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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不義)한 세계에서 박해받는 영웅의 수난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다큐-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다큐-드라마’라 함은 그의 근작들 대다수가 실화 사건에 토대하거나, 심지어 <15시 17분 파리행 열차>(2018)처럼 현실의 인물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스트우드가 그런 이야기의 기저에서 발견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위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좌절 혹은 배반이라는 쓰라린 현실이다. 애틀랜타올림픽 캠페인이 한창이었던 1996년, 센테니얼 공원에서 파이프 폭탄이 담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의 실제 스토리에 기초한 <리차드 쥬얼>(2019)은 이런 경향의 연장에 있다. 공원 벤치 아래에서 의심스러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 리차드 쥬얼(폴 월터 하우저)은 그가 배운 매뉴얼대로 상황을 통제하여 수백명의 목숨을 구한다.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로 구미를 당기는 리차드의 무용담은 TV토크쇼의
<리차드 쥬얼>에서 ‘이스트우드 페르소나’가 초(超)자연적 신화의 힘으로 작동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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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이브>는 무엇보다 캐릭터를 위한 드라마다. 캐릭터를 큐레이션한다는 생각으로 두 캐릭터로부터 떠오르는 인물의 잔상을 붙잡아보았다. 이브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혀 다른 패턴의 살인사건 속에서 빌라넬의 스타일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해보고자 한 거다.
우리 시대 (비)인간의 형상들
좋아할까, 말까. 아니 좋아해도 될까. <킬링 이브>의 빌라넬(조디 코머)은 관객을 고민에 빠뜨린다. 잔혹한 살인광인 그녀를 좋아해도 되는 것일까. 매력적인 캐릭터 스토리라고 방어하며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내가 ‘살인 행위’를 인식한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빌라넬은 조직에서 고용한 암살자고 이것은 장르물이다. 스파이물에서 살인은 장르의 정체성과도 같다. 이때 살해당하는 이들 중 다수가 엑스트라이며, 죽음의 무게는 인물의 비중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잔혹한 살인에 대한 페티시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살인마 잭의 집&
드라마 '킬링 이브', 인간성을 도려내니 인간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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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오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장>을 보기 전에 우연히 포스터를 먼저 보게 됐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기말’이라는 단어를 접한 게 오랜만이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가부장제에 작별’이라는, 20자평에나 등장할 법한 이 단정적인 선언의 무게를 과연 영화가 얼마나 버텨낼 것인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포스터의 저 문구가 일종의 ‘선언’이었다면 영화는 그 선언에 대한 하나의 ‘행동강령’ 처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된다. 여기서 방점은 그 강박적인 ‘오차 없음’ 에 있다.
다섯개의 사연에 너무 짧았던 1박2일
이 ‘강박’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 이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모인 오남매와 큰아버지 내외는 이장 전 마지막 제사를 준비한다. 이장 후 동생의 묘를 제대로 쓰지 않고 화장한다는 결정을 한 조카딸들에게 잔뜩
어느 한 인물도 충분히 말하지 못한 '이장'의 안타까운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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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하우스>의 감독 로버트 에거스의 전작 <더 위치>(2015)는 전세계 호러 팬들에게 극찬을 받은 영화다. 고립된 한 가족의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무섭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공포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고, 그 설명할 수 없음이 무서운 공기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무섭다면 어떤 사건이나 존재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하는 자들이 내뿜는 공기가 무서운 것이며, 그렇기에 무서워하는 자들은 다시 무서운 자들이 된다. <라이트하우스>도 <더 위치>처럼 고립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4주간 섬에서 등대지기를 하는 토마스(윌럼 더포)와 그의 조수 에프라임(로버트 패틴슨)이 고립된 생활을 하는 동안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힌다는 이야기이며, 고립과 광기라는 점에서 <더 위치>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위치>와는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결이 다르다. <더
'라이트하우스'의 흑백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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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영화를 만든다니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22회 공포소설대상을 받은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가 원작이다. <보기왕이 온다>를 먼저 읽었다. 사와무라 이치는 호러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는 마니아였고, 데뷔작인 <보기왕이 온다>에 자신이 좋아하며 무섭다고 생각하는 호러의 요소들을 모두 산뜻하게 담았다. <불량공주 모모코>(2004),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고백>(2010), <갈증>(2014)은 모두 원작이 있었다. 원작의 매력을 살리면서, CF 감독으로 유명한 이력답게 현란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영화를 만들어왔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라는 장르에서 어떤 이미지 그리고 장면을 만들어낼 것인지 궁금했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호러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장르다. 유명한 호러영화의 오싹한 장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영화들과 그 연장에서 살펴본 공포영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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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며 느낀 첫인상은 영화가 ‘예쁘다’는 것이었다. 미추의 개념에서 비롯된 아름답다는 느낌이라기보단 귀여움이라거나 흐뭇함쪽에 가까운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매력적인 주인공 찬실(강말금),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인물들, 그녀가 오가는 여러 장소들, 시네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과 대사들…. 무엇 하나 비뚤어진 것이 없게 느껴질 만큼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엔딩 시퀀스까지 보고 난 후 오프닝을 떠올려보니 새삼 이 영화의 기저에 전혀 다른 정념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실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높은 볼륨의 쇼팽의 <장송 행진곡>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을 포착한다. 그 죽음은 다름 아닌 찬실이 수년간 프로듀서로 일했던 지 감독(서상원)의 죽음이다. 물론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들은 많다. 혹은 이 영화를 하나의 성장 서사로 받아들인다면, 주인공의 기존 세계나 과거를 상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할머니의 집이라는 공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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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워터스>의 스크린에선 카메라가 수평이동하는 경우가 잦다. 유난하다 싶을 정도다. 쓰임새도 다채로워 ‘수평 트래킹의 뷔페’라 일컬어도 됨직하다. 토드 헤인즈의 카메라가 왜 이리 자주 트랙을 타는 걸까. 고다르가 뜻한 것처럼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일 때 소실점은 끊임없이 바뀐다. 삼각대 위에 멈춰 있을 때 한개의 소실점만 갖는 카메라는, 그렇게 트랙 위에서 자신의 숙명을 넘어선다. 1인칭 시점만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시각적 진실. 이동하는 렌즈는 시시각각 초점 대상을 바꾸며 사태의 실체에 다가서려 안간힘이다. 여기까지라면 수평 트래킹에 대한 고전적 정의일 수 있겠다. 토드 헤인즈 감독과 에드워드 래크먼 촬영감독의 횡적 움직임에는 추가되는 것이 있다. 눈앞의 피사체들에 의해 자꾸만 저 먼 곳이 가려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얹어진다. 오프닝숏을 비롯해 숱한 장면들에서, 이동하는 카메라 바로 앞 사물들은 화면을 몽땅 가렸다가 겨우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카메라가 멈춰 있
'다크 워터스'가 보통 사람들의 전쟁을 말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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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엇을 위해, 무슨 자격으로 영화를 감히, 비평하는 것일까. 이 잉여롭고 비생산적인 작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째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다. 때론 몸살에 걸린 듯 온몸이 아팠고 그 진통을 믿으며 글을 끄적여보기도 했지만 한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참을 수 없기에, 쓴다. 감히 영화비평의 최전선에서 뒹굴어보겠다는 무모한 심정으로 김소희·김병규·안시환 평론가와 함께 프런트 라인에 섰다. 재난(disaster)은 그리스어로 ‘별’(aster)이 ‘사라진’(dis) 상태를 뜻한다. 여전히 헤매고, 숱하게 구르고, 끊임없이 실패하겠지만 별을 향한 우리의 방황을 지켜봐주길 바란다.
재난에 얽힌 세 가지 풍경
마음을 다지고 최전선에 섰더니, 영화가 사라졌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외출을 삼가고 있는 요즘 기묘한 사진 몇장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비어버린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광장, 사람이 사라져 물이 맑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영화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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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을 겸업하는 배우들은 대개 스타 출신으로 기억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레드퍼드, 케빈 코스트너, 멜 깁슨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연출해 감독상까지 거머쥔 인물들이다. 21세기 들어 일어난 현상은 다르다. 지금은 감독으로 성공하기 위해 꼭 배우의 이름을 걸 필요가 없는 시대다. 2016년, 17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스포트라이트>와 <문라이트>를 각각 연출한 톰 매카시와 배리 젠킨스는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흥행작쪽으로 오면 연출로 성공한 배우들이 여럿 보인다. <겟 아웃> <어스>의 조던 필,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존 크래신스키, 그리고 <인시디어스3> <업그레이드>의 리 워넬이 그들이다. 모두 배우로서 이름을 각인시키지는 못한 경우다. 워넬은 <쏘우> 시리즈의 각본과 기획에 참여하면서 제임스 완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다 영화사 ‘블룸하우스’의 주력 연출가로 떠올랐
'인비저블맨'의 공포의 근원을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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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존경하는 영화감독과 함께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모든 것을 바쳤던 찬실(강말금)이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주하게 된 현실을 암담하고 비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솔직하고 코믹하게 다룬 영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영화는 별 하나, 별 둘도 아니야! 영화는…”이라는 목소리로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감독과 스탭들이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면서 술 마시는 뒤풀이 장면을 보여준다. 갑자기 감독이 쓰러지고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찬실의 모습에서 제목 타이틀이 뜨면 화면이 옆으로 늘어나면서 4:3의 화면비가 16:9로 바뀐다. 이 오프닝이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마치 비디오테이프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처럼 묵직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시작한 영화가 정작 보여주는 장면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잠시 후 감독이 가슴을 움켜쥐면서 테이블로 쓰러지는 장면
영화를 향한 사랑과 응원의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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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소닉>의 영화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디자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예고편은 일본 게임 디자인과 할리우드 영화 디자인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거의 모범적인 사례였다. 아니, ‘다르다’ 대신 ‘틀렸다’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닉의 새 디자인은 예고편 공개 이후 끔찍한 역풍을 맞았다. 영화사에서는 개봉일을 뒤로 미루고 소닉을 새로 디자인한 뒤 이 캐릭터가 나오는 모든 장면의 CG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이 말도 안되는 일을 한 건 MPC 밴쿠버의 CG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악명 높은 <캣츠>의 CG도 맡았고, <캣츠>의 경우는 개봉 이후에도 수정작업을 해야 했다. 이 두 영화의 작업이 끝난 뒤 회사는 문을 닫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이들이 맞은 잔인한 운명에 마음이 찢어져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고장나지 않은 것은 고치는 게 아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
<수퍼 소닉>이 보여준 게임 원작 영화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