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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션>(2015)은 참으로 희한한 작품이다. <마션>의 기이함은 (역설적이게도)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모험극의 정석을 철저히 따르는 ‘평범성’에 있다. 이 작품의 방점은 화성에 홀로 남겨져 살아남고자 온갖 노력과 지혜를 짜내는 마크 월트니(맷 데이먼)의 분투, 그를 살리고자 방책을 강구하는 나머지 대원들과 나사(NASA)의 인력들,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각각 나뉘어 찍혀 있다. <필사의 도전>(1983)이나 <아폴로 13호>(1995),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 등 우주 비행사들의 모험과 역경을 다룬 여러 SF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장르의 컨벤션을 <마션>은 충실히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미션 투 마스>(2002)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캐스트 어웨이>(2000)의 생존담. 우주복과 우주선, 나사의 관제탑은 어김없이 등장하며, 고난과 역
[조재휘의 영화비평] 우주와 맞선 인간의 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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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소수민족 타밀족은 완전독립을 목표로 오랫동안 무력 투쟁해왔다. 그리고 지난 2009년 ‘타밀타이거’라 불리는 반군이 정부에 항복했고, 내전은 끝난 듯 보였다. <디판>의 이야기는 타밀타이거 출신의 전직 군인 디판이 스리랑카 내전에서 패하고, 유럽으로 망명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좀더 쉽게 망명자 권한을 얻기 위해서 그는 ‘가짜 가족’을 만들어낸다. 알지 못하는 여인이 그 여정에 동참하고, 전쟁 탓에 부모를 잃은 소녀가 그들의 딸이 된다. 이윽고 프랑스에 도착해서 세 사람은 파리 외곽의 레지던시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가족 행세를 한다. 그렇게 ‘진짜 행복’을 찾으려는 디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랑스 리얼리즘의 현재
난민을 다루는 많은 다른 영화들처럼, <디판> 역시 자신들의 땅을 떠난 이민자들이 새로운 곳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에서의 첫 모습, 길거리에서 2유로짜리 장난감을 판매하는 주인공의 행색은
[이지현의 영화비평] 그것은 ‘진짜 행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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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시대사랑>이라는 제목은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필름시대’와 ‘사랑’ 사이에 어떤 조사가 들어가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름시대‘의’ 사랑이라면,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그 시절에나 가능했던 사랑 이야기라는 의미가 될 것이고, 필름시대‘를’ 사랑이라고 한다면,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이나 필름으로 찍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률은 그 이상을 원한다. 필름과 사랑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필름시대사랑>이다.
다시 쓰기의 묘기
장률은 서울노인영화제의 개막작 의뢰를 받고 <동행>이라는 단편영화를 연출한다. 하지만 그는 이 단편영화를 다 찍고 난 후에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몇명의 스탭과 함께 <동행>의 공간 중심으로 보충 촬영을 진행한다. 그러니까 <필름시대사랑>은 단편영화 <동행>에
[안시환의 영화비평] 사랑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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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샤츠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에서 서부극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농민들의 생활방식에 말로만 경의를 표한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할리우드 버전의 옛 서부는 역사와 관련이 없듯 농사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 비록 전원적 가치관과는 많은 관련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토미 리 존스의 영화는 서부극들이 지워버린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더 홈즈맨> 속의 서부는 척박한 농토이며, 주인공들은 농부이다. 그들이 사는 곳엔 이상적인 공동체로서의 마을도 없고, 타파해야 할 제도나 부패한 관료 혹은, 타락한 자본가조차 없다. 그들에게 가장 혹독한 적은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이다. 이 작품의 갈등은 ‘선/악’ 같은 인위적인 이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문명이라는 원초적인 대립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 투쟁의 결말에는 전통적인 내러티브가 선사해왔던 영웅적인 승리 대신에 생존과 소멸 같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존재한다.
세 여자가 서부에서 언어를 상실한
[김지미의 영화비평] ‘서부’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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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감각보다 이성을 작동시키는 질문이다. 동기나 결과가 이성보다 감각에 호소하는 것일 때, 왜라는 질문은 설 자리를 잃는다. <맨 온 와이어>(2008)에서 세계무역센터 건물 위를 외줄로 건너는 일에 대해 제기된 ‘왜’라는 질문은 무력하다. 곡예사 필리프 프티는 ‘이유는 없다’는 말로 일단 자신의 행위를 보고, 느낄 것을 호소한다. <맨 온 와이어>는 한계와 아이디어, 기술이 만나 예술이 된 경우다. 한계에 도전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적 본성이다. 한계가 곧 도전의 이유다. <에베레스트>(2015)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답이 등장한다. ‘왜 산에 가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등반가들은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맨 온 와이어>는 주인공의 노력과 줄타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왜 그의 행위에 이유가 필요 없는지를 납득시킨다. 그러나 <에베레스트>는 질문이 빠진 자리에 마땅히 보여줘야 할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상황
[김소희의 영화비평] 영웅도 없이, 스펙터클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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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 낙관인가. 우주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인간이 돌아와 땅을 딛는다(<그래비티>(2013)). 웜홀을 통과해 블랙홀에 뛰어든 사람이 산 것도 모자라 임종을 앞둔 딸과 만난다(<인터스텔라>(2014)). 이번엔 화성에서 조난당해 죽은 줄 알았던 자가 687일 동안 생존해 귀환한다(<마션>(2015)). 두드러지는 트렌드다. ‘과학으로 무장한 지구 귀환 어드벤처’로 뭉뚱그려도 되는 이 흐름은, 2015년 현재 인류의 우주 개척 사업들과 진도만 다를 뿐 같은 궤도에 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세운 우주개발 기업 ‘스페이스X’는 2027년쯤 첫 화성 거주자를 보낸다는 목표로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 중이다. 평생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7만8천여명이 지원했다. 지난 9월 머스크는 TV 토크쇼에 출연해 화성 대기를 생존 가능한 온도로 유지하는 효과 빠른 구상도 내놨다. 화성에다 열핵폭탄을 투하해 기온을 높인 다음 여기서 발생한 복사
[송형국의 영화비평] 좋은 질문을 안고 영화를 유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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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으로 일대 군상극을 벌인 마블 스튜디오는 또 다른 어벤져스 멤버들을 소개하며 전열을 재정비한다. <앤트맨>(2015)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에 간만에 등장한 단독 히어로영화다. 코믹스 원작에서의 앤트맨은 어벤져스 초창기 멤버이자 과학자로 울트론을 창조할 만큼 비중 있는 캐릭터였으니 도리어 영화화가 늦은 편이지만, 영화 버전으로 새롭게 각색된 <앤트맨>은 점차 매너리즘의 징후를 보이는 마블 슈퍼히어로영화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회장 케빈 파이기의 지휘 아래 마블이 2019년까지의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공개한 가운데, <앤트맨>은 앞으로 있을 마블 슈퍼히어로영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점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다.
혼성(hybrid) 장르영화로서의 <앤트맨>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미래형 활극이지만 공교롭게도 <앤트맨>의 바탕에
[조재휘의 영화비평] 끝없이 확장되는 마블의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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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에서 성준(유준상)은 선배 영호(김상중)와 함께 술집 ‘소설’을 세번 방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세번 반복된 사건인지, 아니면 흐트러진 시간 혹은 흐려진 정신이 만들어낸 ‘분신술’인지 영화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 예전(김보경)은 술자리에 매번 늦게 도착해 자신의 부재에 대해 (거의) 똑같이 미안함을 전한다. 성준과 영호도 마치 매번 이곳에 처음 온 것처럼 그런 예전에게 (거의) 똑같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영화가 이렇게 ‘시치미’를 떼기 시작하면 곤란해지는 것은 바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로부터 따돌림받은 우리를 어느 순간 보람(송선미)이 슬쩍 잡는다. 첫 번째 술자리에서 보람은 뒤늦게 가게로 돌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예전에게 웃으며 인사한 뒤, 옆에 있던 영호에게만 지나가듯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거 아니야?”라며 작게 이야기한다. 두 번째엔 좀 노골적으로 예전을 타박하더니, 세 번째에 와서 보람은 화를
[우혜경의 영화비평] 두개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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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의 사극이 연이어 개봉했다. 박흥식은 못다 이룬 이상향에 대한 판타지로 사극을 대했다. 실패한 혁명의 여파에 관한 영화인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은 박흥식이 역사 앞에서 꾼 꿈이며 한편으로는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2007)의 사극 버전이다. 박흥식과 임상수는 혁명을 부르짖었으나 그것이 요원한 것임을 기어이 확인하고 말았던 세대다(둘 사이에 있는 내게 그들의 영화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임상수가 애가를 부를 때, 박흥식은 원수 같은 낭만성에 죽음을 고하기로 한다. 그에겐 그게 협이다.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지도자로 행세하는 시대에 박흥식은 나쁜 아비를 죽이는 딸과 비상한다. 아비는 군사혁명을 빌미로 자신의 권력이 영속하기를 탐한 자였다.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되는 영화였다. 그런 영화에 무협만을 운운한 결과일까, <협녀>는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수모에 가까운 외면을 당했다.
이준익도 한때 칼의 이상향을 그린
[이용철의 영화비평] 그들의 정치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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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도세자의 죽음’은 광기로 인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임오화변이 영조의 성격이상과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빚어진 사건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규정은 1990년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나오면서 흔들린다. 즉 임오화변은 단순한 광기나 부자 갈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이라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한중록>으로 회귀
<사도세자의 고백>을 쓴 이덕일은 <한중록>이 사건 후 수십년이 지나서 쓰인 책이란 점에 주목한다. 임오화변 당시 혜경궁은 사도세자를 적극 구명하지 않았고, 장인 홍봉한은 사위의 죽음을 방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경궁의 가문은 승승장구했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홍봉한이 유배를 당하고, 정조가 죽은 뒤 정순왕후에 의해 몰락하였다. 혜경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행궁으로 옮기
[황진미의 영화비평] 딱 명절 덕담 정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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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시종일관 긴장감으로 충만하다.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가해자들의 증언과 그것을 듣는 피해자 가족의 표정을 주로 포착하는 이 영화는 말들보다는 말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드는 침묵의 행간에 집중한다. 형을 학살로 잃고 형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모를 대신해 가해자들을 찾아가 사과할 것을 침착하게 요구하는 주인공 아디의 표정을 보는 것은 관객인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나는 물론 상식적인 관전자의 입장에서 아디의 편이다. 그러나 아디는 대부분 자신들의 잘못을 부정하는 상대와 부딪치고 때론 협박을 받는다. 과거의 상황이 현재에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데 대해, 정작 아디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관전자들은 두려워하게 된다. 이 소시민적 불안에 대한 근심을 이겨내면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게 <침묵의 시선>의 화면에 긴장을 낳는다.
여기서 가해자인 상대방을 만나 직접 쳐다보거나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촬영한, 가해
[김영진의 영화비평] 흔들리지 않는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