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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부산간다 - 둘쨋날 II
2001-04-06

불멸의 고향, 소년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둘쨋날 II

오후 1시 범일동 일대 | 질주하는 청춘

“…Doctor, doctor

give me the news, I’ve got a bad case of lovin’ you. No pill's gonna cure my ill.

I’ve got a bad case of lovin' you”(<`bad Case of Loving You`>)

치유제 없이 답답하기만 한 청춘이 어디 부산에만 있었으랴. 먼저 내달리기 시작했으나 점점 숨이 차오르는 상택이와

중호를 제치고 준석과 동수가 앞서 내달리는 골목은, 사실 범일동 도로 아래 40m가량의 축대를 배경으로 스쿠터를 이용해 찍은 장면이다. “이

동네는 거의 안 변했다고 봐야죠. 커서 자주 온 적은 없어도 누구나 한번쯤은 이곳을 거쳐갔을 깁니다. 제 기억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지요. 정확히는

태화가 놀던 동넵니다.” 축대를 빠져나와 왼쪽으로 몸을 비틀면 철길 위 육교가 나온다. 오른편의 무명천은 철길 아래로 흐르니 기차는 물 위를

달리기도 하는 셈이다. 육교 위에서 “부산 목욕탕은 왜 그리 높다란 굴뚝을 세워놓는지 모르겠다”면서 곽 감독이 촬영 당시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를

꺼내든다. “웬 할메가 장동건이를 보더니 반갑다면서 막 아는 척을 하더라고, 그라더만 하는 말이 ‘아이고, 유동근이도 왔네’.”

겨우 한나절이 지난 것뿐이지만 어제의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와 다르게 감독과 3명의 기자일행은 거의 끊이지 않는 대화의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돌아볼 곳이 아직 많이 남았으므로 점심을 빨리 먹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돼, 뭐 나올 게 있다고 그렇게

소독차를 따라다녔지?” 하는 질문에 “딴 세상 같잖아”, “하늘나라에 온 기분이지”, “뭐, 그때는 그만한 이벤트가 없었으니까” 하는 대답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천지 모르는’ 아이들이 소독차 뿌연 연기를 사탕이나 초콜릿처럼 쫓던 골목길. 엉덩이 깐 손주녀석을 ‘다라이’에 넣고 목욕시키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마디와 행여 소독차 연기가 들어올까 문을 닫는 2층집 아저씨의 무심한 표정이 지나고 나면, 앞 못 보는 연기를 틈타 절도행각을 펼치는 아이들의

재빠른 손놀림이 이어진다. 준석의 아버지로 출연했던 주현씨가 “야, 저때 우리 진짜 도둑질 많이 했다”며 공소시효 지난 범죄사실을 고백했다는

타이틀 시퀀스에서 범일동 굴다리는 꽤나 많은 컷을 허용했다. 진시장에서 부산진역으로 내려오는 고가도로 옆으로 난 첫 번째 계단으로 내려가면

담쟁이 덩굴이 자랐던 흔적이 남아 있는 꽤나 멋스런 굴다리가 있다. “옛날 간지(느낌) 낸다고 보육원 아이들을 출연시켰어요. 타이틀 시퀀스는

여러 군데서 나눠서 찍었는데 이틀 동안 소독약 냄새 맡으며 계속 뛰니까 나중에는 아이들이 기진맥진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미안해 죽겠어요.”

굴다리를 지나, 소독차를 따라, 아이들이 달려간 곳은 범천동 안창마을. 꽃동네라고도 불리는 이곳 고지대는 영세민 거주집단이다. 사는 모양새가

남루하기에 서울 봉천동 산동네와 비슷한 이 마을은 70, 8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바람을 막기에도 역부족인 판자들을

꼼꼼히 이어서 울타리를 쳐놓은 곳이 눈에 곧잘 띄지만, 그런 풍경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내는 이곳 사람들만의 방식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주인이 곽 감독의 팬이라며 절대 돈을 받지 않는다는 마을 꼭대기 주차장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왼편에 아이들이 소독차를 따라 나서는 장면 중 나오는

조그만 다리가 나온다.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음식점들에서 내놓는 쓰레기 뭉치들이 조그만 다리의 반쪽을 점령하고 있는데다, 거기서 풍겨나오는

악취들로 사방이 진동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 없다. 만개한 꽃으로 뒤덮인 정원은 아니더라도, 안창마을이 꽃동네로

불리는 이유다.

안창마을에서 내려오는 길 왼쪽으로 부산고등학교가 스쳐지나갔다. “아부지 뭐하시노”하고 묻는 선생에게 “건달입니더”라고 사실을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좋겠다! 느그 아부지 건달이라 좋겠다”는 말과 함께 개 맞듯이 맞은 준석은 “누가 좋타캣심니꺼”라며 벌컥 화를 내고 교실을 박차고 나온다.

“학교마다 이상한 선생들 진짜 많지요. 영화에 나온 야비한 선생 모델이 ‘개뼉따구’란 선생이었는데 꼭 고무밴드 두개를 뭉쳐서 코를 때렸는데,

와! 진짜 생각만 해도 아프네. 이런 선생들은 주로 말가지고 늘어지는 것도 장난이 아이지. 하루는 시험치고 났더니만 선생이 ‘어이, 곽경택이!

요번에 모의고사 잘 쳤나?’ 하고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아니요, 요번에는 못 쳤는데요’ 했더니만 ‘요번에는 못 쳐? 언제는 잘 칫드나’ 하고

무안만 주고 가대요. 학교 앞에 오니 밸 생각이 다 나내. 우리 학교 앞에서는 도저히 신분을 알 수 없는 미모의 딸래미 둘이 라면을 팔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순진한 고등학생이란 약점을 이용해 장사를 해묵은 것 같아요. 선배들은 ‘니가 봐도 예쁘재’, ‘저 남자 애인이 조직 보스란다’

뭐 이런 말도 마니 했었지요, 참, 그 딸래미들 지금은 뭐 하겠노….”

오후 4시 용두산공원 | 공원 언덕길

“상택아, 다음에도 아 새끼들 팰 일 있으믄 확실하게 조지아 된다이. 다음에 눈만

마주치도 오줌을 찔끔 싸게끔 만들어나야 되는기라. 아예 용서해주고 같은편으로 만들든가, 아니믄 차라리 빙신을 만들어삐라. 그래야 뒤탈이 없다.”

“좋다. 앞으로 누구 팰 일 있으면 그래 하께. 그라믄 니도 내 부탁

하나 들어도.” “...뭔데?”

생존법칙을 이미 몸 속 깊이 배워버린 준석에게 상택이 부탁한 것은 다시 교복을 입고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던 준석의 반항어린 눈매는 ‘친구’라는 부름 앞에 여지없이 부드러운 형상으로 바뀌고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교실로 향했다. 이 긴

말 필요없는 ‘싸나이’들의 대화는 용두산공원 언덕길에서 이루어졌다. 부산 어디에서도 보인다는 부산타워(용두산타워)가 우뚝 서 있고 꽃으로 만든

대형 시계가 한가로이 누워 있는 용두산공원은 세상의 비둘기란 비둘기는 죄다 모이는 곳 같다. 중호(정운택)가 자위하다 이모에게 들킨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풀어내던 곳은 타워를 에워싼 팔각으로 생긴 난간. 곽 감독은 비둘기 모이로 줄 새우깡을 ‘오독오독’ 씹으며 엉뚱한 헌팅 이유를 풀어놓는다.

“저기서 왜 찍었냐면요…, 저기는 아무나 못 올라가거든요. 사무실 통해야 올라가지. 그래서 어릴 적부터 저 위에 한번 올라가는 게 소원이었어요.”

벚꽃에 목련까지, 봄이 되면 온갖 다채로운 꽃들이 향기를 뿜어내는 곳. 서울의 탑골공원처럼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기도 두고, 한쪽은 음악을

틀어놓고 자기 흥에 겨운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 뒤로 대학 신입생처럼 보이는 무리들은 빙 둘러앉아 80년대식 수건돌리기를 하더니 벌칙인지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업고 공원을 뛰어다닌다.

오후 4시30분 국제시장 | 카드 사러 나온 상택과 준석

“상택아…, 우리 약속 하나만 하자, 내는 배운 기 깡패질이니까, 니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정말이지 직이삐고 싶은 놈이 있스믄 내한테 딱 한놈만 말해라. 내가 직이주께. 그라고 니는 나중에 내가 늙어가지고 건달짓 못하게 돼서 니 찾아가믄

그때, 개인택시 한대만 빼줄래?” “개인택시?”

오랜만에 찾아온 “엘리트 대학생” 친구의 파카를 빌려입고 준석은, 마약금단현상으로 쾡한 눈을 불안하게 움직이며, “성질 더러븐 영감 수발하다

죽어간 어무니”에게 보낼 크리스마스카드를 사러 가자며 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용두산공원에서 자갈치쪽으로 향하는 길에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되는 국제시장에는 도로를 따라 각종 학용품 및 사무용품을 파는 문구사들이 쭉 늘어져 있다. “아까운 장면이에요. 조금 더 넓혀갈 수도 있었는데,

엑스트라들의 헤어나 분장까지도 80년대에 맞춰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데….”

부산고등학교에서 시작해 범일동 철길육교로 삼일극장을 향해 질주하던 뮤직비디오 시퀀스의 가운데 토막은 자갈치시장 건어물상회 옆이다. 자갈치를

‘갈치’의 사촌쯤 되는 생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지만, 자갈치는 본디 충무동쪽 보수천(寶水川) 하구 일대가 자갈투성이였던 자리를 말한다.

힘좋은 바다장어 머리를 못에 ‘꽉’ 찍고 한번에 쓰윽 껍질을 벗겨낸 뒤 철판에 구워주는 부산 특유의 장어구이가 풍기는 냄새가 연신 일행의 출출한

배를 자극하고 있었다.

▶`친구`

따라 부산간다

▶`친구`

따라 부산간다 - 첫쨋날

▶`친구`

따라 부산간다 - 둘쨋날 I

▶`친구`

따라 부산간다 - 둘쨋날 III

▶`친구`

따라 부산간다 - 셋쨋날

▶<친구>

배우 이재용이 본 ‘부산’

▶<친구>

촬영감독 황기석이 본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