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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이유 때문에 김수현의 <우리 손자 베스트>에 흥미를 느꼈다. 첫째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로의 기억 때문이다. 영화의 무대인 낙원상가 근처의 주변 공간과 탑골공원, 그곳을 배회하는 어른들은 내가 10년 넘게 보았던 것들이다. 서울의 중심이라지만 영화의 무대가 되기엔 촌스런 곳이긴 하다. 그곳의 노인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느낀 적은 없지만, 영화 속 교환(구교환)이 무모하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 무리 속으로 들어가본 적은 없다. 이 영화는 용기 있게 그 안으로 성큼 들어간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둘째로, 이 영화가 도발적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영화는 표현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세계의 반응을 불러온다. 모든 장면을 구성하는 데 전략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떤 작가는 구성 대신 이미지에의 반응에 주목하기도 한다. 스캔들과 관객의 추문을 두려워하지 않은 도발적인 영화가 그렇게 나온다. 한국영화에서 이런 경향은 어쩐 일인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기덕이나 임상수의 영화가
[김성욱의 영화비평] <우리 손자 베스트>의 도발적인 유희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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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 영화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신의 재혼 상대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차근차근 흘러간다. 주인공 토마 세르(로맹 뒤리스)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와 관련된 우울증이 원인이 되어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토마에겐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하이든의 소나타를 연주하던 어린 시절의 소년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피아노 연주를 관둔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현재 그는 부동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제임스 토백 감독의 <핑거스>(1978)를 리메이크한 자크 오디아르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2005)은 바로 이 시작점에서 원작과의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레스토랑이나 수영장 등 세부 장면 하나하나를 원작과 동일하게 배치하지만 설정에 차이를 두면서 영화는 스스로의 목표치를 다잡는다. 어머니의 부재와 토마에 대한 현실적 설명이 더해지면서, 원작과 이번 영화의 공통점은 ‘아버지’에 대한 설
[이지현의 영화비평] 무의식의 속박을 극복하는 성장 드라마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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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가 끝나는 순간 마법도 풀린다. 그랬어야 했다. 한데 그토록 열망하던 재즈바 ‘샙스’에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애잔한 실루엣은 꽤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라라랜드>는 좌절된 사랑을 낭만으로 포장한다. 여름밤 폭죽 냄새의 설렘이 묻어나는 말캉한 화면들은 제법 근사해 세바스찬의 씁쓸한 우울감마저 멋들어져 보인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가정법은 완성된 행복보다 오랜 잔영을 남기는 법이다. 과거라는 사막의 신기루가 유독 아름다운 건 우리가 이미 그것이 신기루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 회복할 수 없는 시간과 거리가 확인된 다음에야 상실의 계곡 사이로 멜랑콜리한 감정을 때려 부을 수 있다. 현재진행형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낭만적인 되새김질은 공감과 체험이라기보다는 관람에 가까운 행위다.
아련함에 흠뻑 취해 피아노 선율을 곱씹고 있을 때 흥미로운 해석을 들었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투덜거리며 불만을 이어
[송경원의 영화비평] <라라랜드>, 마법의 이름은 시네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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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지지자는 서사가 촘촘히 짜여 있다고 평하는 반면, 반대자는 서사적 허점들을 끝없이 짚어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틀에서 영화의 논리를 따질 때, <미씽>은 종종 이야기 전개를 위해 상황이나 단서를 작위적으로 배치한 허술한 스릴러, 혹은 전반적으로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평평한 스릴러라는 인상을 남긴다. 반대자들에게는 이런 단점이 배우의 연기나 감정만으로는 메우기 힘든 것이고, 지지자들은 이 영화가 스릴러라는 장르의 틀을 서서히 벗어던지는 순간에 그대로 몸을 맡긴다.
나는 반대쪽 입장에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이 영화를 장르적 리얼리즘이 아닌 다른 방식의 리얼리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일단 환각의 리얼리즘이라 칭해두자. 영화는 실종 당일인 목요일부터 사건이 마무리되는 월요일까지 5일간 하루하루를 손꼽아 세면서 전개된다. 그런데 자막으로 친절하게 제시
[김소희의 영화비평] <미씽: 사라진 여자>와 환각의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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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많은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의 전통은 ‘저항의 영화’, 강력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 이어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수상 소감은 흡사 정치연설에 가까웠다. 심사위원장인 조지 밀러의 발표와 함께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 켄 로치는 “이 상을 받는 게 이상합니다. 우리에게 이 영화의 영감을 준 이들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경제정책이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빈곤과 내핍에 시달리게 되었음을 피력하며 영화예술의 책무가 무엇인지 상기시킨 것이다.
올해로 81살이 된 켄 로치 감독은 지난 2014년에 연출한 <지미스 홀>이 자신의 마지막 극영화라
[정지연의 영화비평] 저항의 멜로드라마 <나, 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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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감독의 <우리 손자 베스트>는 개봉 첫주에 극장을 거의 잡지 못했다. 대기업 멀티플렉스 체인에선 이 영화를 거의 거부했다. 예술독립영화 체인인 CGV아트하우스에선 한개의 스크린도 배정받지 못했다. 듣기로는 그 회사 직원들이 이 영화를 혐오하는 정도가 심해서 얘기도 꺼내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이 상황이 몹시 가슴 아픈데, <우리 손자 베스트>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장편제작 프로젝트인 JCP 세편의 영화 중 한편이고 영화제에서 첫 공개했을 때 반응이 가장 좋았던 작품이며, 이 영화를 본 몇몇 평론가들도 단연 올해의 문제작이라고 칭찬했던 수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지도록 열심히 부추긴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손자 베스트>의 초고 시나리오만 보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JCP 작품으로 선정할 때만 해도 이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후의 후유증을 염려한 사람들이 영화제 내부에서도 다수였다. 영화제에서 대는 1
[김영진의 영화비평] 궁극의 인간긍정 영화 <우리 손자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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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시공(時空)이 있다. 하나는 시간이 정지된 곳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처럼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시간의 정지와 흐름은 각 공간에서만큼은 절대적이다. 동시에 두 시간성은 서로에게 상대적이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시간은 여기서든, 거기서든, 어디서든 흐른다. 다만 그 시간이 다르게 흐를 뿐이다. <가려진 시간>에는 이런 두개의 시공이 존재한다.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전설 속 요괴 알이 깨진 이후, 시공은 두개로 쪼개졌다. 현실 속 시간의 흐름과는 다른, 모든 게 정지된 시공으로 몇몇의 아이들이 건너가버렸다. 그곳에선 이 아이들만이 살아 움직인다. 아이들만 사라졌을 뿐 현실의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흐른다. 이 격심한 시차 때문에 두 시공간은 맞물릴 수가 없다. 그러니 ‘시간이 정지됐다’는 말로는 <가려진 시간>의 한쪽만을 말하는 게 된다. ‘가려진 시간’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생각해봤다. 무엇이 이 두 시공을 가리고 있는 걸까. 그 가림 뒤에는 무
[정지혜의 영화비평] <가려진 시간>, 서늘한 비감과 숨막히는 죽음들 뒤에 가려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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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올해 담임교사에게 당황스러운 말을 자주 듣고 오는데, 그중에는 영화와 관련된 것도 있다. 교사는 “<인천상륙작전>을 봤는데 정말 감동적이고 훌륭한 영화였어요. 여러분도 좀비들이 난리치는 이상한 영화 보지 말고 <인천상륙작전>처럼 좋은 영화를 보도록 해요”라며 목청을 돋웠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엄마들에게 영화를 보여달라 했고, 적잖은 학부모들이 기가 막혀 입이 벌어졌다. 엄마들의 카카오톡 대화방에선 종종 그랬듯 담임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지만 이런 일로 학교에 찾아가지는 못한다. 고작 “선생님도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는 거야”라며 아이를 달래거나, 다양한 교사를 만나는 것도 성장과정의 일부일 거라며 스스로를 달래는 정도다.
걱정되는 건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 여부가 아니라 균형 잡히지 못한 특정인의 세계관이 교실 안에서 정답처럼 전수되는 일이다. 전국의 수많은 교사들 개개인의 소신과 교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송형국의 영화비평] <캡틴 판타스틱>의 독창적인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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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 리얼리즘.’ 이현주 감독의 <연애담>을 본 관객의 한줄평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단어의 올바른 쓰임에 대해 논하기보다 유머를 겸비한 이 단명한 감상평에 탄복할 것이다. 이 관객은 영화를 ‘극사실주의’라는 예술 양식으로 읽은 것이 아니다. 겁나 진짜 같았다는 뜻이다. 겁나 진짜 같아서 공감했다는 속내다. 영화를 상찬할 때 ‘보통의’, ‘일상적’, ‘보편적’ 등의 단어가 관객과 비평 지면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도 위의 감상평과 같은 맥락에서다. 에누리 없이 겁나 진짜 같은 이 영화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지질했던 연애를 떠올리고 공감한다. 이 단단하고 고요한 마음의 움직임을 관객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이유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다. 영화의 장르를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멜로드라마가 우리의 연애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미처 하지 못한, 앞으로 하지 못할,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일탈을 포함한 쾌감을 대리만족시켜주는 데
[이미랑의 영화비평] <연애담>에서 공간이 가지는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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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대신 뜨개질>은 공정여행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에 다니는 세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영화다. 언젠가 어느 극장 대담 자리에서 만난 이 영화의 감독 박소현은 얼마 전 내게 영화를 보내주며 응원이 될 수 있는 멘트를 부탁했다. 나는 간단한 소감을 메일로 감독에게 보내줬고 감독은 사의를 표했지만 자꾸 이 영화의 어떤 영상들이 떠올라 평을 쓰게 됐다.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의 우정, 외부의 충격에 늘 함께하는 건 아니면서도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그들의 우정에 감동받았고 현실적으로는 늘 자기 의지에 반하는 상황을 맞아 패배하는데도 개인들은 굴하지 않고 진화하는 광경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건전한 자극
앞서 세 여자주인공이 나온다고 했지만 이 영화의 인물 배치 방식은 다소 균형이 맞지 않는다. 영화의 주된 축은 여행사에서 국내여행상품을 개발하는 나나라는 주인공이다(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불린다. 회사의 다른 동료, 상사들도 마찬가
[김영진의 영화비평] 길고 넓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의 우정에 관한 <야근 대신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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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동물사전> 영화표는 머글, 아니 노마지들의 마법사 세계 방문증이나 다름없다. 한데 정상적이라면 극장 밖을 나선 후에 발동되어야 마땅한 기억지우기 마법이 웬일인지 조금 더 일찍 시작됐다. 영화 말미 그린델왈드가 변신을 풀고 원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이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것이다. 콜린 파렐이 조니 뎁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관객을 현실로 되돌리는 이 영화 최대의 ‘킥’이다. 특정 배우의 외견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조니 뎁의 경우 콜린 파렐과의 너무 큰 간극과 현실 이미지가 겹쳐 몰입을 파괴하는 정도가 상당히 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CG이고, 반대로 영화의 생기를 앗아가는 것은 실사 배우들이다. 내가 새삼 놀랐던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생생한 CG 캐릭터와 이질적인 실사 배우
CG의 권능에 대해 말하는 건 이제 입이 아플 정도다. 현실이 아닌 필름(=영화)을 모사하기 시작한 그래픽은
[송경원의 영화비평] <신비한 동물사전> 말하는 대로, 보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