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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 떨어지는 사라사의 책 위로 그늘이 진다. 사라사가 올려다본 곳엔 우산을 든 후미가 서 있다. 얹혀사는 친척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사라사는 후미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한다. 몇 달 뒤 후미는 아동유괴죄로 체포되고, 사라사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시선을 감내하며 성인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사는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다시 후미를 마주한다. <분노>의 이상일 감독이 <유랑의 달>로 돌아왔다. 나기라 유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며, 사랑이나 가족애와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히로세 스즈, 마쓰자카 도리가 주연을 맡고, <기생충> <곡성> <버닝>의 홍경표 촬영감독이 합류하면서 작품에 대한 관객의 궁금증 또한 높아졌다. 불같은 에너지로 작품에 전력을 다하는 이상일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어떻게 합을 맞춰갔을까.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두 감독에게 대화를 청했
JeonjuIFF #5호 [인터뷰] '유랑의 달' 이상일 감독 X 홍경표 촬영감독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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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구하기>
홍다예/한국/2022년/80분/한국경쟁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 바로 자살이다.” 카뮈의 말대로라면 <잠자리 구하기> 속 주엽고등학교는 철학자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이곳의 고3들은 “죽을래”, “자살하고 싶어”, “나 왜 살아?”란 말을 입에 달고 살기 때문. 얼핏 들으면 철없는 입버릇이겠지만 <잠자리 구하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는 쉽사리 넘어가지 못할 묵직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잠자리 구하기>는 홍다예 감독이 2014년 고교 시절부터의 일상을 직접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본인과 가족, 친구들이 대학 입시 전후로 빚는 내외적 갈등들이 가감 없이 재생된다. 여기서 가감 없음이란 단순한 수식이 아니다. 학생의 죽음을 외면하는 학교, 아이처럼 울며 자식과 대화하는 부모, 손목에 가득한 자해의 흔적. 모두가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던 고름들을 <잠자리 구하기>는 집요히 터뜨린다. 대학생만 된다면 모
JeonjuIFF #5호 [추천작] 홍다예 감독, '잠자리 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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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Medusa
아니타 호샤 다 실베이라/브라질/2021년/127분/국제경쟁
가면을 쓴 한 무리의 여성들이 밤길을 걷는 여성에게 집단 린치를 가한다. 음탕하다는 게 폭력 행사의 이유다. 피해 여성은 신 앞에 고결하고 헌신적인 여성이 될 것을 맹세하고서야 이들에게서 벗어났다. 가해의 현장을 촬영한 후 유유히 밤거리를 벗어나는 여성들의 모습은 잔혹하기보다 명랑해서 당혹스럽다. 그녀들의 명랑함은 브라질 사회의 맥락 속에 놓여 있다. 2015년을 전후하여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일부 지역에서는 안티 페미니즘 성향의 혐오범죄가 발생했다. 극단적인 기독교 보수주의에 물든 이들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결집해 특정 소녀들에게 위협을 일삼은 것이다. 가해 집단은 아름답고 순종적이며 순결하지 않은 소녀들 즉, 난잡하다고 낙인찍은 소녀들을 범죄의 표적으로 정했다.
다 실베이라 감독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 가해 주체에 있다. 소녀를 공격한 소녀들. 브라질 사회와 겹쳐놓은 &l
JeonjuIFF #5호 [추천작] 아니타 호샤 다 실베이라 감독, '메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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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가수 코르시니> Corsini sings Blomberg & Maciel
마리아노 지나스/아르헨티나/2021년/100분/월드시네마
2021년 7월9일, 코로나19 팬데믹의 한가운데 독립기념일을 맞이한 아르헨티나에서 영화의 목소리가 시작된다. 13시간에 달하는 극영화 <라 플로르>(2018)를 선보였던 마리아노 지나스 감독이 촬영감독 아구스틴 멘딜라아르수, 가수 파블로 다칼과 고전 LP 《Corsini sings Blomberg & Maciel》를 재녹음하는 현장이 이 다큐멘터리의 몸체다. 탱고 가수 이그나시오 코르시니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재해석하는 과정은 곧 낭만적 가사와 멜로디에 숨겨진 역사의 지층을 파헤치는 작업과 연결된다. 라틴아메리카영화의 독자성을 주지시키는 대담한 문법의 구사자인 마리아노 지나스 감독은 음악과 시대가 결부된 복잡한 태피스트리를 메타 다큐멘터리 형식과도 일치시켰다.
코르시니의 노래 속에 담긴 독재자 후안 마누
JeonjuIFF #5호 [추천작] 마리아노 지나스 감독, '탱고가수 코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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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내한 소식에 깜짝 놀라 전주로 달려온 사람과, “그 사람 잘 몰랐는데 인기가 엄청나다며?”로 시작해 <애프터 양>을 거친 뒤 앞으로 그의 팬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저스틴 H. 민에 관한 분분한 입장은 상이하게 시작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곳은 대체로 강렬한 호기심과 미소 가득한 애호의 자리다. 영화 <콜럼버스>, Apple TV+ 시리즈 <파친코>의 코고나다 감독이 만든 SF 영화 <애프터 양> 속 ‘양’인 저스틴 H. 민을 영화의 거리 언저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엄브렐라 아카데미>의 유령 벤 하그리브스 역할을 통해 빠르게 한국 팬덤을 확보한 그는 SNS를 통해 결집하는 뉴미디어 시대에 스타 탄생의 새 경로가 어떠한지를 몸소 선보인 인물.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2백만명이 넘는 이 스타의 매력은 <엄브렐라 아카데미>에서는 발산의 연기로, <애프터 양&
JeonjuIFF #4호 [인터뷰] 저스틴 H. 민의 기억 장치에 저장된 '애프터 양'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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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힘들었는데, 이렇게 영화관에서 보니까 기분이 좋아요”. 아역배우 김건우가 수줍게 내뱉은 상영 소감이 팬데믹으로 인한 영화제의 침체와 관객들의 갈증을 단숨에 해소해냈다.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한 이창동 감독도 인파가 꽉 들어찬 영화제의 풍경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설렌 관객들의 심장 소리까지 합쳐져 영화관의 북적임을 한껏 채웠다.
전주국제영화제는 특별전 ‘이창동: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을 통해 이창동 감독의 첫 단편영화 <심장소리>를 4월 30일 최초 상영했다. 이어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며 <심장소리>를 비롯한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집중 조명했다. 대면 행사의 전면 정상화를 발표한 전주국제영화제의 야심 찬 기획이었다. <심장소리> 상영 후 주인공 ‘철이’역을 맡은 김건우와 이창동이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과 함께 등장했고, 이창동은 <심장소리>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김건우의 연기에 상찬을 늘어놓았다.
“오늘 상영한
JeonjuIFF #4호 [기획]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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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고고학>
이완민/한국/2022년/168분/한국경쟁
<사랑의 고고학>이 관계가 빚은 마음의 유물을 출토하는 방식은 조심스럽고 면밀하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 영실은 주로 홀로 있다. 혼자 깨어나고 밥을 먹고 일하는 일상이 그에겐 본성과도 같다. 동시에 영실은 우도라는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데, 마음은 아직 과거의 기억에 묶여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로부터 8년 전으로 돌아간 영화는, 영실이 만난 지 8시간 만에 사랑에 빠졌던 남자 인식과의 8년을 둘러본다. 카메라는 어느날 닥쳐온 사랑의 흥분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후로는 독점적 관계가 남기는 은밀한 폭력과 지배의 순간에 훨씬 더 오래 머무른다. 연인에게서 헤픈 여자라는 비난을 받거나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모욕적인 시선을 견뎌야했던 관계는 이별 이후에도 남성의 주도 아래 모종의 만남을 지속하는 기이한 (하지만 그리 드물지도 않은) 형태로 유지되기에 이른다.
타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JeonjuIFF #4호 [추천작] 이완민 감독, '사랑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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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워터> Afterwater
다네 콤렌/독일, 세르비아, 스페인, 한국/2022년/93분/전주시네마프로젝트
도심에서 생물을 연구하던 젊은 남녀 한쌍이 홀연 숲으로 떠난다. 생명의 기원으로 불리는 호수에 몸소 뛰어들기 위해서다. 숲에 도착한 이들은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함께 호수에 서린 이야기를 읊는다. 그러자 영화는 다른 시공간으로 자연스레 시점을 옮긴다. <애프터워터>는 기성의 문자언어나 음성언어, 영화문법, 심지어 비디오 포맷의 통일조차 따르지 않는다. 사건을 중심으로한 서사 구조나 시계열적인 플롯, 인물간의 직접적 대화 및 심리극 역시 없다. 극적 관습들의 고착에서 탈피하며 <애프터워터>는 자유롭되 밀도 있는, 물과 같은 영화로 흘러간다.
여기선 숏의 시청각적, 촉지적 감각이 주인공이다. 개구리, 풀벌레, 송충이 등 온갖 생물에의 집요한 클로즈업. 황홀한 색채와 풍광의 스펙터클이 공존하는 익스트림 롱숏. 발걸음에 스치는 풀과 진흙
JeonjuIFF #4호 [추천작] 다네 콤렌 감독, '애프터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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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 Coma
베르트랑 보넬로/프랑스/2022년/80분/마스터즈
팬데믹으로 소녀는 문 밖을 나설 수 없다. 방 안에 갇힌 그녀는 가상 세계를 통해서나마 세상을 바라보며 숨통을 틔운다. 이때 만난 유튜버 파트리시아 코마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그녀를 꿈의 세계로 인도한다. <코마>는 <포르노그래퍼>로 칸국제영화제 국제비평상을 수상하고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 으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의 신작이다. 코로나19로 물리적 한계가 분명해진 시점에서 시간 예술인 영화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다각도로 살피는 작품이다.
<코마>의 주된 관심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 드는 데 있다. 가령 소녀와 친구들의 온라인 미팅을 빌미로 10대의 내밀한 감정을 진득하게 바라보다가 불현듯 가스파르 윌리엘의 내레이션이 포함된 애니메이션으로 현재를 묘사한다.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하
JeonjuIFF #4호 [추천작]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 '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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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치던 방> 이후 오랜만에 만난 이완민 감독은 몇해 전과 마찬가지로 우선 가방에서 노트부터 꺼냈다. 찬찬히 빈 페이지가 있는 곳까지 종이를 넘긴 감독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갈 때마다 자잘한 글씨와 기호들, 그리고 자유로운 곡선으로 공백을 채워나갔다. “쓰고 그리면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가 이번 영화 <사랑의 고고학>에서 만들어낸 인물 영실(옥자연)도 어쩌면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다. 끈기있는 제토의 과정을 거쳐 땅에 희미하게 새겨진 유구선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작되는 발굴의 예술은 영화 속 인물이 자기 마음을 되찾는 순간과 중첩된다. 그렇게 이완민 감독은 끈기 있고 대담하게, 시간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감옥 바깥으로 발을 딛는다.
- 6년만에 두번째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 얼마 전부터 서점에서 파트타임 근무 중이다. 계산하고 진열하는 단순 업무인데 내게는 꽤 재미있다. 책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여러
JeonjuIFF #3호 [인터뷰] '사랑의 고고학' 이완민 감독, 시간과 사랑의 감옥 바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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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성장통을 경험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오직 자신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성장통도 있다. 성장통을 겪는다는 건 언덕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일 같다. 그런 생각들이 이어져 '비밀의 언덕'이라는 제목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5학년인 명은(문승아)에겐 비밀이 많다. 친구들과 선생님께 ‘아빠는 회사원이고 엄마는 가정주부’라 말했지만 사실 두 분은 함께 젓갈 가게를 운영한다. 가족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자꾸만 교묘한 거짓말로 변모한다. 그런 명은에게 혜진의 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치부를 적어내린 혜진의 솔직한 글이 큰 상을 타면서, 명은은 자신의 거짓말을 되돌아본다. '비밀의 언덕'은 거짓말과 솔직함 중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평가를 유보한 채 양측의 상황을 균형 있게 다루고, 명은이 스스로 성장통을 감내하는 여정을 사려 깊게 바라본다. 명은을 어리다는 편견에 가두지 않는 태도 또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이다.
- 지난 2월 개최된 베를린국
JeonjuIFF #3호 [인터뷰]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성장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