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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곡성>(哭聲)은 제목 그대로 ‘소리’에 관한 영화다. 한 인간이 두 귀신을 각각 만나 목소리를 듣는다. 들리는 대로 들었으면 될 텐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게 ‘곡소리’를 낳는다. 구약에 나오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데 사용한 것은 ‘말씀’이다. 물론 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과는 분명 다른 어떤 것이겠으나, ‘그’는 자기 손으로 이것저것들을 직접 세우진 않았을 것 같다(만약 그랬다면 그는 끝없는 육체적 피로를 안고 사는 노동자 계급을 만들지 않았으리라).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말이란 소중하다. 성경, 불경, 코란,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 소중한 책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성자는 오직 말로 마음과 뜻을 전했고, 그의 제자들이 문자와 책으로 그것을 남겼다. <곡성>은 영화를 열기 전 누가복음의 몇 구절을 먼저 전한다. 예수는 자기 살과 뼈를 보고서도 왜 마음에
[이용철의 영화비평] <곡성>의 종구가 저지른 실수는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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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거창하게 시작해보자. 영화가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 말이다. 아무리 상업영화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재현의 정치학과 윤리학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거창한 이슈인 만큼 뛰어난 프랑스 비평가의 사유를 빌려와도 좋을 것 같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가 ‘역사의 귀환’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에서 영화가 프랑스 자신의 역사를 책임지는 문제”에 대해 숙고했었다. 여기서 세르주 다네가 특정했던 ‘프랑스’라는 단어만 빼버린다면, 모든 영화는 그 자신이 속한 나라의 역사에 대한 기록 혹은 상기와 관련해 논해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화두가 진지한 시네필이나 영화학자들만의 것으로 남겨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하기도 했던 아르헨티나 감독 파블로 트라페로의 영화 <클랜>은 매우 과감하고 저돌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현대사의 한 지점을 건드린다. 일명 ‘더러운 전쟁’(1976년부터 19
[정지연의 영화비평] 잔혹한 역사적 사건을 장르적으로 소비한 <클랜> 파블로 트라페로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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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의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을 본 사람들이 아무런 주저없이 동의하는 한 가지는 말순이가 귀엽다는 것이다. 영화 재미의 3분의 1, 유머의 절반은 연기가 처음이라는 아역배우 김하나의 캐릭터 말순이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관객이, 다소 길긴 하지만 긴장감이 그렇게 떨어진다고 할 수 없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실제보다 지루하다고 느낀 이유도 순전히 말순이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신 스틸러란 이런 캐릭터를 보고 나온 말이 아닐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다
귀여운 어린아이를 데려다놓고 관객의 시선을 끄는 건 손쉬운 일처럼 보인다.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캐스팅과 연기지도 그리고 캐릭터를 너무 짜증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게 관리하는 각본이다. 이는 대부분 몰개성적인 영역이다. 적어도 감독과 각본가에게는.
하지만 <탐정 홍길동>에서 말순의 존재는 그렇게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캐릭터 기능성의 명쾌함을 생각하면 이 단순하지 않음
[듀나의 영화비평] 주인공의 성장 담은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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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시얼샤 로넌의 얼굴이다. 그래서 종종 <브루클린>은 시얼샤 로넌의 자화상들을 엮어놓은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유가 아니라 중요한 순간마다 카메라가 시얼샤 로넌의 얼굴을 클로즈업이나 바스트숏으로 비추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성탄절 이민자 모임에서 어느 노인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먹먹하게 이어지는데 이때 존 크롤리 감독은 대사를 아낀 채, 그리움으로 일렁이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의 얼굴에 우리의 시선이 잠시간 머물도록 하는 편을 택한다. 행사가 끝난 뒤 에일리스가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고속촬영으로 천천히 강조되는데 이는 입국심사를 통과한 뒤 그녀가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을 고속촬영했던 것의 변주다. 아이리시 음악, 에일리스의 얼굴, 고속촬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장면은 이민자 모임 이후 그녀가 물리적인 이주의 단계를 넘어 심리적으로 브루클린의 생활에 뿌리내리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브루클린>
[박소미의 영화비평] <브루클린> 각성하고 나니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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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병태와 영철은 웃기만 한다. 한 친구가 얼굴에 왜 함박꽃이 피었냐고 물을 정도다. 그들은 현실을 이겨내려고 바보처럼 웃었던 것 같다. 웃음과 우스갯짓이 인상에 남아서 영화의 결말부를 간혹 잊는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영철(하재영)은 중학교,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졌고 입대 신체검사에서도 떨어진 자신을 불합격 인생으로 여긴다. 그는 고래를 잡겠다며 자전거를 몰고 동해(실제로는 부산)로 간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머물던 고래는 바다에서 안식처를 찾았을까, 아니면 그것은 한낱 청춘의 죽음이었을까? <바보들의 행진>을 보면 볼수록 주제는 거기에서 찾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군부독재 아래 청춘을 보내야 했던 청춘의 얼굴에서, 하길종은 죽음을 발견했다. 이후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만들어진 청춘영화에서 바뀐 건 없다. 영화 속 청춘은 여전히 죽음과 폭력의 주변을 맴돈다. <스물>(2014)이나 &l
[이용철의 영화비평] <수색역>, 운명마저 공간에 얽매인 아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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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픈 펜선이 하늘을 휘감고, 곧이어 등장한 붓선이 천지를 흔든다. 오오네 히토시 감독이 출연하고, 구도 간쿠로가 각본을 쓴 <바쿠만>은 만화를 매개로 청춘과 성장, 노력의 중요성, 그리고 성공까지의 지도를 상세히 그려주는 만화영화다. 2015년 개봉해 일본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수상했는데 눈에 띄는 건 쓰즈키 유지 미술감독이 설계한 선의 세상이다. 영화의 중반부 회심의 만화 <세상은 돈과 지혜>를 그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멋진 클라이맥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 마시로 모리타카(사토 다케루)는 프레임으로 구성된 만화의 3차원을 펜과 붓으로 휘갈긴다. 카메라는 위아래, 좌우를 유연하게 움직이며, 덩달아 펜은 향기를 풍기듯 진한 자국을 남긴다. 만화를 소재로, 원작으로 했기에 당연히 취했을 기법이지만, 영화의 배경을 버리고 만화의 컷으로 장면을 구성한 아이디어는 그럴싸한 효과를 낸다. 외부환경과 캐릭터의 개입 없이 장면이 완성되는 덕에 관객은 영화 스
[정재혁의 영화비평] 만화에서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선명하게 살아난 것 <바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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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까지 정지우가 만든 장편영화 중 최고작이다. 이는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는데,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일부로, 한마디로 공익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는 이 핸디캡을 극복한 것일까.
대부분 정상적인 교양인들은 국가 주도 공익영화에 의심을 갖는다. <배달의 기수>, 문화영화 등등의 시대를 거친 옛 세대는 더욱 그럴 것이다. 공익영화를 주도하는 관료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사고와 이미 그 프로세스를 거친 메시지의 강요이며 이는 대부분 올바른 예술로 이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국가의지에 굴복했거나 정직하지 않거나 생각이 짧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나온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들은 이와는 조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건 여기서 나온 <시선> 시리즈나 <날아라 펭귄> 같은 영화들의 목표가 다른 공익영화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
[듀나의 영화비평] 공익영화의 ‘다른 길’ <4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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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크로닉>은 무시무시한 충돌 이미지로 끝나는 영화다. 결말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크로닉>은 결말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결말의 충격적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곧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팀 로스)의 조깅 장면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끝맺는다. 데이비드를 마주 본 자리에서 그가 다가오는 만큼 후진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난 차에 치여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멈춘다. 그와 함께 관객의 사유 역시 그 순간에 붙박인다. 이것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의 흐름을 일거에 무너뜨린 뒤 결말 그 자체에 모든 것을 수렴시켜버리는 무책임한 마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강렬한 결말이라고 해도 그 강렬함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왜 그런
[김소희의 영화비평] <크로닉>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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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필드 10번지>와 혈연관계라고 제작진이 주장하는 <클로버필드>(2008)는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준 새로운 스타일의 장르영화였다. 주로 저예산 호러나 오컬트영화에 활영되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을 대규모 괴물 SF물에 접목한 시도는 꽤 영리했고 효과적이었던 것. 특히 괴물의 존재를 영화 내내 간접적으로 묘사하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관객이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처리한 순간은, 제작진의 장르영화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나를 포함한 <클로버필드> 팬들은 그 후속편을 열심히 기다렸지만 5년, 7년이 지나도 <클로버필드2>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8년 만에 등장한 <클로버필드 10번지>. 전작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이나 무명배우 캐스팅, 대규모 재난영화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진 예고편은 역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나 존 굿맨 같은 멋진 배우들의 존재, 외부의
[임필성의 영화비평] 장르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는 데 성공한 <클로버필드 1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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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묘사가 있는 글임을 밝힌다.
소녀들이 길을 떠나는 엔딩을 언제나 좋아했다. 그들 앞에 놓인 철길이 불안과 희망으로 설레게 했다. <저주받은 재산>(1966)과 <천국의 나날들>(1978)이 그랬다. 관습에 저항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자들이 죽거나 희생한 길의 끝에서 소녀들만이 미래로 향한다. ‘아비치’의 노래 <날 깨워줘>(2014)의 뮤직비디오에도 길을 떠나는 자매가 나온다. 자매는 보수적인 마을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으며 산다. 동생이 푸념한다. “그들은 우리를 싫어하나봐.” 어느 날, 소녀는 동생을 깨워 떠나자고 말한다. 동생이 묻는다. “어디로?” 소녀는 답한다. “우리가 속한 곳으로.” 그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속한 곳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어쨌든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성인 남자들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살기에 소녀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소녀들은 맞서는 게 맞다. 피가 너무 뜨거워서, 규칙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타
[이용철의 영화비평] 춤추며 살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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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내쉬(앤드루 가필드)는 납득이 안 된다. 데니스는 법원에서 퇴거 명령을 받는다. 평생 살던 집에서 나가라는 통지다. 데니스의 엄마가 작은 가게도 열었던 집이다. 아들이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갔던 집이다. 지금까지 내 집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데니스는 아들의 손을 잡고 법정에 서서 하소연한다. 법은 냉정하다.
어느 날 아침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부동산 브로커 릭 카버(마이클 섀넌)가 찾아온다. 손에는 법원 등기 서류가 들려 있다. 릭의 뒤에는 장전된 총을 찬 보안관이 서 있다. 릭은 데니스 가족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생필품만 챙겨서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한다. 릭은 얄밉게도 예의까지 차린다. “우리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법원의 명령에 따라, 이제 이 집은 은행의 소유입니다.” 데니스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내쫓긴다.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이다.
거두절미하고 전개되는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을 이해하려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신기주의 영화비평] 승자의 나라에서 내 집을 지킨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