 한 거야?” 이 말을 읊조리는 비탈리나의 육체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거의 사진처럼 느껴지는 정지된 자세를 유지하며, 간신히 음성을 내뱉고 몸 바깥으로 눈물을 흘려보낸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목소리는 누구에게 전달되는가. 쉽게 생각하면 그녀는 실내 반대편에 위치한 벽과 제단을 쳐다보는 것이고,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뒤늦은 말을 발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확증하지 못한다. 눈동자의 응시는 리버스숏을 담보하지 않고, 음성은 송신될 수 없다. 요아킴의 시체는 물론 묘지도, 관도 보지 못했다는 비탈리나의 말처럼, 영화는 죽은 요아킴에게 접근하거나 그
'비탈리나 바렐라'가 보여주는 대면과 접촉이 불가능해진 자리의 영화 이미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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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은 다르다. 사실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되려면 편집이 필요하다. 박석영의 영화들은 사실적이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예를 들어 <재꽃>(2016)에서 사기를 당한 명호(박명훈)는 분노에 가득 차서 철기(김태희)를 잡겠다고 쇠지레(빠루)를 들고 다닌다. 그런데 명호는 계단에서 쇠지레의 무게와 길이 때문에 쇠지레를 놓치고 쇠지레는 계단을 굴러가고, 명호는 떨어진 쇠지레를 줍는다. 쇠지레를 놓치고 허둥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며, 관객이 명호가 지금 느끼는 분노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게 한다. 연출되지 않은 배우의사실적인 연기를 통해 관객이 영화와 거리두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명호의 사실적인 행동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우며 인위적인가를 느끼게 된다.
<재꽃>에는 자연과 인위의 대립이 있으며, 이는 수직과 수평이미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초원이나 강물과 같은 수평의이미지들 뒤로 풍경을 압도하는 송전탑이나 아파트와 같은 수직의 이미지가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의 전작 '스틸 플라워' '재꽃'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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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분절된 신체와 놀이
<톰보이>를 보면서 루시아 푸엔소의 <XXY>(2007)를 떠올렸다. 주인공 알렉스는 거리에서 음악을 들으면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음악을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과 그 순간과 그때의 음악이 좋아서 한동안 그 장면에서 나오던 음악을 듣고 다녔다. <톰보이>와 셀린 시아마의 다른 영화에도 종종 인물과 내가 같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이후 셀린 시아마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 이전과 다르다. 감독의 전작 <톰보이>(2011)는 9년 전이라면 10살 소녀가 자신 안에서 소년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으로 정리했을 법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일단 ‘정체성’ 이라는 단어부터 걸린다. 소년성과 소녀성은 또래 집단 내에서는 분명히 구분되지만, 로레(조 허란)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로레에게 소년성은 내재한 어떤 것을 부정할 필요없이 존재한다. 이미
'톰보이'와 셀린 시아마의 아이들이 허락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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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중반부엔 뜻밖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나’(에모토 다스쿠)와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소메타니 쇼타)가 청춘의 활기로 스크린을 감전시켜놓는 클럽 신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세 인물은 밤이 되면 한데 모여 취하고 웃고 떠들며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내지만, 낮이 되면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같은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사치코는 저마다의 노동을 한다. 실업 상태인 시즈오는 집안일을 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실은 시즈오의 일상은 단편적으로만 비쳐지기에 우리로서는 그의 일상을 모두 직조해볼 수 없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시즈코의 일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만, 한낮에 시즈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한낮의 시즈오는 어디에 찍힐지 모를 유동하는 점과 같다. 가령 그는 직선으로 뻗은 길 위에서조차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걸어간다. 특히 클럽 신 이후에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미야케 쇼가 담아낸 것과 그것을 위한 시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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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표현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솔직담백한 영화였다. 내겐 <사냥의 시간>이 마치 <구니스>(1985) 같은 10대 소년들의 어드벤처물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것과 보여주는 결과물,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 사이의 격차에 대해 살펴보고자했다. 때로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보다 그 뒤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윤성현 인 원더랜드
“재밌네.” 이 한마디 대사는 <사냥의 시간>의 빛과 그림자, 과장된 평가의 콘트라스트를 선명하게 가르는 핀 포인트 조명이나 다름없다. <사냥의 시간>의 이야기는 대체로 말이 안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안되는 장면은 한(박해수)이 준석(이제훈)을 놓아주는 순간이다. 조직의 해결사이자 윗선의 비호까지 받는 킬러 한은 지하 주차장에서 준석 일행을 몰아붙이고 제압한다. 두명의 친구, 기훈(최우식)과 장호(안재홍)가 기절해 있는 사이 준석은 한과 일대일로 마주한다. 머
많이 모자라지만 참 맑은 친구, '사냥의 시간'의 소년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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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타이거 킹: 무법지대>(이하 <타이거 킹>)는 섬뜩한 정보에서 시작한다. 지구상에는 감금되어 사육되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야생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보다 많다. 미국에서만도 5천 마리에서 1만 마리 사이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사육되고 있는데, 야생 상태의 동물들은 기껏해야 3천 마리가 조금 넘는다. 동물원이 이들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위험하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모도 없는 동물들은 왜 감금되어 있는 걸까? 이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몇년의 시간을 투자해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리고 그건 <타이거 킹>이 올바른 작품이었다면 갔어야 할 길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리즈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이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소재와 주제를 선택할 수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수 없고, 종종 의도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이야기에 휩
'타이거 킹: 무법지대'의 관찰하는 카메라의 윤리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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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계기로 최근 몇년간 소개된 일본영화를 연이어 보면서 이들 영화에서 괜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처음에는 상실과 허무의 시대를 안간힘을 다해 버텨내는 인물에 대한 느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정작 그 시대를 버텨내고 있는 것은 허구의 세계 그 자체였다.
허무와 상실의 세계에서 버텨내는 삶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인물들은 모순적이다. 생동감이 넘치다가도 그 활기의 끝자락에서 씁쓸함이 우리를 덮쳐온다.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세 남녀가 클럽에서 맘껏 노는 장면이다. 특히 여주인공 사치코를 연기하는 ‘이시바시 시즈카’가 클럽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순간은 여느 영화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영화적 쾌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중력을 지웠기에 가능한 생기다. 시즈오(소메타니 쇼타)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 이후 그들은 여전히 어울려 놀지만 그들에게는 그 이전의 자유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일본 청춘영화, 그리고 트라우마적 사건 이후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