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TV 밖 범죄, TV 속 폭력
2001-05-02

<공개수배 사건25시>가 보여준 인권과 알 권리, 그 위험한 줄타기

KBS2 토요일 밤 9시40분

93년은 우리나라 범죄재연 및 공개수배 프로그램의 원년으로 기억될 만하다. 71년에 방송을 시작하여 89년에 문을 닫은 MBC의 <수사반장>이

매주 일요일 저녁 시청자를 초대하던 수사 현장이 그리워질 무렵이었다.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식 뒤 곧바로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이

기폭제가 되어 그해 5월과 7월에 각각 KBS 1TV의 <사건25시>와 MBC의 <경찰청 사람들>이 잇따라 문을 연다.

<수사반장>이 기존의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각본 위에 ‘연기’를 풀어놓은 것에 불과했다면 위의 두 방송은 그런 점에서 확실히

신선했고 또한 강렬했다. 생생한 범죄현장을 돌며 실제 있었던 일을 가감없는 재연을 통해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들은 안방의 시청자를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귀만 열어놓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에서 ‘지금

어디선가 분명히 벌어진 또는 벌어지고 있는 일’로의 사건인식의 변화는 시청자의 눈과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소극적인 관망자에서 적극적인

제보자로 위치 상승된 소비자들은 한편으론 방송사의 마케팅 전략에 유도된 터였다. 그들은 주변의 안전을 확인받고, 혹은 범죄 해결의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할 용감한 시민이 되기 위하여 프로그램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갔다. 제보는 폭주했고 방송된 사건에 대한 한 해 검거율은 90%대를

상회했다. 심지어 언론에서조차 ‘경찰보다 방송’이라며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범죄, 방송 모두 상한선을 넘어

그러나 인기는 독이 되었다. 애초에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정하지 않은 채 시작했던 방송은 점점 상한선을 무시한 채 위험해져 갔다. 오히려

범죄의 교과서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고개를 들 무렵, 예상치 못한 곳에서 철퇴가 날아왔다. 94년 9월 ‘지존파 사건’이 그것. 이들은 홍콩영화

<지존무상>을 본떠 조직의 이름을 짓고,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압구정동 오렌지족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을 목표로 살인을 감행하고

다녔다. 중소기업 사장부부를 납치, 살해하여 소각한 뒤 매장시킨데다 담력을 키운다는 명목하에 살인연습을 하고, 인육을 입에 대기도 하여

검거 당시 엄청난 파란이 일었다. 그들이 붙잡히자 언론은 앞다투어 인터뷰를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여과되지 않은 ‘악마의 말들’(<한겨레>

1994. 10. 4)이 전파를 타고 흘렀다. “돈 있는 놈들 다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라던 이들의 광기어린 미소도 저녁식탁에

배송됐다. 범인들의 육성인터뷰가 20여 차례에 걸쳐 반복 방영되며, 방송이 그들만의 잔치로 되덮인다 싶을 때 이번에는 그들이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어떤 경로로 구입했는지와 그들의 아지트 구조, 사람의 질식사 과정 등이 자세하게 방영된다. 그건 시민단체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형국이었다.

범죄자, 범죄프로그램을 고소하다

급기야 10월14일 방송위원회는 방송사의 이 사건 보도와 관련하여 방송 3사의 보도국장을 소환해 의견진술을 듣기에 이른다.

그간 방송위가 보도 프로의 내용과 관련해 주의, 경고 등 가벼운 조처를 취한 것에 비해 이례적인 태도였다. 그것은 방송위가, 지존파에 보인

국민들의 관심에 애써 등을 보인 꼴이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지존파가 불러일으킨 또다른 파장, 즉 방송매체가 가진 위험성의 지적에

대한 발빠른 대처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러한 ‘자정’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존파의 출현에 방송, 영상매체가 한몫을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10월30일 KBS의 <사건25시>는 75회를 끝으로 씁쓸한 1막을 내린다. MBC도 <경찰청 사람들>에

대해 최종 결정을 유보한 채, 단, 강력범죄 장면은 일절 방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상황을 일단락시킨다. 사실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총리

등 정치권의 TV 폭력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있었다. KBS가 프로의 폐지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데 비해 MBC는 끝까지 프로그램의

이름을 살리는 대신 내용의 수위를 대폭 낮추는 방법을 택했다. 4년 뒤인 98년 KBS가 예전과는 조금 다른 포맷의 <공개수배 사건25시>를

되살리고, 99년 <경찰청 사람들>은 5년간의 고군분투를 접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공개수배…>는 다음 개편안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봄철 개편으로 방송 3사가 분주한 와중에

찾아든 KBS <공배수배 사건25시> 홈페이지에도 이른 종영소식이 번지면서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다. “지금 <공개수배…>는

용의자는 물론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오히려 개과천선의 기회를 막고 더욱 범죄 안에 빠져들게 할 우려가 높기에

폐지되어야 한다”(이진수), “범죄자 구속에서 인권의 무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오히려 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인권이

피해를 보는 상황을 좌시하려는가?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죄값을 치러야 하며 그런 점에서 프로그램이 폐지될 이유는 없다”(na) 등등. 그런데

조금은 다른 성격의 호소문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공개수배 사건25시>를 고발합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글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수배되어 현재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입건된 최태영이었다. 그는 지난해 6월19일에 방영된 <이 남자가 사는

법 - 서울 제비족 사기사건>에서 여성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그것을 미끼로 금품을 갈취한 용의자로 수배됐다. 그는 자신이 올린 글에서

채무관계 불이행과 부정수표 발행 혐의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성폭행을 미끼로 금품을 빼앗은 적은 없으며, 방송 직후 오보된 사실의 정정을

위해 <공개수배…> 제작차장, 담당 PD 등과 만나 사과방송을 요구한 바 있다고 적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는 피해 당사자로

프로그램에 나와 진술한 두명의 여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상태였다.

법적 자문, 경찰의 지지가 관건

그렇다면 KBS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공개수배…>의 폐지가 확정되고 제작팀이 서로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관계자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렵게 만난 관계자는 ‘최태영 사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 바로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마당에 다시 골치아픈 일을 들추는 것이 못마땅할 듯도 했다. 그는 최태영 사건을 다룰 당시만 해도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피해자가 신빙성을 갖기에 충분한 숫자였으며, 경찰의 조서도 성폭행 혐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과방송의

부분은, 최태영의 무혐의를 인정하는 법의 판결 없이는 생각해볼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며칠이 지난 4월24일 북부지검으로부터 최태영과 여성들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태영이 여성들에 대한 채무를 청산하는 조건으로 서로간의 고소를 취하한 것이다. 이로써 최태영의 혐의는

“했다, 안 했다”의 차원 이전에 원인무효가 되고 말았다. 결국 최태영의 죄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지금, KBS의 사과방송은커녕, 정확한

진위를 가리려는 움직임마저 의미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경찰대학교 표창원 교수(신문방송학)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영국 의 범죄재연 프로그램인 를 분석하여 논문을 작성한 바 있는 표 교수는, 우리나라의 범죄관련 프로그램의 허술한 준비과정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는데,

무엇보다 고정적인 자문변호사단의 설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지금과 같이 경찰의 조서와 방송사의 자체 조사에 의존해 범죄 재연 프로그램이

꾸려지는 한 재연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자와 용의자의 인권침해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경찰이나 민간인이 사건을 의뢰하는 경우를 포함해 방송사에서

직접 사건을 찾아 아이템을 정하는 과정에서, 대상사건이 과연 법률적인 측면에서 오해의 소지는 없는지를 알기 위해 해당 변호사가 사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하는 수순이라는 말이였다. 인권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는 요즘, 무리한 아이템 선정과 제작 강행은 결국 처음부터 시빗거리를 안고

출발하는 악순환을 불러온다는 그의 얘기는 타당하게 들렸다. 또한 그는 공개수배를 남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미결 사건에 한해 방송의

소재를 제한할 필요가 있으며, 방송을 통해 검거된 사안은 경찰과 동등하게 공을 나누어 서로간의 협조기반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경찰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지 않는 한 원활한 사건 수급과 제보의 전방위적 창구를 얻기 힘들다는 이유다. 그것은 프로그램을 통해 경찰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묘사될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권과 알 권리의 조우를 바라며

<공개수배…>를 만들다 지금은 <특종! 사건파일>팀으로 건너간 이정환 PD는 작업의 고충을 짧게 피력한다. “다음에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면, 대사를 통한 구체적인 상황 재연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전개를 하고 싶다. 그것은 디테일한 장면 구성에서 오는

오해와 상충하는 이해관계에 얽혀드는 것을 최소한도로 줄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자의 잔학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피해자의 어려운

입장을 전달하는 것이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기에 적합한 제작방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범죄관련 프로그램은 한동안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고 다시 TV에 사건 사고에 대한 생생한 보도가 오르는 날,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인권과 알 권리가 행복하게 조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한다. 다수를 위해 소수의 인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사건 해결을

위해 개인의 삶이 무시당하는 것이 아닌, 어렵고도 분명 가치있는 이 일에 용감하게 발을 내디딜 방송을 기대하는 것은, 누구나 범죄의 용의자가

될 수도, 피해를 입고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 심지현|객원기자 사진제공 KBS 홍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