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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인생에 핀 구원의 꽃
2001-04-24

파이란

Story

미성년자에게 ‘몰카’ 비디오 팔다가 구류를 살고 나온 양아치 강재(최민식)는 동네 오락실에서 동전 뜯어낼 때나 유세를 부릴 뿐, 깡패 동기생인 보스한테 두들겨맞느라 조직 안에서 나이 대접도 받지 못한다. 그에게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중국인 불법체류자 강백란(장백지)에게 호적을 판 덕분에 생긴 아내다. 뒷수습을 하러 떠난 여정에서 강재는 ‘결혼’을 커다란 친절로 받아들이며 오래도록 자신을 기다렸던 여인 ‘파이란’을 발견하게 된다.

Review

최민식과 장백지가 만나 무슨 사랑이야기가 나오겠느냐는 호사가들의 입담이 예사롭지 않더니, 결국 영화 내내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았다. 두번의 기회가 있지만 감질나게 비켜갈 뿐이다. 멜로드라마가 내장하고 있는 흥행 공식을 이런 식으로 배반한 <파이란>은 그 대신 상대적으로 묵직한 정격 드라마의 길을 간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묘사로 나아가고 의미심장한 사회성까지 띠게 되었다.

“6기통 디젤 배 한척 딱 앞세우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사항을 십수년째 되풀이하는 동네 깡패와, 잘사는 나라 한국에서 돈을 벌어보겠다는 착한 중국 처녀. 이 땅에서 애처로운 목숨 붙이고 사는 전형적인 주변인들이다. 둘 사이에 굳이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최근 한국영화의 상상력 속에 자주 나타나는 부류인 데 반해 후자는 처음 등장한 존재라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농어촌’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용어가 지시하듯이 어촌은 농촌과 더불어 근대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한 곳. 언젠가 그 어촌을 떠나왔을 강재는 또다른 소외집단인 지역 깡패 조직에 몸담았지만 성격도 모질지 못한 나머지 “동물 뱃속에서 나와 네발로 기어다니는 것만도 못하다”는 핀잔을 받을 만큼 쓰임새 없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멜로드라마 주인공으로서는 어떻게 해봐도 구제하기 어려운 존재의 지리멸렬함과 구원의 여정을 최민식은 몸서리쳐질 만한 질감으로 형상화시켰다.

중국 출신의 가난한 고아 파이란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중국이나 북한의 가난한 동포 혹은 외국인 노동자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농어촌 출신의 공장 노동자들이 고달픈 몸을 뉘었던 가리봉동 ‘벌집’만 해도 지금은 수만명의 중국인 노동자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현실이 작가와 감독에게 파이란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하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강재가 여행을 떠나는 중반 이후부터다. 초반부는 자칫 3류 깡패에 관한 영화나 시골서 상경한 처녀들의 수난기를 다룬 호스티스영화처럼 될 수도 있었을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으면서, 강재의 캐릭터를 우직하게 구축하는 데에 바쳐진다. 후반부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파이란이 3류 양아치의 존재를 회복시켜내는 구원의 서사다. 파이란의 장례를 지내러 가는 길에 다시 보게 된 강원도의 바다와 어쩌면 처음 들어보았을 사랑한다는 말을 통해 잠들어 있던 강재의 영혼이 서서히 흔들어 깨워진다.

파이란이 강재에게 고백한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객석에서 눈물이 터지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파이란이 영화 속에서 거듭 반복하는 ‘결혼’, ‘친절’이라는 말은, “줄 것 없”는 맨주먹으로 가진 것 많은 남한 사람들에게 얹혀 살게 된 외국인 노동자와 외지의 동포들이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타전해오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하얀 난초꽃이라는 뜻을 가진 파이란(白蘭)의 이름처럼 가녀리게 들려오는 요청에 대하여 우리의 대답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속 대사처럼 “깨지고 나면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강재가 시를 쓸 수 있었다면 이렇게 노래했을 것 같다.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나희덕,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한국의 멜로드라마가 오래도록 외면했던 도시 공간과 지역들을 담은 화면에 대해 김영철 촬영감독은 이렇게 자랑한다. “주인공의 마음이 되어 대사 라인 하나하나를 시선으로 훑고 영화에 스며드는 빛이 내 안으로 쑥 들어오는 것 같은 ‘필’이 꽂힐 때가 있다. <파이란>에서 그런 경험이 몇번 있었다. 내가 강재가 되어 걸어다니는 느낌!”

<파이란>은 <오발탄>(1961, 유현목)이나 <삼포 가는 길>(1974, 이만희) 같은 명편들이 주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감동을 맛보게 한다. “정직하면서도 미련스럽지 않다”는 누군가의 촌평처럼, 드물게 만나는 수작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파이란의

얼굴 속에 희망이”송해성 감독 인터뷰

원작소설을 얼마만큼 차용했나.

뒷골목에서 살아온 중년 남자가 죽은 중국 여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찾아간다는 골격은 아사다 지로의 <러브 레터> 그대로다. 그러나 캐릭터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바뀌었다. 이를테면 원작에는 여인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고, 신주쿠의 조폭문화 역시 한국에는 없는 부분이다. 또 원작에서는 “내 무릎에서 달그락거리는 유골의 소리”라는 묘사로, 즉 남자가 화장터에서 유골함을 들고 버스를 타는 데서 끝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적인 엔딩이 필요하기 때문에 강재의 죽음과 파이란의 얼굴로 끝을 맺었다.

통상적인 멜로드라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두 남녀가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여자 캐릭터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그때 이미 나왔다. 결국은 남자 중심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고, 후반부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전반부는 상업적인 위험성을 무릅쓰고 남자의 심성과 가치관을 묘사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 핵심은 불안감이다.

장례식에 다녀오는 사이에 남자가 겪는 심정 변화가 이 영화의 핵심인데 만족스러울 만큼 되었는가.

관객들이 판단할 일이지만, 나로서는 어느 정도 해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보는 세상이 이토록 절망적인가.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울면 내가 실패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들 훌쩍거린다. 내가 잘못 만들었나보다. 관객이 강재가 잊어버렸던, 그러나 마음속으로 추구해왔던 것을 파이란의 얼굴 속에서 발견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가 비극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카라>의 감독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갑작스럽게 대타로 기용되어서 개념없이 만든 영화다. 김성수 감독이 “송해성의 영화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많이 반성했지만 어쨌든 내 영화인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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