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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2]
사진 이혜정최수임 2001-04-20

<봄산에>의 이지행 인터뷰

“영화를 통해 인간으로 태어난다”

5년 전 스팅콘서트를 보고나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하고 2년 전 어머니와 무등산을 오르면서 <봄산에>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이지행(27)씨. 당선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하러 온 그의 손에는 <씨네21>에 실으려는 <봄산에>의 배우모집 광고문안이 들려 있었다. 이지행씨는 미국 LA의 칼아츠 영화연출 대학원을 휴학중인 예민하고 욕심 많은 영화학도. 지난해 한해 동안 ‘시네클릭 아시아’에 소속되어 우리 영화의 해외배급과 영화제 코디네이터로 일하기도 한 그는, 하룻밤 만에 써버렸다는, 어머니와 딸이 봄산을 오르며 시작하는 시나리오 <봄산에>를 앞에 놓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봄산에>는 어떻게 구상했나.

=유학 중 방학 때 집에 오면 엄마는 늘 새벽마다 날 깨워서 무등산에 데려가곤 했다. 잠도 덜 깬 채 산을 오르다 어느 날 한번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 무덤을 봤다. 섬뜩했다. 거기까지 시신을 가져다 묻은 친구나 가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엄마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99년 여름의 일이다.

-영화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생물학과를 나온 나는 케이블TV의 교육채널에서 1년 반 동안 PD로 일하고 있었다. 가을, 20만원이나 들여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스팅의 공연을 로열박스에 앉아 봤다. 그날은 스팅의 45회 생일이었다. 공연 뒤 한달간 난 심한 자폐증을 앓았다. 왜였을까. 나는 스팅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 내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 우리 세대는 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나. 나도 영화를 좋아했고, 무엇보다 영화연출은 내가 가장 ‘못’ 할 것 같은 분야라 영화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속된 말로 ‘뺑이 치고’나면 내가 뭔가 잘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봄산에>는 실제 경험이 반영된 시나리오인가.

=그렇다. 전부 픽션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아니라고들 하지만 모든 딸들은 죽도록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신학박사에다가 평생 학위컬렉터인 나의 아버지는 너무 박식하고 유식해 내 목소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26살 유학가기 전까지는 그런 것에 무지하게 상처받았다. 그런데 부잣집 딸도 아닌 내가 한 학기에 1천만원씩 학비가 드는 유학을 가서 고생하고 있으니, 부모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더라. <봄산에>에서 모녀는 아버지의 관을 나르는 일을 하며 갈등을 풀어낸다.

-칼아츠에서는 무엇을 배웠나.

=철학을 배웠다. 기술은 거의 못 배웠다. 코닥 면접 때 “영화감독은 망상을 하는 사람이다. 리얼리티를 살리는 것은 스탭”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나는 기술적인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다. 칼아츠는 실험영화를 장려하는 학교다. 지도교수였던 톰 앤더슨은 내게 “잘 아는 것만 찍어라”라고 말했다. 솔직해져가는 것이랄까, 담담한 마음을 배운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프로덕션의 질을 좀 높이고 싶다. 그래서 이 지원에도 응모했다.

-면접 때 받은 질문.

=시나리오가 재미는 있는데 막상 촬영할 때 힘들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다. 사실 이 영화는 현실적인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없다. 여자 둘이서는 관을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적 공간이라는 말이 맞다. 나는 이 이야기가 영화적인 것임을 관객에게 인식시키면서 동시에 이야기 속에 몰입하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 방안이 무엇이냐고 묻더라. ‘모녀의 악전고투’. 다큐멘터리를 찍듯 모녀의 악전고투를 그대로 그려 관객을 끌어들이겠다고 말했다.

-왜 휴학하고 일을 했나, 무엇을 얻었나.

=영화 만들 비용이 필요해서, 그리고 사실은 향수병에 걸렸기 때문에. 좋았던 것은 칸, 베를린, 테살로니케, 유바리 등 해외영화제를 많이 돌아다니면서 영화를 많이 보았던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들을 만나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갈증을 강하게 느껴 좋았다.

-앞으로의 계획.

=5월 말에 시작해 6월 초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봄산에>를 끝내고, 그리고 가을학기에 복학을 할 거다. 내년 1월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단편 작업을 계속하면서 충무로 연출부에서도 일하려 한다. 허진호, 이창동, 김영 감독 밑에서 일하고 싶다.

시놉시스

봄날, 인적 없는 산길을 모녀가 오른다. 관을 들고. 중년의 어머니와 대학을 갓 졸업한 딸이 들고 오르는 관에는 아버지의 시신이 담겨 있다. 생전에 딸, 아내 모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매장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작전지역인 어느 산 기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관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고 모녀는 시신만을 겨우 옮긴다. 평생의 짐이고 원수 같기만 하던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 지고 올라가는 모녀의 모습엔 아이로니컬한 긴장감이 짙게 감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산 속, 마침내 모녀는 아버지가 말한 명당자리에 도착한다. 마지막 장면, 아버지의 시신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군인들 뒤로, 모녀는 올라왔던 길을 맥없이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