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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편에 달하는 시를 썼지만 생전에는 단 일곱편만 발표한 미국의 19세기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다룬 <조용한 열정>을 보러 가는 길에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피아노 한대가 놓여 행인 중 누구라도 연주할 수 있는, 버스 이외의 차량을 통제해 수많은 버스킹이 ‘안전하게’ 상시적으로 열리는, 어느 슬프게 운명한 시인의 단골 다방이 남아 있는 거리였다. 그런가 하면 종합병원의 장례식장을 지나야 하는 길이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그 건물에 당당하게 자리한 스타벅스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창가 자리에서 누군가들이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면서 일종의 생활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신시아 닉슨)의 삶을 여성, 종교, 가족, 지적 몰두, 도덕과 윤리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 들어가는 영화다. 평생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가 한
<조용한 열정>, 시인이자 여성이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예술적 성장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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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도시 만토바(Mantova)가 유명해진 데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가 한몫했다. 화려한 궁전을 배경으로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며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만토바 공작’을 통해서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들 가운데서도 만토바를 오페라의 주요 배경으로 삼은 데는 도시의 퇴폐적일 정도로 화려한 과거가 돋보이기 때문일 테다. <리골레토>는 16세기 배경의 오페라인데, 당시 만토바의 곤차가(Gonzaga)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더불어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영주였다. 곤차가 집안이 거주하던 ‘공작 궁전’(Palazzo Ducale), ‘테 궁전’(Palazzo Te) 등은 지금도 만토바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말하자면 화려한 오페라의 배경으로 등장한 만토바는 실제로 부와 권력을 가진 패권도시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펼쳐진 광대한 평야 덕분이었다. 포(Po)강 유역에 펼쳐진 끝없는 평야, 곧 파다나(Padana)의 대표
만토바와 베르가모, 포강 유역의 곡창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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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감독이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로마서 8:37>은 번뇌하는 젊은 전도사 기섭(이현호)의 기도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건조한 기도와는 달리, 처절하게 이어지는 클로징의 기도는 직접적이든 혹은 간접적이든 연루된 자의 책임에 집중하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그러나 보다 주목되는 건 기섭의 입에서 발화된 기도가 아니라 기도 뒤에 단정하게 떠오른 활자다. 처음과 끝의 텍스트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 동일하다. 이 문장은 기섭의 기도 이후 암전된 검은 화면 위에 조용히 떠오른다. 문장의 출처이자 영화의 제목이 뒤이어 등장하기에 그저 평범한 타이틀 시퀀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활자로 표현된 성경은 마치 암호처럼 떠오르고 사라지는 동안 잔상을 남겼다. 이제 성경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에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문장이 된다. 처음과 같은 텍스트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통과한 뒤 다시 떠오를 때, 그것은
<로마서 8:37>이 품은 영화적 함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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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봉준호에게 디테일이란 카메라의 객관성을 증언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봉준호가 인물들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관객은 인물과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봉준호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낯설고 이상한 모습까지도 그대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괴물>(2006)에서 강두(송강호)가 손님이 시킨 오징어 다리를 떼먹는 신은 강두가 한치 앞도 못 보는 캐릭터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강두는 보지 못한다. 관객은 본질적으로 보는 자이기에 보지 못하는 자는 관객에게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관객은 보지 못하는 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외부에서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보게 된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여주는 것은 봉준호뿐만이 아니다. 만국노동자들의 에스페란토를 만들고 싶어 했던 채플린의 영화 속 ‘떠돌이’들은 모두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물정에 밝지 못한 ‘떠돌이’들은 자신의 불행을 야기하는 사회적 모순을 보지 못한다. 관객은 이들을 멀리서 보게 되고
<7호실>은 삶의 실재를 무엇으로 환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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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마루에 누워 막대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 빨간 줄무늬 티셔츠와 초록색 고무줄 치마를 입은 채 맨발로 해변을 걷고 싶다. 음악 시간에 배운 합창곡을 소리내어 불러보고 싶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를 보며 우리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 <요시노 이발관>(2003), <카모메 식당>(2006), <안경>(2007),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2012)로 이어져온 영화들이 슬로 라이프 무비, 힐링 내지 치유계 영화라 불려왔던 이유다.
달콤한 환상계에서 비정한 현실계로
5년 만의 신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는 치유계 판타지에서 제법 진지한 리얼리즘쪽으로 감독의 세계가 살짝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사이 <NHK> 드라마 <낭독가게>를 만들기는 했지만 고립된 공간에서 나카하라 주야의 시 낭독을 통해 상실감을 치유해나가는 방식은 전작들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싫어하는 세계를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가 보여주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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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을 그린다. 10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가 꾼 꿈은 ‘사랑하는 빈센트’(Loving Vincent) 반 고흐의 그림 속을 걷는 것이다. 옴니버스 영화인 <꿈>(1990)의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다. 구로사와의 영화 속 분신인 어떤 일본인 화가는 전시장에 걸려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다, 그 그림들 속으로 들어간다. 스크린은 반 고흐의 마지막 정착지인 프랑스 북부 오베르 시절 풍경화로 바뀌고, 화가는 그림 속을 걷는 ‘황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공간인 그림 속에서의 산책은 노감독이 고백하는 죽음에의 명상처럼 비쳤다.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일까? 구로사와는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본다. 풍경화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속, 저 멀리 있는 지평선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을 다시 꾸다
신예감독 도로타 코비엘라와 휴 웰치먼의 애니메이
<러빙 빈센트> 반 고흐를 향한 ‘애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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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감독의 장편영화 <소통과 거짓말> <해피뻐스데이> 두편이 최근 개봉했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의 처지가 흔히 그렇듯 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승원의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묘사들로 화면의 표면을 채워 반도덕의 도발 그 자체로 호소한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 데다, 이런 유형의 충격적인 소재로 작품의 개성을 포장하려는 시도는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는 굳이 이승원의 영화에 접근할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 신청된 이승원의 두번째 장편영화 <해피뻐스데이>를 보고 나는 그의 영화가 섣부른 오해를 사기 쉬운 진정성의 폭탄이며 머지않아 주류 한국영화계에도 상당한 자극을 줄 잠재적 재능의 징표라고 봤다.
개봉 즈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의 건방진 태도를 반성했다. &l
불행에 절실히 접근하는 이승원 감독의 <해피뻐스데이>와 <소통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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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섹스 신으로 화제를 불러모은 이 작품을 앞에 둔 관객이 가장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마도 “왜 이것은 포르노그래피가 아닌가?”일 것이다. 감독은 리허설이나 사전 모의되지 않은, 실제에 가까운 애정행위를 화면에 담았다. 러브 신에서는 액션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3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기도 했다. 전작이 없는 신인배우들이어서 그런지 그들의 정사 신은 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기성배우들이 주는 극적 허구에 대한 안도감이 없기 때문이다. 가스파 노에는 <돌이킬 수 없는>(2002)을 찍기 전 이 영화를 기획했고, 기획안을 듣고 출연 승낙을 했던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는 시나리오를 본 뒤 고사했다. 덕분에 <돌이킬 수 없는>이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됐다. 실제로 연인이었던 그들은 아마도 허구가 실재를 압도할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 과정에서 육체에 투영될 수밖에 없는 실제의 흔적들이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회한이 짙게 깔린 플래시백
가스파 노에가 <러브>에서 도달한 인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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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첫 문단에서부터 <침묵>의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침묵>(2017)에서 가장 민감한 장면에서부터 이 글을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어쩌면 <침묵>은 진실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물의 진심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영화다. 그것이 죽은 유나(이하늬)가 ‘괜찮아’라고 말하는 임태산(최민식)의 판타지가 정지우 감독에게 필요했던 이유다. 장영엽 기자가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씨네21> 1128호 정지우 감독 인터뷰), 이 장면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다시 한번 유린한다고 느껴질 수 있는 ‘윤리적 불편함’이 내재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이 장면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정지우의, 또는 임태산의 진심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아슬아슬한 장면에 설득당한 관객임을 고백해야겠다. 이 글은 내가 설득당한 임태산과 정지우의 진심에 대한 것이다.
침묵을 설득하는 최민식의 마술
결론부터 말하자면, <
<침묵>에서 사실의 조작이 진심을 증명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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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잇 컴스 앳 나잇>(2017)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원제인 ‘It Comes at Night’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기본적인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명쾌하고 으스스하고 우아한 제목이다. 무엇보다 이 제목은 아무런 장애 없이 한국어로 말끔하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수입사에서는 이 간단한 작업을 하지 않고 <잇 컴스 앳 나잇>이라는 괴상한 제목을 붙여버린다. 쉬운 단어라고 해서 한글 표기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comes’는 쉬운 단어지만 ‘컴스’라고 쓰면 어색할 뿐이다. 물론 기억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잠재 관객이 이 영화의 제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못 볼 수 없는 문제인데 어떻게 이 제목으로 극장 개봉까지 온 것일까. 모를 일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잇 컴스 앳 나잇>이라니 이 영화는 십중팔구 호러이거나 스릴러다. 제목만 본다면 호러
호러의 규격을 배반한 <잇 컴스 앳 나잇>이 공포를 야기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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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의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조던 해리슨의 원작 <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마조리(로이스 스미스)는 남편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된 인공지능 월터(존 햄)와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감독은 연극처럼 한정된 공간인 거실에서 주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로 영화를 구성했다. 이 영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의 배’를 떠올리게 한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아테네 사람을 구한 영웅이다. 그는 배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갔고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몇 백년간 그 배를 보존했다. 세월이 흘러 배는 조금씩 훼손되고 사람들은 배를 구성하는 나무판자를 하나씩 새것으로 교체하면서 배를 유지했다. 그렇게 몇 백년이 지난 후 원래의 나무판자가 다 새 나무판자로 교체되었다면 이 배는 테세우스의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인공지능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