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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001-04-20

영화의 뿌리, 그 자궁의 역사를 찾아서

영화는, 건축가와 조각가, 화가 등이 모여 교회 하나를 완성하는 중세의 예술처럼,

집단에 의해 제작되는 공동창작물이다. 이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초래한 변화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돈을 내고

이를 소비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로서의 관중이 존재하게 됨으로서 가능해진 변화이기도 하다.

이주헌 | 아트스페이스서울 관장

염무웅·반성완 옮김/ 창작과 비평사 펴냄/ 9800원(1∼4 각권)

헝가리 출신의 예술사회학자 아르놀트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나에게 늘 풍성한 영감과 지적 자극을 주는 서가의 보물이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며 예술과 역사에 대한 하우저의 깊은 통찰에 스스럼없이 빚을 진다. 미술사만을 다룬 여타의 미술 관련 서적들보다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20세기의 영화까지 서양문명의 예술적 성취를 광범위하게 다룬 이 책이 나에게 미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이 책이 서양 예술의 형성 과정을 사회의 변화와 역사의 전개에 따른 사회사적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서 미술을 미술 외적인 시각에서도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미술 안에서만 미술을 바라보는 것만큼 미술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없다. 전문

분야를 다루는 역사서가 갖는 일반적인 한계는 ‘종’(縱)적인 서술로 인해 ‘횡’(橫)의 역사, 곧 그때그때의 사건이나 현상, 성취를 낳은 사회의

모습들을 놓친다는 것이다. ‘시간’의 서술은 있되, ‘공간’의 서술이 없는 것이다. 하우저의 책은 그 씨줄과 날줄을 탁월하게 교직해 우리에게

(서양)미술의 실체를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물론, 앞서 얼핏 언급했지만, 이 책은 영화도 다루고 있다. 제4권 마지막장이 영화에 할당된 장이다. 조금이나마 영화를 다루고 있다 하여 이

책을 <씨네21> 독자 여러분께 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화를 미술의 역사를 통해 바라봄으로써, ‘영화 밖’에서 영화를 이해하는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만큼 좋은 책도 드물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책을 골라본 것이다.

하우저가 주로 미술과 문학(원제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에서는 미술이 문학보다

먼저 나온다)을 다룬 이 책의 끝부분을 영화로 장식한 것은 영화를 양념으로 넣어 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영화는 그의 예술사회사

서술의 필연적인 귀결점이었다. 이야기의 장르인 문학과 이미지의 장르인 미술을 현대에 들어 통합적으로 계승한 것이 바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을 제외해도 영화는 존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영화의 전사’(前史)를 서술한 것으로, 그러니까 영화라는

아이를 생산한 ‘자궁의 역사’로 읽어도 좋은 것이다. 물론 시간의 전후를 떠나 미술이나 문학의 사회적 전개를 영화의 사회적 전개와 비교해 읽어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부분이 “영화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매스 관중(Massenpublikum)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 한 최초의 기도”라는 하우저의 지적이다.

하우저는 유럽 예술이 르네상스 이래 오랜 세월 개인주의적 지향을 보여왔다고 본다. 예술은 ‘고독한 천재의 외로운 투쟁의 결과’라는 다소 신화적인

관점이 그 대표적인 소산물이다. 그러나 영화는, 건축가와 조각가, 화가 등이 모여 교회 하나를 완성하는 중세의 예술처럼, 집단에 의해 제작되는

공동창작물이다. 이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초래한 변화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돈을 내고 이를 소비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로서의 관중이 존재하게 됨으로서 가능해진 변화이기도 하다. 계층의 구분조차 뛰어넘는 이 광범위한 수요층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영화는

동원 가능한 모든 요소를 투입해 가장 대중적인 예술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민주화’의 부분에 주목해본다면, 서양 근대의 문학과 미술이 개인주의적 지향으로 흘러온 것이 영화와 꼭 대척적인 관점에서 다뤄질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주의의 발달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예술이 개인주의적 지향의 전개과정을 보여온

것은 중세 초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와 이에 따른 도시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업과 산업 발달의 견인차 역할을 한 도시는 그

세력이 확장될수록 장원 중심의 봉건 영주 지배체제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고, 신분이나 혈통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진작시켰다.

대서양 무역권에 앞서 지중해 무역권이 흥하던 시절 바로 무역과 금융으로 급부상한 도시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주도하게 되는 배경이다. 피렌체가

낳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가 발견한 이 ‘개인’의 가장 위대한 성취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하우저는 서구 예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작용한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변화를 총체적으로 개관해 ‘서말’이나 되는 ‘예술의 구슬’을 다 꿰는 저력을 보인다. 그 통찰력과 박학다식함은

읽을수록 하나의 경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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