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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씨, 오겡끼데스까?
2001-05-02

<파이란>에 감동한 아줌마, 러닝셔츠 아저씨들을 추억하다

오은하 | 대중문화평론가 oheunha@hotmail.com

● 나는 <파이란>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에 매우 놀랐다. 강재라는 인물이 조금도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강재는 내가 아기 때부터 십몇년을 살았던 청량리에서 흔히 보아온 동네 청년들과 한마디로 똑같았다. 물론 그 청년들이

강재처럼 직업 깡패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고 다니는 행태나 입고 다니는 옷, 매일매일을 소일하는 방식이 너무나 비슷했다.

이들의 특징은 “어디에나 있음”과 혹여 없다가도 “홀연히 나타남”이었다. 어둑시근한 만화가게, 등나무 밑 뽑기 좌판, 하교길의 골목, 약장수패의

공연현장 등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길거리에 박혀 있는 나무나 간판처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이들의 또다른 특징은 애들한테

말을 잘 건다는 거였다. 그리고 애들이 관심있어 하는 건 애들보다도 더 좋아했다. 싸움구경, 개잡는 거 구경, 전파상 앞의 프로레슬링 구경,

거지나 미친여자 구경 등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들도 함께 있었다.

간밤에 뭔 일이 있었는지 때론 절룩이며 나타나기도 했고 동네사람들 누구도 이들을 반기지 않았지만 이들은 또 넉살좋게 아무 자리에나 껴서, 라면으로

점심 때우는 만화가게 아저씨 쟁반에 한 젓가락 걸치기도 했으며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철판에 삐져나온 풀빵부스러기를 떼어먹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손은 라면과 풀빵을 더듬고 있으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따, 날씨 좋다, 든가 군대 있을 때 어쨌다든가, 권투경기가 어쨌다든가, 하는

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었다.

영화 <파이란>을 보면서, 나는 그 디테일에 <친구>를 볼 때보다도 더 감동했다. 강재가 입은 셔츠는

늘 러닝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활보하던 이 아저씨들이 어쩌다 동네를 벗어난 외출을 할 때 차려 입었던 반짝이 질감의 셔츠 바로 그것이었으며

옷 속에 손을 넣어 배를 벅벅 긁고 동시에 하품을 하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자세는 그야말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담배꽁초와

각종 오물이 켜켜이 쌓여 엉킨 채 바닥을 구르는 병들이라든지 어디 한구석쯤 담뱃불에 탔음에 틀림없는 싸구려 이불과 담요라든지 등등은 더운 여름

문 열어놓고 지내던 동네풍습 덕에 골목을 지날 때마다 익숙하게 봐온 바로 그 정경이었다. 더욱이 지인이라도 만났다 하면 헤어질 때 꼭 하는

대사, “어려운 일 있으면 형님한테 얘기해라”라든가 감정이 격해지면 나오는 “나 우습게 보지 마라. 나 우스운 놈 아니다”류의 대사들은 이십몇년

전 청량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엔 정말 많은 “강재씨”들이 있었구나.

<파이란>을 보며 흘린 눈물은 고통스러웠다. 파이란의 순수한 마음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고 이제 그때로 돌아가려 결심하는 바로

그 순간, 아이로니컬하게도 바로 그 순간에 강재의 삶은 부스러 뭉개져버렸다. 나는 이 대목이 미치게 슬펐다. 안 하던 짓 하면 곧 죽는다더니.

그냥 쌈마이 깡패로 살걸 그랬나, 강재는. 10년쯤 썩고 나와 디젤배 앞세우고 고향에 갔더라면 더 좋았을까. 삼류 양아치의 구원이라. 그러나

구원 다음에 곧바로 찾아오는 파국이라면, 그게 구원이 맞긴 맞나.

더불어 여러 가지 상념이 맴돌았다. 파이란은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기름에 전 머리를 넘겨빗은 채 언제나 웃고 있는 증명사진 속의 강재에게서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만리타국에 건너와 고된 노동 속에 희망없는 삶을 사는 어린 처녀에게 환상은 반드시 필요했겠지. 설령 그게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신기루일지라도 언젠가 임자가 찾아올지도 모를 칫솔을 바라보듯한 마음으로 늘 가다듬고 닦고 그리워하고 싶었던 거겠지. 하트모양 스티커로

깨진 유리를 장식하고 귀신나올 듯한 방 안을 정돈해 연서를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그 꿈과 솜씨로, 단 하루도 연체를 못 참아주겠다는 매몰찬

직업소개소 아저씨들까지 포함해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라고 꿈꾸듯 고백할 수 있었던 거지. 결국 강재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죽었으니

파이란을 위해선 그게 더 나았을까. 아니, 파이란이 머릿속에 그렸던 그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강재의 참정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함께 옛날 한동네 살았던 그 수많은 “강재씨”들이 떠오르게 했다. 그 아저씨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놔두고 바라봐줄 정도로 마음이 넓지 않은 게 세상인가 보던데. 이젠 초로에 접어들었을 오십줄의 강재씨들은 혹시 자기만의

파이란을 만났을까. 파이란을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만난 게 좋은 일일까 안 만난 게 좋은 일일까. 영화 <파이란>은 정말

자신없고 어려운 질문을 던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