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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는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쓰지 못한다. 아마도 시나리오대로 찍는다면, 그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나리오 대신 다큐멘터리 현장을 이끄는 것은 자료조사, 기다림, 상호신뢰다. <길 위에서> <노무현입니다> <김군>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큐하는 마음>을 쓴 양희 작가는 다큐멘터리 작업이 “함께하기 위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며 책을 시작한다.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순 없어도 지금 함께할 수는 있으니까, 팽목항에서, 밀양의 철탑 아래서, 폭탄이 떨어지는 분쟁지역에서 카메라를 들고 자리를 지킨다. 짧게는 몇달이지만, 많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5년, 10년 동안 하나의 이야기 옆을 지킨다. 그리고 감독과 관객의 마음이 맞아떨어지면, 관객도 함께하겠다는 마음에 동참하게 된다. 다큐하는 힘은 거기에 있다.
<다큐하는 마음>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유통되어 평가받기까지 아홉개의 분야를 택해 그 분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다큐하는 마음>, 함께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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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라인 냅을 읽을 때면 늘 신기하다. 나와 이렇게 (안 좋은 의미에서) 비슷한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신기해하리라는 생각을 하면 아득한 연결감에 즐겁기도 하고 감탄하게도 된다.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캐럴라인 냅과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서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알기 때문에’ 연락을 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그래서 친구가 아닌 사람들보다 머나먼 사이로 지냈을테지. <명랑한 은둔자>는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다.
하지만 또한 많은 것들이 다르다. “나는 중상층 가정에서 자랐고, 사립 중등학교를 다녔고, 아이비리그 대학을 다녔다. 예뻤고, 인기가 좋았고, 성적이 올 에이였고, 학업 우수상을 많이 탔다.” 하지만 캐럴라인 냅은 자신에게 생기는 모든 좋은 일들이 모두 외부적 요인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이거나 행운이거나. “내 마음속에서 나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다.” 캐럴라인 냅은 평균보다 훨씬 뛰어난 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명랑한 은둔자>, 벗어나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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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온화한 인상을 받았을 때, 그 이유를 떠올려보면 그림의 색채, 인물의 미소 띤 표정, 둥근 턱 모양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데즈먼드 모리스는 미술 작품이 관람객에게 어떠한 인상을 남겼다면 거기에 작품 속 인물의 포즈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성을 ‘털 없는 원숭이’로 규정하고 본성과 진화 과정을 분석한 데즈먼드 모리스의 책 <털 없는 원숭이>는 진화생물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이번에는 인간의 포즈를 9가지로 나누어 미술 작품 속 자세들을 설명하고 그 뒤에 숨은 사실들까지 아울러 책으로 묶었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나는 나의 예전 저서 <맨워칭>(1977)에서, 몸짓언어라는 주제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말에만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연구할 때 훨씬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음을 말했다”며 새 책에서는 몸짓에 사회적인 기능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도 참견 영상을 보면 매니
씨네21 추천도서 <포즈의 예술사: 작품 속에 담긴 몸짓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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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탕헤르의 앨리스는 어느 날 아침 집 앞에 찾아온 친구 루시를 보고 흠칫 놀란다. 미국에서 함께 대학을 다녔던 루시,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던 영혼의 단짝 루시와 헤어지고 남편 존을 만나 아프리카까지 떠나왔는데, 루시가 어느 날 앨리스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이다. <탄제린>은 1950년대 모로코를 배경으로 루시, 앨리스 두 여자의 시점이 번갈아 서술된다. 둘 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공통점으로 금세 친해졌지만, 사실 루시와 앨리스가 처한 환경은 다르다. 가난한 장학생인 루시와 달리 앨리스는 신탁 수표가 매달 기숙사로 배달된다. 부모님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앨리스를 그녀의 고모는 미국으로 떠나보냈고 앨리스는 여전히 자기 상태에 대해 갈팡질팡한다. 고모로부터 ‘너는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듣고 자란 앨리스는 타인에 의해 쉽게 휘둘리고 자책한다. 사실 루시가 바라보는 앨리스는 그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출중한 여성이지만 앨리스가 화자가 된 페이지에서 그녀는 자신을 박하게 평가
씨네21 추천도서 <탄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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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와 나는 성장 배경도 다르건만 소설 속에는 내가 펼쳐진다. 이거 내 이야기인가? 내가 겪었던 일인가? <자두>의 화자는 번역 일을 하며 남편과 평화롭게 살고있다. 너무 신사다워 주위에서 로맨스그레이의 헌신이라 불리는 단정한 시아버지가 갑자기 병에 걸리며 그 평화가 깨진다. 염천에 시아버지 간병을 하며 둘은 지쳐가고 병원 소개로 전문 간병인을 고용한다. 간병인 황영옥씨는 출근 첫 날 시아버지의 침상을 둘러보더니 필요한 물품부터 상세하게 적어주며 전문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리고 불면증을 앓고 거동만 불편하던 시아버지에게 섬망이 찾아오고 나는 시아버지와 남편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세계의 진면목에 대해 알게 된다. 황영옥씨는 ‘나와 남편’이 고용한 간병인이다. 우리와 저들로 세계를 나눈다면 ‘나’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세계에 속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건 이후 나를 이해하고 걱정하는 것은 영옥
씨네21 추천도서 <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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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을 읽어도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책이 <어린 왕자>다. 재미있어서, 짧아서, 그림 구경하느라고. MD 상품으로도 만들어지는 <어린 왕자>가 작은 변신을 했다. 민혜숙의 자수가 더해진 <어린 왕자> 자수 그림책이다. 메이크업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유학 갔다가 자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민혜숙은 2년 반 동안 이 책에 실린 자수 작업을 했다. 이경혜 작가는 책의 본문을 그림책에 맞게 썼다. 보아구렁이 그림에, 어린 왕자의 행성을 발견한 터키 학자 이야기에, 어린 왕자가 B612를 떠나 떠돌던 시절 방문한 행성들에, 여우에 멈춰 서 한참을 골몰하게 만든다. 글이 많지도 않은데.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를 연상시키는 비행기 조종사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는 어린 시절 보아구렁이 그림을 그렸는데 어른들은 그림을 보고는 모자라고 한다. 단 한번도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그림을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비행기 불시착으로 사막에 내리게 됐는데,
씨네21 추천도서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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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수사팀을 이끌게 된 카트리네는 경찰을 떠난 해리 홀레에게 조언을 구했다. “살인범을 잡아.”답은 짧았다. 팀의 신뢰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사건을 해결한다고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같은 질문을 하자 이번에도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다 풀려.” 카트리네는 질문을 바꾼다. “다요? 그럼 선배한테는 정확히 어떤 게 풀렸는데요? 순전히 사적인 면에서는요?” 해리의 답은, “아무것도. 하지만 방금 자네가 리더십에 관해 물었잖아”. 이 짧은 문답은 <목마름>의 주인공 해리 홀레를 잘 보여준다. 경찰(이었던) 해리 홀레. 연쇄 살인범을 잡는 데는 끝내주고 오로지 그 능력으로 동료들의 신뢰를 얻었지만 사적인 부분에서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남자. 그랬던 해리 홀레가 달라졌다. 그는 이제 오랜 연인 라켈과 결혼해 안정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경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순조롭다. 그런데 오슬로에서 목에 이상한 상처를 입고 죽은 사람들이
씨네21 추천도서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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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하는 명절은 한국 사회가 맞이한 초유의 경험이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인 이들에게 독서를 권한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나 자신을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멋진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9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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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영화의 성평등 지수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에서 여러 삶을 다루다 보면 이런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것들이 이 시대에 영화 안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 잡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저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배우 겸 감독 문소리)
여성영화인모임이 기획한 인터뷰집 <영화하는 여자들>은 2020년 현역으로 활동하는 여성 영화인들을 고루 인터뷰한 책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로 나누어 인터뷰이를 배분해 1990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 영화산업이 숨가쁘게 성장한 시간을 중계한다. <씨네21> 독자들에게는 수많은 인터뷰 기사들로 친숙할 얼굴을 ‘여성 영화인’이라는 키워드로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1990년대 인터뷰이로는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로 시작해, <씨네21> 전 편집장 안정숙, 영화감독 임순례, 편집감독 박곡지, 영화 마케터 채윤희, 배우 전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영화하는 여자들>, 한국영화계의 능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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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근화의 산문집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는 읽기와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그의 시 <창백한 푸른 점>의 “날 좀 사랑해줄래/ 드문드문 어두운 것도 같지만/ 크게 웃었다가 긴 침묵에 쌓이는 사람들과 함께/ 내가 먼저 아침을 맞이할게/ 널 위해 긴 문장을 썼다가 지웠지만/ 지구의 아들딸들을 위해/ 오늘은 시금치를 삶을게” 같은 언어의 살뜰함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혹은 아직 이근화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유혹적인 책이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쓴 글을 묶었다는데, 여러 작가들의 글을 읽어가는 구성이다. 필연적으로, 책과 읽는 행위에 대한 이근화식 주석이 된다. 이근화가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는 방식은 이렇다. “정치적 인간으로서 이해관계가 연관된 세계에 대해 논할 때 ‘협상 테이블에 사랑을 가져온다면, 직설적으로 말해 나는 그런 행동은 치명적인 짓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비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자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삶을 구제하는 대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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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치즈와 구더기>를 잇는 <밤의 역사>는 미시사 저작물을 꾸준히 발표해온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책으로, 유럽 전 지역에 퍼져 있던 민간신앙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 민속적 기원을 들여다본다.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다른 책들처럼 오랫동안 붙들고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재미있는 <밤의 역사>는 코로나19의 세계에서 읽으며 더 눈길을 끄는 부분들이 있다. 재앙의 시대, 14세기 나병 환자와 관련한 음모론이 나도는 풍경을 보면 특히 그렇다. 나병, 흑사병은 타자를 배척하는 음모론으로 쉽게 진행되곤 했는데, 십자가 모독, 식인 행위, 동물로의 변신, 난교 파티, 주술 비행을 비한 ‘악마의 잔치’라는 음모 이미지는 마녀사냥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된다. <밤의 역사>에서는 인간이 공동체에 포함시키지 않은 인간을 벌해 공동체를 보호하겠다는 신념에 가득 찬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결과 끔찍하게 죽음을 맞는 무수한 여자들
씨네21 추천도서 <밤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