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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은 평판이 좋다. 올해 오스카 작품상을 받았으며, 김영진과 김혜리도 지난호(945호) <씨네21>에 호의적인 글을 썼다. 나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노예 12년>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지만 관습적인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류영화라고 생각한다. 수작 혹은 범작. 서로 견해를 경청하는 평자들 사이에서도 이 정도의 견해 차이가 생기는 일은 드물지 않다.
다만 이 영화는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노예 12년>이라는 영화의 내용은 거의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우리의 자리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 자리는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한편의 영화 앞에서 종종 잊는 종류의 상식에 가깝다. 다소 원론적이고 뻔한
[신 전영객잔] 진실이 고통 이미지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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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에는 두 차례의 인상적인 린치 장면이 나온다. 영화 중반, 원래 자유인이었으나 강제로 납치당해 솔로몬이란 이름 대신 플랫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은 다소 온정적인 주인 포드의 호의를 사면서 그의 마음에 들어 언젠가는 자기 신분을 되찾을 희망을 은근히 품는데, 그의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산산이 찢어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기를 무시하고 농장주의 환심을 샀다고 분노하는 젊은 백인 감독이 플랫을 사적으로 린치하려다 거꾸로 플랫에게 두들겨 맞자 동료 두명을 데리고 와 거대한 나무 기둥에 그를 묶고 죽이려 한다. 그보다 윗자리에 있는 감독관이 재산보호 차원에서 그들의 린치를 막은 뒤 플랫은 주인이 올 때까지 나무에 묶여 있는데 그의 다리는 겨우 진흙땅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거의 반나절 넘게 주인이 올 동안 올가미에 걸린 채로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는 플랫을 카메라는 오랫동안 응시한다. 풀숏으로 지켜보다가 역앵글로 바꿔 플랫을 근접화면으로 보여주
[신 전영객잔] 아프다, 방관자의 이 무기력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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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받아야 한다. 억지를 좀 피우자면 그가 <링컨>의 병사 중 하나로 나왔건 <레미제라블>의 시민 중 하나로 나왔건 상관없이 우리는 그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호프먼은 단지 영화 속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 있는 또 다른 한 세계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2013년 오스카 시상식을 앞두고 각 부문의 수상자를 예측하고 주장하면서 놀이하는 기분으로 썼던 기사의 일부다. 지나치게 명랑한 애정 표현이라도 너그러이 용인될 만한 축제의 자리라고 여겼고, <마스터>의 호프먼이 남우조연상을 받아야 한다고 우기며 그렇게 썼다.
거의 정확히 일년 전 그때에 지금과 같은 글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다. 다시 보니 저 표현은 명랑함보다는 맹랑함쪽에 가깝지만 도로 주워담지는 않을 생각이다. 호프먼의 죽음은 근래에 개인적으로 접한 가장 얼떨떨한 영화사적 사건 중 하나다. 그의 죽음은 피터 오툴의 죽음과 다르다. 그를 할
[신 전영객잔] 그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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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한편의 영화가 휩쓸고 갔다. 소위 1천만 영화가 이제는 1년에 한두편 등장하는 게 예사가 되었지만, 단기간에 전 국민의 5분의 1이 극장에 가서 같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단순한 일은 아니다. 대박 영화들의 운명이 모두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간판이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진다. 또 어떤 영화는 그것이 불러일으킨 집단적 감흥의 다층성이 공동의 의제가 되어 하나의 사회사적 사건으로 남는다. 극소수이지만 어떤 영화는 그것을 본 관객수와 무관하게 의미 있는 영화적 질문을 남기고 혹은 재발견의 과정을 거쳐 오래 되새겨진다.
<변호인>은 어떤 운명의 영화일까. 아마도 두 번째 범주에 가까울 것이다. 비평은 첫 번째 범주의 영화에는 대체로 무관심하며, 세 번째 범주의 영화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 범주의 영화들을 다루는 비평은 대개 그 영화의 사회적 파장을 잊고 텍스트의 미학적 자질에만 몰두한다.
비평이 제일 버거
[신 전영객잔] 그를 전설의 서사로 추어올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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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의 마지막 장면에는 밥 딜런이 나온다.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가 노래하는 가스등 카페에 르윈 데이비스 차례 다음으로 밥 딜런이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때, 르윈 데이비스는 밖에 정장 입은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걸어나간다. 르윈은 걸으면서 밥 딜런의 노래 모습을 본다. 르윈의 시점으로 밥 딜런이 보인다. 그는 “안녕”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밖에 나온 르윈은 전날 그가 무대에 오른 시골 할머니 가수를 실컷 모욕한 것을 복수하러 온 그녀의 남편에게 얻어터진다. 밥 딜런의 노래는 계속 화면에 흐르는데 르윈은 호되게 당하고 거구의 그 남자에게 “우린 빠질 테니 계속 시궁창에 살아라”라는 악담을 듣는다. 남자는 택시를 타고 떠나고 르윈은 프랑스 말로 작별 인사를 한다. 밥 딜런의 노래는 계속 깔린다.
르윈의 자기학대 같은 농담
이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조응하는 장면이다. 감독 코언 형제는 이 마지막 장면의 일부를 첫 장면에 옮겨놓고
[신 전영객잔] 힘을 내서 노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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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려고 산 반지를 저 멀리 바닷가로 던진다. 모든 걸 걸고 함께 도망치기로 약속했던 그녀가 헤어진 애인이 다시 돌아왔다며 남자를 배신한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남자가 운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서 장갑 한짝이 젖은 모래 위로 떨어진다.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는 남자의 착한 애인이 언젠가 준 선물이다. 남자는 눈물을 그치고 장갑을 줍는다. 모래 위에 처박힌 반지상자도 다시 집어든다. 그리고 송년파티가 벌어지고 있을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다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앉은 자리에서 남자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남자의 이 짧은 부재와 돌아옴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의 애인이 해맑은 표정으로 거기 앉아 있다. 남자는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흐느낀다. 둘은 포옹을 하고 남자가 잠시 카메라를, 아니, 우리를 쳐다본다. <투 러버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홀로 견뎌야 했을 감정은 무엇
[신 전영객잔] 필연의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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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는
장률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는 환경과 풍속의 필연적 관계를 고려하여 인물들의 허구를 조성하는 감독이다. 다만 작업의 착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게 필요하겠다. 만약 이방인이라는 주제어가 아니라 다른 것이 주어졌더라면 장률이 다큐 연출에 눈을 돌렸을 가능성은 얼마나 됐을까. 장담할 수 없다. 장률은 이방인이 주제어로 제시되자 평소에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았던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고 그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하므로 극보다는 다큐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니라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최초의 사실이다.
모르기는 해도 장률은 중국에서 온 누군가를 네팔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누군가보다는 훨씬 더 깊고 폭넓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충분한 제작 기간이 주어졌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풍경>의 등장인물 중에서라면 도축업에 종사하는 쉬첸밍과 같은 인물에 전적으로
[신 전영객잔] 풍경, 꿈,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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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의 에필로그 장면은 특이한 여운을 남긴다. 시위를 주동하다 구속된 주인공 송우석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들이 일일이 법정에서 호명된다. 당시 부산 지역 변호사들 가운데 절반 이상 숫자의 변호사들이 변호를 맡았다는 자막이 뜬다. 이 장면은 이상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에 기초했으나 굳이 그걸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전개되는 이 영화는 이 에필로그에 이르러 다시 한번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임을 확인시킨다. 그때까지 송강호의 송우석이었던 주인공에게서 노무현의 그림자가 강하게 얹히는 순간이다.
자연인 노무현을 존경했으나 대통령 노무현의 시대를 늘 불편한 심정으로 지냈던 나는 ‘국가는 곧 국민입니다’라고 울부짖는 영화 속 송우석의 사자후를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노 대통령의 말과 병렬시키기 힘들었다. 그것이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이자 한국 사회의 한계임을 인정해도 속이 쓰리는 건 마찬가지다.
권력을 쥐었으나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그의
[신 전영객잔] 영웅의 일대기에서 멈춰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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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은 장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다. 다섯 번째 극장편인 <두만강>과 <풍경> 사이, 그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평론가 정성일과의 지난 인터뷰(<씨네21> 933호 “안개 속의 풍경”)에서 그가 말했듯,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거주지를 서울로 옮긴 것이다. 그의 지난 영화들을 돌아볼 때, 장률에게 장소의 이동, 변화는 거의 모든 것의 변화다. 그것은 삶의 조건과 태도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과 리듬의 필연적인 변화를 예견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산다는 것. 사건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 그 차이가 <풍경>에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풍경>은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률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는 첫 영화가 될 터였다.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종종 예상치 못한 당혹감과 마주해야 했다.
[신 전영객잔] 장률의 마음이 선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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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확실히 <사이비>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나쁜 인간이 더 나쁜 인간을 응징한다. 물론 이 설정 자체는 새롭지 않다. 좋은 악인(good badman)은 거의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낯익은 캐릭터다. 적지 않은 영화들에서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이 관습적 영웅이 아니라 악인에 의해 추방되어왔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 <추격자>의 엄중호도 이런 좋은 악인의 계보에 속한 인물이다. <사이비>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민철은 거의 최악이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가족을 내팽개치고 몇달 동안 나타나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 수몰지구 보상금과 딸의 저축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는 파렴치한, 항의하는 아내와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무뢰배. 이 구제불능의 사내가 마을 주민의 수몰지구 보상금 전체를 횡령하려는 사이비 종교인/사기꾼과 대결한다. <사이비>의 특별한 점은 민철이라는 악인에게 최소한의 선한 동기
[신 전영객잔] 단단한 서사 속 불완전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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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가 되기란 어렵지만 좋은 시나리오인데도 나쁜 영화가 되기란 쉬운 일이라는, 영화계에서는 얼마간 통용되는 이러한 격언은 시나리오가 결코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시나리오 무용론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나리오가 영화 완성의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공정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는 그 잠정적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루이스 브뉘엘 만년의 중요한 영화들을 함께했으며 그 자신이 대단한 학식과 재담을 갖춘 사람이기도 한 시나리오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그가 막 입문했을 당시 위대한 감독 자크 타티와 그의 편집기사에게서 배운 촌철살인의 교훈 한 가지를 끝내 잊지 못한다고 전하고 있다. 시나리오작가로서 영화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질문하는 타티에게 카리에르가 영화에 대한 추상적인 열정과 사랑만을 열거하자 타티는 편집기사를 시켜 카리에르를 편집실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편집실에서 편집기사가 한손은 시나리오가 적힌 종이를, 또 한손은 필름 릴
[신 전영객잔] 실종된 코맥 매카시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