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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제임스 베닝에 관한 다큐멘터리 <더블 플레이>에 인상적인 대화가 등장한다. 링클레이터가 자신의 고향에 세운 시네마테크로 제임스 베닝을 초청해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무엇이 좋은 영화인가를 질문한다. 이에 제임스 베닝은 “나는 좋은 영화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실 좋은 영화는 이미 너무 많다. 난 형식과 문법이 새로운 영화를 더 지지한다. 그런 영화들이야말로 영화 문화의 저변을 넓혀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제임스 베닝의 말에 동의한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영화적 이해이자 정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언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곧 쉽지 않은 곤경이 찾아온다. 어떤 영화에서 새로운 형식과 문법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영화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또 다른 곤경의 순간. 지지하던 감독의 반갑지 않은 변화 혹은 선택을 마주할 때의 당혹스러움이다. 그동안 그
<다운사이징>에서 작아진 것은 주인공의 사이즈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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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한 남자는 부르주아 주부들로부터 사랑받으며 돈을 버는 제비족이 되고 싶었지만, 그가 함께 지내게 되는 사람은 사기를 치며 사는 홈리스다. 친구가 병에 걸리자 두 남자는 차가운 뉴욕을 떠나 따뜻한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친구는 그의 품에서 죽고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았다.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두 남자의 씁쓸한 이야기를 다뤄 X등급 영화로는 처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는 몇해 지나지 않아 낭만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1973)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뉴욕의 제왕이 된 스코시즈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수많은 감독들이 명멸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굿타임>으로 초대된 조시와 베니 사프디 형제가 요즘 스코시즈의 후계자로 뜨겁게 거론되는 중이다. <굿타임>이 스코시즈의 <특근&
<굿타임>, 어김없이 실패하는 ‘현실’과 그래도 모험을 하는 ‘영화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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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는 간결한 제목에서부터 경이로움에 대한 휴머니즘영화임을 부드럽게 폭로하며 시작한다. 헬멧 쓴 장애아동이라는 소재에는 눈물, 감동, 공감의 투사라는 감정적 클리셰가 예견되어 있다. 영화는 뉴욕 중산층 백인으로 구성된 무공해적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얼핏 보아도 판별이 가능한 도덕적 인물들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관객이 감상주의 혹은 할리우드 당의를 입은 가족영화를 기대했다면 이는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월플라워>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의 선택
선천적 얼굴 기형을 지니고 태어난 소년 어기는 지적이고 호의적인 가족들과 함께 살아간다. 10살이 되기까지 총 27번의 수술을 받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자신에게 온통 삶을 헌신한 엄마에게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받아왔지만 그에게도 드디어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영화는 어기가 집 근처 초등학교 5학년으로 입학하게 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안락하고 조
<원더>는 가족영화의 틀 안에서 감상적 클리셰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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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형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는 어느 날 우연히 낡은 사진첩에서 발견한 추억이 담긴 사진처럼 정지된 흑백 화면들로 가득 찬 영화다. 이 영화는 ‘일상’이란 첫 번째 챕터를 시작으로 ‘계획-여행-작별-성탄절’까지 다섯개의 챕터로 나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섯개의 챕터와 프롤로그, 영화 속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 에필로그까지 모두 7장으로 구성된다. 시골(충청남도 금산) 이발사 모금산(기주봉)은 보건소 의사에게 위암 선고를 듣는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에 있는 아들 스데반(오정환)의 여자친구 예원(고원희)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아들과 함께 내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금산은 아내의 15주기인 크리스마스날을 상영일로 결정하고 아들과 그의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주면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자고 한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금산’에 사는 주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흑백 이미지, 중첩된 숏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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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가 1960년에 <혼돈과 창조>라는 제목의 비디오영화를 찍을 당시에, 달리는 자신의 친구였던 자크 라캉으로부터 편집증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그가 정리했던 편집증적 비판방식(paranoiac-critical method)은 초현실주의 창작의 발판이 되는데, <혼돈과 창조>에서도 편집증적 비판방식은 사용된다. 영화에서 달리는 스스로가 그리는 창조와 혼돈의 가운데에 다름 아닌 ‘외향적 유사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때 그가 사용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입’의 형태다. 자신의 콧수염 붙은 입매가 주춧돌이 되어서, 이후 등장하는 몬드리안의 작품이 지닌 자의적인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두 개의 사랑>(2017)의 시작부에도 흡사 달리의 입모양과 같은 자유 연상의 모티브가 등장한다. 언뜻 보아 이가 달린 입술의 형태를 한 신체의 일부분이 (달리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식의) 매치컷을 통해 여성의 ‘눈동
프랑수아 오종이 <두 개의 사랑>에서 보여주는 이미지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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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상은 단조롭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것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일상은 곧잘 ‘죽은 시간’(dead time)으로 취급되면서 스크린에서 지워지기 일쑤다. 한마디로, 일상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만 영화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짐 자무시는 <커피와 담배>(2003) 등에서 죽은 시간만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데 관심을 보이곤 했지만 <패터슨>(2016)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죽은 시간을 ‘생동하는 시간’으로 되살리는 마술을 부린다. 짐 자무시는 영화의 대부분을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고, 출근하고, 일을 하고,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마빈과 함께 산책하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의 일상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 동일한 행동. 그러니까 ‘죽은 시간’의 연쇄. 그럼에도 죽은 시간이 생동하는 시간으로 변모하는 <패터슨>의 마술은 멈출 줄 모른다. 아름답고도 신기한 마술.
죽은 시간 되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패터슨>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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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겐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이하 <라스트 제다이>)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라스트 제다이>를 싫어하는 관객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봐도 완벽한 영화는 아니고, 일부러 <스타워즈> 영화의 친숙한 결을 깨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이 시도는 대담하고 창의적이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이하 <제국의 역습>)을 싫어할 권리가 있다. 특히 1편에서 레아/루크를 파던 팬들은 레아가 한 솔로와 엮일 때 하늘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왜 루크가 아니라 한 솔로인 거야? 레아와 루크는 전편에서 뽀뽀도 했잖아! 게다가 신나는 전쟁 이야기를 보러 왔는데 주인공들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국에 쫓기기만 하고. 그리고 루크가 다스 베이더의 아들이라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리고 그 중간에 끊긴 결말은 도대체 뭐야? 역
다양성을 확대하고 젊은 세대로 넘어가려는 의지 분명한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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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에서 문학적인 것은 영화쪽이요, 이미지가 들끓고 있는 것은 오히려 소설이다.”
앙드레 바쟁은 베르나노스의 일기체 소설을 기반으로 한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극찬하며 이렇게 썼다. 각색자가 소설, 특히 1인칭 화자의 내면 고백을 주로 다룬 작품의 문체를 시나리오화할 때 흔히 택하는 방식은 내면의 외화이다. 이것은 주로 사유의 사건화와 문장의 대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브레송은 원작의 문장들을 대사로 전환하지도, 넘치는 이미지들을 영상화하지 않았다. 바쟁은 브레송이 표면적인 스토리를 흉내내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무미건조한 어조와 절제된 이미지들을 이용해 “이야기나 드라마의 진수에, 가장 엄밀한 미학적 추상화에 도달”하는 것을 의도했다고 평가했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은 여러모로 바쟁의 브레송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원작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짐 자무시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패터슨>, 도시를 부유하는 시상(詩想) 수집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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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전자를 관찰하는 현미경을 생각했다. 아주 작은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파동이 짧은 빛이 필요한데, 파동이 짧은 빛은 에너지가 커서 이 빛(광자)이 전자와 충돌하면 전자는 임의의 방향으로 튕겨나간다. 즉 전자를 정확히 관찰하려 하면 전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전자를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파장이 긴 빛을 쏘게 되면 우리는 정확한 전자의 위치를 관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변화된 전자 혹은 희미한 전자를 관찰할 수밖에 없다. 정확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다.
이 불확정성 원리는 코언 형제의 주요 테마 중 하나다. 코언 형제는 그의 영화 중 <시리어스맨>(2009)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2)에서 불확정성 원리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불확정성 원리는 변호사가 주인공 에드(빌리 밥 손튼)의 무죄를 설파하기 위한 장광설의 주요 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변증법 <세 번째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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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은 멀다. 인간의 뇌가 처리하는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느라 바쁜 초등학교 시절은, 대부분 익숙한 정보만 처리하는 노년의 같은 기간보다 느리다. 마찬가지로 초행길에 들어선 여행자의 시간은 낯선 정보를 인지하고 판단하느라 분주하게 느리다. 시간의 빠르기는 한편으로 우리 뇌가 받는 보상 혹은 스트레스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놀이공원에 간 아이의 하루는 즉각적이고 연속적인 보상을 누리느라 한 시간처럼 지나가지만 시댁을 찾은 며느리의 한 시간은 하루처럼 느리다. 처가에 간 사위의 시간은 그보다는 빨리 흐를 공산이 크다. 그러니 한 지붕 아래 있어도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 마련이다. 목적지에 이르러야만 보상이 주어지는 초행길의 경우 의지와 무관한 새 정보들이 밀려드는 가운데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탓에 멀고 느리다. 요컨대 초행이란, 결과가 불분명한 선택의 연속이 시간을 늘리고 물리적 거리를 변화
<초행>의 선택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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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엔딩이 언급돼 있습니다.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의 바람대로 (콜롬비아에서) 아이를 입양한다. 하지만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아이의 카시트를 사러 가던 아내가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텅 빈 집에 (아직)아버지가 되지 못한/않은 남자와 (양)엄마를 잊지 못하는 아이가 남았다.
설정은 깎은 듯 정확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아버지’ 역할에 서툰 남자 키에틸(크리스토퍼 요너)은 엄마를 잃고 상처받은 소년 다니엘(크리스토페르 베치)을 도닥여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한편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하기에 6살 다니엘은 너무 어리다. 다니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키에틸은 다니엘의 생모를 찾아 아이의 고향 콜롬비아로 향한다. 낯설지만 동시에 낯설 수 없는 콜롬비아에서 다니엘과 키에틸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새로운 부자 관계를 맺은 다음 노르웨이로 돌아온다. 완벽하게 짜인 이 여정에
<나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부성애를 찾아가는 여정이 전부라 할 수 없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