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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소녀와 여인 사이
2001-04-04

<고양이를 부탁해> 촬영현장

▶횟집 골목의 강풍기

바람 앞에 선 소녀들. 한명씩 한명씩 나름의 몸짓으로 바람을 뚫고 나간다. 자기를 붙잡아줄 누군가를 내심 기다리면서. “바람을 느끼란 말이죠?

바람을 좋아하란 말이죠?” 감독의 말을 이해하려 열심이던 비류와 온조는 강한 바람에 그만 넘어졌다.

“어우 야, 얘 앞머리 좀 봐!”

바람 부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돌린 강풍기가 멎자 누군가의 삐친 앞머리에 까르륵 웃음소리가 터지고 다섯 여자애들의 싱싱한 열매 같은 주먹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토닥 때린다. 봄기운이 잠깐 숨죽인 지난 3월27일 인천 월미도의 매서운 바람 속으로 나선, 영화사 마술피리의 창립작품

<고양이를 부탁해> 촬영현장은 영화 찍는 광경인지 소녀들의 발랄한 나들이인지 가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27일 촬영분은 고교 졸업 뒤 다같이

모이기가 어려워진 혜주(이요원), 태희(배두나), 지영(옥지영), 쌍둥이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가 모처럼 함께 나선 나들이 풍경.

아무렇지 않은 듯 입술을 스쳐 흘러나오는 대화 속에 각자의 성격과 미묘한 갈등이 물감처럼 번져 나온다.

<도형일기>로 제2회 여성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던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는, 소녀와 여인 사이, 멜로드라마와 청춘영화의

공간 사이에서 손가락을 입에 물고 맴도는 스무살 여자아이들의 일기 같은 영화. 단편 <둘의 밤>에서 우연히 만난 인천의 풍경에 이끌렸던

정재은 감독은 그의 첫 장편을 다시 이 도시로 데려왔다. 오전 11시경 착수한 이날 촬영은 바닷가에 물이 다 차오른 해질녘에야 끝났다.

배두나, 이요원을 빼면 아직 연기가 낯선 소녀 배우들은 감독이 부르면 통통 달려와 모니터 앞 의자에 겹쳐 앉아 감독의 ‘지도’에 천진하게

수긍하고 대꾸하고 때로는 까불거린다. 리허설은 길었고 바람은 찼지만, 1월부터 얼음 깨며 촬영을 강행해왔다는 스탭들은 “요즘은 반팔 입고

일한다”며 움츠리는 기색이 없었다. 현재 50%가량 촬영을 마친 <고양이를 부탁해>는 봄날을 다 보낸 여름 초입에 기지개를 켠다.

글 김혜리 기자·사진 손홍주 기자

◀일행

중의 깍쟁이 혜주(이요원)는 약속에 늦은 것에 대한 사과도 없이 지영(옥지영)의 염색 머리부터 타박한다. 지영이 읽고 있는 책은 <스완의

집쪽으로>. 황옥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신인배우 옥지영은 극중에서 만화를 그리는 지영이가 되기 위해 펜놀림을 배우고 있다고.

◀영상원 1기 졸업생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 현장에서 가장 자그마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 슛마다 조금씩 다른 연기를 보이는 어린 배우들과 차근차근 대화하며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촬영을 진행했다. 스탭 의자에는 “강아지는 뭐 하나”, “토끼야 미안해” 같은 귀여운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월미도를

지나가는 배의 기적소리와 헬기 소음은 가끔씩 촬영을 지연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