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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이 비평을 위해 마련된 자리임을 알고 있다. 작품과 거리를 유지하며 분석과 논리를 바탕으로 차분한 글쓰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감흥을 앞서 드러내는 것으로 이 거리를 뭉개려 한다. 그래서 이 지면이 개인적인 감흥에 골몰한, 순진하고 무지한 모양새일지라도 이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라 믿는다.
<우리들>을 보고 아이처럼 신이 났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첨부하여 “강추!”라고 이곳저곳에 문자를 보냈다. 도통 무심하던 이가 여러 통의 문자를 보내는 건 수신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무엇보다 당황한 건 발신자인 나였다. 열성으로 들떠 기분까지 좋아지는 이 ‘신남’, 정말 오랜만이었다. 단명하게 <우리들>이 좋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것만으로 관객으로서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좋다’라는 형용사가 묘연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를 감각하는 다른 단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좋다. 무엇보다 거의
[이미랑의 영화비평] <우리들> 연출가의 눈으로 바라본 ‘섬세함’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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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가씨>는 내가 늘 보고 싶었던 유형의 박찬욱 영화였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이후 박찬욱의 모든 영화는 서사가 비틀리거나 왜곡된 서사의 틈에 자기 스타일을 밀어넣었다. 원작이 있었던 <올드보이>(2003)와 <박쥐>(2009)의 경우에도 서사는 기승전결로 치고 올라가 예측할 수 있는 지점에 만족스럽게 도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영화는 처음부터 뭔가 과잉결정된 지점들이 있어서 클라이맥스로 올라가야 할 곳에서 그것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안티클라이맥스로 방향을 트는 인상을 주는데, 이 방면으로 최고작은 <친절한 금자씨>(2005)다. 이 방식이 내게는 좀 어색했던 영화 <박쥐>에서는 박찬욱의 예술가로서의 초자아가 유희적이고 전복적인 그의 스타일을 결박하고 있어서,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에밀 졸라의 원작을 신부의 존재론적 고뇌와 결합시키려 한
[김영진의 영화비평] <아가씨> 계급과 성차의 대립항을 세우고 부순 박찬욱식 영화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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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부는 바람>(2014)은 <달팽이의 별>(2012)을 찍었던 이승준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는 시청각장애인의 일상을 찍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장애를 통해 인간의 감각에 대해 사유케 한다는 점이고, 셋째는 장애에서 출발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던진다는 점이다.
빛도 소리도 없는 예지의 세계
<달에 부는 바람>은 예지 엄마의 일기를 비추며 시작된다. 일기에는 예지가 무엇을 느끼는지 관찰한 내용들로 빼곡하다. 예지는 시각도 청각도 없이 태어났다. 이제 청소년이 된 예지는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인지할까. 예지의 세계는 어떤 것이며, 엄마는 어떻게 예지와 소통할 수 있을까.
예지는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줄 알고, 혼자 신발을 신을 줄 안다.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다. 헬렌 켈러의 전기영화 <미라클 워커>(1962)나 인도영화 <블랙>(2005)을 보면, 숟가락으로
[황진미의 영화비평] 장애에서 출발한 ‘관계’의 이야기 <달에 부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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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구분 짓는 건 사진적 존재에 근거를 둔 리얼리즘이었다. 그린 것과 찍은 것의 차이, 대상이 카메라 저편에 있고 없음의 구분이 둘 사이 견고한 장벽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컴퓨터그래픽(CG)이 등장한 이래 이 경계는 하루가 다르게 얇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한동안 CG는 그리는 것과 찍는 것 사이 경계를 허물기보다는 완충재 역할에 가까웠다. ‘애니메이션/영화’의 구분이 ‘애니메이션/CG/영화’ 정도로 바뀌었다고 보면 적당할 것이다. 초반에 CG는 어디까지나 그리는 것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사람들의 눈은 사진의 사실성과 CG의 과도한 정교함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소위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고 부르는 낯섦, 머리로 계산하고 그려낸 것의 이질감은 ‘찍은 영화’의 위상을 도리어 견고하게 만들어줬다.
CG가 카메라의 물질성을 절대 따라할 수 없을 것이란 믿음은 한편으론 필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인다. 여기선
[송경원의 영화비평] 첫 번째 CG영화 <정글북>을 체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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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버드로 감독의 <본 투 비 블루>는 전설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생애를 다룬 영화다. 20년 전부터 할리우드에서 늘 소문으로만 돌던 쳇 베이커의 영화가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전기영화 혹은 음악영화라는, 두 가지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느냐로 전기영화를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전기영화란 전기문학과 마찬가지로 기록, 구술 등과 같은 일차 사료를 바탕으로 많은 부분 꾸며낸 이야기다. 자료가 없는 부분은 상상으로 메우고, 사실을 놓고서도 주관적인 해석을 첨가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전기(傳記)이고 전기영화다.
영화 속 이야기와 실제 쳇 베이커의 삶
<본 투 비 블루>는 쳇 베이커의 삶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1966년 마약 소지 혐의로 이탈리아에 수감되어 있는 쳇 베이커(에단 호크)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는 그의 전기영화를 찍으
[황덕호의 영화비평] <본 투 비 블루>에서 기능적으로 소비된 쳇 베이커와 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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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영화의 두축을 나누며 들뢰즈는 두 가지 경향을 소개했다. 이 두 가지 사실주의 도식에 사용한 예시는 서부극이나 희극 등 비교적 극단적인 경우들이지만, 우리는 좀더 최근의 영화들에 이를 대입할 수 있다. 먼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움직임이 포함된 ‘상황의 법칙’이다. 이 경우 영화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윤리를 설명하며, 특정 규칙이 주인공을 압박하는 상황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물은 상황에 의존하고, 그 결과 처음의 상황은 변모하거나 혹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한다. 이를 들뢰즈는 ‘S(상황)-A(행동)-S(상황)’의 도식이라 표현했다. 켄 로치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 이어서 두 번째 사실주의 경향은 행동으로부터 상황이 도출되는 영화들이다. 예를 들어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 그런 경우다. 동일하게 사실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상황을 겨냥하더라도, 켄 로치와 다르덴의 방식은 다르다. 그리고 들뢰즈의 두 번째 도식인 ‘A-S-A’의 구도가 영화를 지배할 때, 상황은 암흑 속에
[이지현의 영화비평] <45년 후>가 보여주는 노부부의 삶에 담긴 역설과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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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풍광은 압도적이다.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칭으로 관광객을 유혹하는 타이항 산맥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겹겹이 싸인 서사의 비밀을 따라가는 재미만큼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감상하는 쾌감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서사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영화의 문을 매혹적으로 열어주었던 그 능선에 아로새겨진 인간들의 가혹한 욕망으로 인해 그 풍경이 더이상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행지로 방문한 곳의 매력이, 생활공간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좀처럼 유지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현재는 ‘오해’를, 플래시백은 ‘이해’를…
이 영화의 서사는 ‘오해’와 ‘이해’의 과정을 반복한다. 아침을 준비하는 홍시아(량예팅)를 남편 라홍(여애뢰)이 침대로 끌어들인다. 거칠게 반항하는 홍시아와 라홍의 관계는 그 이후 라홍이 딸에게 장난을 치는 스스럼없는 태도 때문에 새침한 아내와 터프한 남편의 관계처럼 오해된다. 반면 산 건너편의 애인을 향해 고래고래
[김지미의 영화비평] <산이 울다>, 반전의 트릭과 복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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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이 “지금까지 활자화된 인물 중에 가장 유쾌한” 주인공이라고 믿었다. 두쌍의 연인이 사랑싸움을 하다가 결혼하고 한쌍의 연인이 야반도주를 했다가 결혼하는 것 말고는, 그러니까 세번의 결혼 말고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긴 소설이 200년 동안 인기를 얻고 있는 건 아마도 그녀 덕분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베넷, 시골구석 옹색한 베넷가의 다섯딸들 중에서 두 번째로 아름답고 첫 번째로 영리한 처녀, 하지만 말싸움이라면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도 울고 갈 최강의 싸움꾼. 영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의 감독 버 스티어스는 “<오만과 편견>의 모든 장면은 기본적으로 스파링 매치이고, 모든 대사는 블로와 카운터블로를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당연히 소설과 영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도 그녀 외에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면서 오직 이 특별한 처녀에게 집중한다.
세 가지
[김정원의 영화비평] 평범한 액션영화로 전락해버린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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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곡성>을 본 후 뇌리를 맴돌던 감흥은 그 정도였다. 나홍진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강렬한 에너지가 그 안에 꿈틀대는 것 같았지만 그 이상으로 파고들어 가 의미를 뒤적여보고 싶진 않았다.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그럴 필요가 없는 영화라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걸로 역할을 다한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도 명확해 더이상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다. 또 어떤 영화는 스크린 바깥까지 생명을 연장한다. 이런 영화들은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을 장면 속에 녹여낸다. 같은 장면을 두고도 서로 다른 감흥이 이어져 각자의 해석을 비교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혹은 불가능할) 의미를 언어로 다시 옮겨 담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가 발생하기도 한다. 대개 비평이 사랑하는 건 이 두 번째 범주의 영화들이다. 물론 스크린의 불이 꺼진 후에도 이야기가 이어지는 영화들은 또 있다. 플롯의 정교한 트릭을 활용해 이야
[송경원의 영화비평] <곡성>이 벌이는 그럴듯한 거짓말과 자기기만의 굿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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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관한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부자라고 해도 현금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감독 존 카니의 언급처럼 1980년대 아일랜드는 실업자 천국이었다. 경제가 파탄나면서 가정이 무너졌고, 가정이 무너지자 10대들은 미래를 향한 약속을 아일랜드 아닌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했다. 바로 런던이었다. 영화 <싱 스트리트>는 아일랜드라는 절망 속에서 런던이라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아일랜드 10대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런던을 상징하는 곡은 <Rio>다. 신스 팝/뉴웨이브 밴드 듀란 듀란이 1982년 히트시킨 이 곡은 가족이 함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 뮤직비디오로 나온다. 주지하다시피, 듀란 듀란은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에 이은, 제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첨병과도 같은 밴드였다. 미국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뒀기에 영화에서는 미국에서 활동하느라 직접 출연하지 못해 라이브 연주 대신 뮤직비디오를 방영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이 뮤직비디오
[배순탁의 영화비평] 과거의 향수에 기대어 미래의 희망과 약속 노래한 <싱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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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은 인간의 짐승성을 난폭하고 야만적으로 파헤친다는 점에서 김기덕이나 고 김기영 감독 못지않게 대담하다. 김기덕만큼 단순명료하지 않고 김기영과 달리 인간에 대한 심리적 접근을 꾀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겨우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이지만 조로하는 한국영화계에서 대가 비슷한 대접을 받는 그는 데뷔작 <추격자>(2008)와 이번 영화 <곡성>에서 인간의 짐승성을 두르되 종교적인 외피를 서사에 두르는 작전을 썼다. 종교적 틀을 경유하지 않고 인간의 짐승성을 직선적으로 다뤘던 두 번째 영화 <황해>(2010)는 물론이고 <추격자>에 비해서도 <곡성>은 훨씬 덜 정직하고 너무 멀리 나갔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솔직한 것은 포스터뿐이었다. 미끼를 물되 현혹되지 말라고 권유한 <곡성> 포스터는 나홍진의 속내를 위악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관객이 미끼를 물고 현혹되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동시에 관객이
[김영진의 영화비평] 나홍진이 <곡성>에 장치한 서사적 속임수는 어떻게 관객에게 통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