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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스포일러로 시작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이창동의 영화 <버닝>으로 옮겨왔을 때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이 영화가 하루키보다 오히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 더 닿아 있다고까지 말할 지경이다. 그러니 그 차이를 일일이 나열하는 건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이 영화의 엔딩만큼은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미(전종서)의 방에서 (아마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유아인)를 두고 카메라는 갑자기 줌아웃을 하며 창밖으로 빠져 나온다. 전형적인 영화 엔딩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사실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종수가 두번 서 있던 세면대 앞에서 이번엔 벤(스티븐 연)이 렌즈를 끼고 있다. 영화 내내 종수의 시선 아래 놓였던 벤이었지만 이번엔 (그를 지켜보는) 종수가 없다. 거실에서 여자에게 화장을 해주는 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장면이 바뀌면 해미
<버닝>의 냉정함에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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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 돌아선 적이 없다. 그 속에 추하고 악한 것이 있지는 않을까 미리 걱정하거나 판단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가짜 같다고, 이창동은 여겨왔다.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정말이지 그도 모른다.
이를테면 작가 지망생 종수(유아인)가 쓴 탄원서가 그렇다. 폭행치상 및 공무방해로 법정에 선 아버지의 선처를 위해 “(피고는) 정다운 이웃이었습니다”라고 썼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아는 마을 이장은 탄원서에 서명을 얹으며 말한다. “글 잘 쓰네.”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을 알 수 있는 상자처럼 결론이 정해져 있는 문장을 매끈하게 썼다는 얘기다. 아버지를 미화해서라기보다 결론을 정해놓았다는 점에서 이 탄원서는 가짜다(일단 결론이 정해지면 목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스타일의 저널리스트- 이건 긍정적인 의미다- 가 종수 아버지로 분했다). 종수가 하고 싶은 건 고유성을 지닌 예술인데 말이다. 메타영화로 볼 때 <버닝>은 <박하사탕>(1999)의 형식 실
<버닝>, 관계와 실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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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릭스 포터의 삶을 다룬 <미스 포터>(2007)의 첫 장면.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어떻게 아이를 위한 책을 쓸 수 있느냐”고 출판업자가 묻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꽤나 무례하고도 편견이 가득한 질문임에도, 현실 출판 시장에서는 자기 아이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소박함에서 시작하여 대박난 사례가 많다. <곰돌이 푸>(2011), <토마스와 친구들> 시리즈부터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해리 포터의 성을 베아트릭스 포터에게서 따왔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좋은 부모가 훌륭한 작품을 쓴다는 절대 공식은 없을 터(아마 실패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어쨌든 <피터 래빗> 이야기를 준비할 당시, 베아트릭스 포터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훗날 자신의 조력자였던 윌리엄 힐러스와 결혼을 하기는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자식이 없었다(결혼 후에도 아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릴 적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교사의 아이들이나
천연덕스럽게 실사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피터 래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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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티지>(2006)의 원작자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안 좋아했다. 그는 놀란이 슈퍼히어로영화에 심리적 사실주의를 끌어들인 게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빌딩 위를 뛰어다니는 보디빌더에 대한 이야기라고. 심리학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어?” 그렇긴 하다. 하지만 놀란은 그런 걸 모르는 척하면서 심각하게 배트맨 영화들을 만들었고 그중 두 번째 영화는 걸작이다. <다크 나이트>(2008)의 심각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플레이보이 백만장자가 시장이 되거나 정치가에게 기부를 하는 대신 가면 쓴 자경단이 되어 악당을 처치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잠시 잊게 된다. 부분 부분의 심각함이 워낙 그럴싸하고 전체 그림도 말이 되어 보이고 여기저기 괜찮은 변명이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어떻게 배트모빌이 고담시의 러시아워를 뚫고 아무도 모르게 배트케이브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 건 아니지만.
난 종종 &l
<데드풀2>가 <데드풀>보다 나았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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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드니의 영화는 시작부터 경계, 국경을 다뤘다. 그녀에게 경계는 곧 몸의 다른 말이다. 데뷔작 <초콜렛>(1988)에서 소녀가 보았던 아프리카 원주민 청년의 성기는, 10여년 후에 레니 리펜슈탈이 아프리카로 귀환해 웃으면서 바라보았던 원주민 청년들의 그것과 같으면서 다른 존재다. 드니에게 그건 일종의 이물감 같은 거다. 욕망과 호기심의 대상이면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 하나였다가도 떨어져 나가는 순간 타자로 인식되는 것, 드니의 영화에서 몸은 그런 것이다. 줄곧 몸을 다루어온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일지 고민한 흔적이자 역사다. 그러므로 그녀가 장 뤽 낭시와 마주 앉아 대화하는 여성을 필름에 담은 것은 필연이다. 할 수만 있었다면 드니는 낭시의 저서 <코르푸스>를 한편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낭시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또는 가까워지기를 시도할 때마다 그녀의 영화적 언어는 얼마나 난해한 영토 위를 방황했던가!
<렛 더 선샤인 인>에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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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럼버스>(2017)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콜럼버스의 건물들에 대해서 다소 긴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잡지에 쓰는 글에 건축가 이름을 나열하며 건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지만, <콜럼버스>는 어쩔 수 없는 영화다. 건축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콜럼버스는 미국 현대건축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다. 중서부 농장지역에 위치한 인구 4만명의 이 작은 도시에는,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했다.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콜럼버스에 자리 잡은 엔진 제작 공장의 소유주 J. 어윈 밀러가 만들어낸 독특한 건축 지원 시스템에 있었다. 공공건물을 설계할 때 밀러 재단이 선정한 리스트에서 건축가를 선택하면 설계비 전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에로 사리넨, I. M. 페이, 로버트 벤투리, 리처드 마이어, 시저스 펠리, S.O.M 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건축
<콜럼버스>는 현대건축을 영화에 완벽하게 이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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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성영화시대를 살아가는 로즈(밀리센트 시먼스)와 유성영화시대에 머무는 벤(오크스 페글리). <원더스트럭>(2017)은 두개의 이질적인 세계가 이리저리 교차하다가 마침내 조우하는 여정을 지켜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본 후 나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과연 토드 헤인즈는 그의 영화가 그리는 조우의 순간을 정말로 믿을까. 나는 영화가 두 세계의 조우만큼이나 그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이르러 제시되는 해피엔딩 또한 내게는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두 세계 사이의 간극과 다소 의심스러운 결합. 이 글은 그 미묘한 불일치를 응시하며 시작한다.
판타지를 경유하고서라도 만나고 싶은 세계
로즈와 벤 사이 50년의 시간 차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영화에는 두 인물간의 간극을 환기하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벤이 제이미(제이든 마이클)를 멀찍이서 쫓으며 미국 자연사박물
<원더스트럭>, 토드 헤인즈의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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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와 이동, 과거와 미래, 주저함과 결단. 영화 <콜럼버스>(2017)는 이 사이에서 동요하고 성찰하며 조응하는 두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다. 정적이고 묵상적이다. 영화는 미국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 알려진 지방의 소도시명을 제목으로 삼았다. 인간, 공간, 자연이 어우러져 있지만 인위적 배치를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평범함은 값비싸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저택의 소유자였으며 콜럼버스 모더니즘 건축의 후원자였던 어윈 밀러의 말이다. 영화는 건물과 건물이 자리잡은 공간을 포착해내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진귀한 평범함이라 할 어떠한 정서에 서서히 다가간다.
<콜럼버스>는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코고나다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와 편집까지 담당했다. 코고나다 감독은 <사이트 앤드 사운드>나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등에 영화비평과 예술창작의 일환인 필름 에세이를 게재해왔다. 필름 에세이의 대상은 다양하
<콜럼버스>의 영화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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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못>은 어두운 물속이 조금씩 밝아지고 기타 소리와 함께 물속에서 뭔가 수면 위로 불쑥 튀어오르는 소리가 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의 장면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평온한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들뿐이다. 그러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 희정(이세영)이 오리배를 타러 온 엄마와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오리배에 타는 것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감독은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우리에게 소리만 들려줄 뿐 그 소리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었던 소리의 실체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영화에서 들었던 것(기타 소리, 뭔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소리)의 실체가 우리가 본 것(기타 치는 아저씨)이라고 확신하게 되는가? 지금부터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소리의 실체를 구체화하는지 따라가보려고 한다. 우선 영화의 마지막 장
<수성못>, 반복적인 소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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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더 선샤인 인>(2017)은 여러모로 클레르 드니의 전작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이다. 일단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제목부터 그렇다.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관습적인 도덕률보다는 선악의 모호한 경계를 선호하고, 언어를 통한 이성적 설명보다 육체 위에 드러난 직접적인 감각을 향유하도록 했던 그녀의 작품 세계에 느닷없는 ‘햇살’이라니.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작품을 두고, 마치 클레르 드니가 낸시 마이어스(<인턴> <로맨틱 홀리데이> 연출자)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만든 영화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의 통상적인 장르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버전으로. 이 영화의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낸시 마이어스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로맨스물이겠지만 클레르 드니의 필터를 거치면 로맨스의 달콤한 캐러멜 코팅은 산산조각이 난다. 날것 그대로의 연애 행각이 눈앞에 펼쳐진다. 엇갈린 욕망과 상대를 향한
<렛 더 선샤인 인>이 끌어안는 사랑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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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는 곧 퀴어영화로 호명되며, 영화의 모든 상황과 감정은 성소수자 특수성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퀴어 정체성을 분명히 호명하는 것은 꼭 필요하며, 반대로 섣부른 보편화가 더 위험할 때도 있다. 문제는 그들과 우리의 분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이해의 방향은 늘 우리에게서 그들에게로 향한다는 데 있다.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판타스틱 우먼>(2017)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으나, 관객에게 타자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나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는 나와 타자의 경계를 훌쩍 넘어보도록 관객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있는데, 이는 일단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사라지기 위해 등장하는 남자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자신의 존재성을 호소하지 않고 존재한다. 그녀가 자기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건 의상이다. 그녀는 옅은 화장에 단정한 원피스 혹은 운동화에 바지 차림으로 등장한다. 미디어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외모를 재
트랜스를 하나의 태도로 밀어붙인 <판타스틱 우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