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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2001-04-20

미쳤어, 영화도. 그래서 아름답지

영화도, 예술도, 기존의 정형화된 삶에서 벗어나는, 어쩌면 ‘미쳤어’라고 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사유하고 제안한다. 광기라고 불리는 것이 이성의 빛에 의해 그늘진 달의 뒷면을 뜻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대로 광기를

통해서 그 그늘을, 지금의 이성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진경 | 사회학자·<철학과 굴뚝청소부>

김부용 옮김/ 인간사랑 펴냄/ 7500원

감옥과 정신병원, 어디가 더 나은, 아니 덜 나쁜 곳일까? 감옥은 가두어두고 처벌하는 ‘기계’라면, 정신병원은 ‘병원’인 만큼 치료하는 기계니,

후자가 더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래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 머피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의 알렉스는 정신병원을 선택하는 세간의 ‘지혜’에 따른다. 결과는? 머피는 죽음에 잇닿은 중환자가 되고, 알렉스는 훌륭한 치료덕에

모든 반항기와 폭력성을 거세당한 채 ‘퇴원’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학대받다 불구가 되어 병원에 입원한다. 감금보다 더 끔찍한 치료! 적어도

밀로스 포먼이나 스탠리 큐브릭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큐브릭이 범죄적 폭력과 그것을 처벌하는 폭력, 혹은 그것을 치료하는 폭력의 대칭성을 상대적으로 주목한다면, 포먼은 광인의 삶의 ‘정상성’과

이성적 치료의 폭력성을 주목한다. 머피는 환자인지 아닌지가 모호한 사람이다. 하지만 머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머피의 눈에 비친 그의 동료들은

대부분 환자인지 아닌지가 모호한 사람들이다. 반면 의사와 간호사의 폭력적 치료에 대한 공포가 그들로 하여금 환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만든다.

그들은 병원에 있고, 의사의 판단 아래 있으며, 그런 만큼 환자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병원 밖의 세상으로, 이른바 ‘정상성’의 세계로

인도했던 머피마저, 정상과 광기, 의사와 환자를 가르는 경계선의 강력한 권력에 의해 확실한 환자가 된다. 이성이란 특수한 종류의 광기라고,

다른 광기를 처벌하고 자신의 규칙에 두들겨 맞추는 광기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이런 발상이 단지 영화적 허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가 이처럼 병원에 갇혀서 ‘치료’받는 환자가 된

과정을 진지한 역사적 연구로 그려서 보여준 바 있다. 광인들이 환자가 되어 치료받는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를 갖는다. 가령 햄릿의 광기는

치료해야 할 병도, 가두어야 할 발작도 아니며, <노틀담의 꼽추>에서 광인은 부랑자와 걸인, 도둑, 집시나 이방인 등과 더불어 파리

시내의 한 구역을 차지하고 살아간다.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법과 규칙이 있다. 광인임이 분명한 돈키호테를 가두거나 치료하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영화 <아마데우스>는 사태가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그 영화는 광인이나 부랑자, 걸인 등이 갇혀 있는 수용소로

들어가, 광인 살리에리가 자살을 시도하는 방에 이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갇히기 시작한 것이다.

서양의 중세에도 수용소는 있었다. 거기에는 이른바 ‘문둥이’라고 불리는 나병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신의 버림을 받은 자들. 영화 <벤허>에서는

이들이 동굴로 숨어든 것으로, 기나긴 갇힘의 역사가 시작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15∼16세기경에 이르면서 나병 환자가 줄어들어 수용소가

거의 비게 되었다. 이제 누군가가 그곳에 갇혀야 했다. 왜냐하면 그런 ‘타자’들이 없이는 ‘정상인’도 ‘이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7세기에 이르면서 대감금이 일어난다. 부랑자와 걸인, 빈민, 도둑, 광인 등을 구별없이 잡아 가두었다. 100명당 1명꼴로 가둔 그 수용소에

새 간판이 걸린다. ‘종합병원’.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면 다시 한번 사태가 바뀐다.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뒤섞어놓은 감금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그래서 부랑자나 빈민 등은 풀어주고, 범죄자는 감옥으로, 광인은 정신병원으로 분리해서 수용한다. 광기란 치료되어야 할

‘질병’의 일종이 되었고, 광인은 이제 ‘환자’가 되었으며, 광인을 다루는 기술은 의학적 ‘치료’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광기의 역사>를 보는 것은 ‘이성’의 이름으로 광인이나 부랑자 등의 ‘타자’들에 대해 가하는 폭력과 억압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과 ‘이성’이라는, 사실은 특정한 역사적 산물인 어떤 하나의 관점을 절대화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촉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광기의 편에서 이성을 비난하는 반(反)합리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비이성으로 구획된 것에서 어느 편을 드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가르는 경계선 자체를 변환시키는 것이고, 그렇게 분할된 양자의 관계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영화도, 예술도, 기존의 정형화된 삶에서 벗어나는, 어쩌면 ‘미쳤어’라고 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사유하고 제안한다. 광기라고 불리는

것이 이성의 빛에 의해 그늘진 달의 뒷면을 뜻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대로 광기를 통해서 그 그늘을, 지금의 이성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푸코도, 포먼도, 혹은 큐브릭도 그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광기의 영화, 아니 영화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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