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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에 놀란 가출소년, 카메라를 들다
2001-05-11

타이의 씨네키드- 불법 비디오 팔며 영화 배운 몬트리 새로

몬트리 새로 job_314@thaimail.com1979년생,1996년 가출, 불법 비디오 판매하며 유럽영화 독파,1998년 히치콕 <싸이코>에서 충격 받음, 1999년 8mm 비디오영화 <트루> 제작. 신작 <대량살육> 제작중, 최근 읽는 책 프로이트의 책을 읽기 위해 정신분석학 입문서를 보고 있음, 최근 본 영화 <어둠 속의 댄서>와 타이영화 <골 클럽>, 시간이 나면 비디오게임, 영화보기, 불교 관련 서적 읽기

# 4월20일 저녁 7시 방콕 실롬로드

상하(常夏)의 도시 방콕에 첫발을 내디디며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잘 달궈진 프라이팬, 또는 거대한 사우나였다. 아무리 4월이 1년 중 가장

기온이 높은 달이라지만, 태양이 잠시 몸을 피하는 시간임에도 섭씨 37도까지 머리를 쳐들었던 온도계의 빨간 막대기는 좀처럼 바닥으로 내려올

줄 모르고 있었다. 서울로 치면 종로 바닥과 강남역 인근을 섞어놓은 듯한 분위기의 젊은 거리 실롬로드는 어둠의 커튼이 내리면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세계 초일류 브랜드의 ‘짜가’ 물건을 헐값에 판매하는 노점상들을 헤집고 커피숍 ‘커피 월드’로 황급히 들어간 것은 옷

속으로 파고드는 땀 줄기를 막아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스물두살의 ‘씨네키드’ 몬트리 새로(22)를 만나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픽션’, 잃어버린 상상력의 낙원

카페 구석 넓은 소파에 마치 보스처럼 혼자 버티고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던 새로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앳돼 보이는 인상을

가진 평범한 타이 젊은이로 보였다. 유난히 반짝이는 눈에서 떠올린 현자의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하릴없이 밤길을 쏘다니는 싸구려 청춘쯤으로 여기고

말았을지 모를 그는 매주 금요일마다 모임을 갖는 ‘로스트 픽션’의 다른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이의 영화평론가 시와폰 퐁수완으로부터 들은

그에 관한 정보는 “열심히 단편영화를 만드는 청년”, “단편영화를 만들고 연구하는 모임인 ‘로스트 픽션’의 리더“, “각종 단편영화제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열혈 영화광” 등 그야말로 ‘단편’적인 수준이었기에 우선 “22살이면 대학에 다니니?”란 질문부터 던져야 했다. “아니, 나 고3인

셈이야.”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다소 의외의 답에 적이 당황했지만, 그건 그의 싱싱한 삶에 관한 이야기 중 서두에 해당할 뿐이었다.

북적거리는 방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중학교 졸업 뒤 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1∼2년간 머리에 물을 들이고

양아치처럼 살다가 동네 사람과 싸움을 한 뒤 뒷감당이 골치 아파져 가출, 그러니까 집을 나와 혼자 생활해왔다. 그때부터 그는 할리우드영화 포스터

같은 영화 관련 소품을 길가에서 팔기 시작했다.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꼭 그 때문이라기보단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앨프리드 히치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감독”의 <싸이코>를 봤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덕거리며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까지 본 영화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랐던” 그 영화를 본 뒤 그는 비디오테이프 판매쪽으로 업종을 바꿨다. 짐작하다시피

‘업자’로부터 물건을 받아 ‘불법 복제 비디오’를 파는 일이었지만, 그가 파는 테이프는 다른 판매상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고다르, 트뤼포,

구로사와 아키라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들의 예술영화를 수도 없이 팔았다. 이들 영화는 타이에선 공식으로 개봉되거나 출시되지 않는 작품이었기에

새로는 꽤 유명한 존재였다. 평론가인 퐁수완 역시 그의 고객이었고 숱한 영화, 광고, 뮤직비디오계 인사들이 그의 비디오가게가 있는 곳, 바로

그와 얘기를 나눈 커피숍이 자리한 실롬로드로 찾아왔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파는 물건을 모조리 봤다는 점. “내가 하면 다른 타이영화보다

훨씬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경찰에 붙들려 ‘X등급 비디오’ 판매업자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받은 뒤 비디오가게는 때려치웠지만.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어서자 그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화에 관해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는 그 혼자 작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디오가게 고객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했다. 영화계 인사인 단골손님들에게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나눠주고 “이것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시나리오 수정뿐 아니라 배우와 스탭으로 일해달라는 부탁에도 흔쾌히 응했다. 그의 첫

단편영화 <트루>(True)는 이렇게 시작됐다. 총 제작비 8천바트(약 25만원) 중 상당 부분도 그들이 마련해줬다. 1999년

소니 핸디캠으로 만든 이 영화는 대조적인 두 사람을 통해 외면적 요소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을 풍자한 33분짜리 작품으로 2000년 ‘제4회

타이 단편영화/비디오 페스티벌’의 본선에 올랐다. 총 92편 중 7편이 본선에 진출했는데, 그는 상은 못 받았지만 본선 진출자 중 가장 어린

감독이었다.

밤 10시가 가까워지자 ‘로스트 픽션’ 회원들이 하나둘 카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로스트 픽션’은 사실 그의 옛 비디오가게

이름이다. 자신이 팔던 유럽과 미국, 아시아 등지의 예술영화를 통해 잃어버린 상상력을 되찾으라는 의미에서 붙였단다. 현재 15명이 참여하고

있는 이 모임의 회원들도 가게의 고객이었고, 첫 영화를 만들면서 모였던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다. 회원 중에는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도 있고,

비록 캠코더지만 3시간 정도 되는 분량의 예술영화를 만들어 독립적으로 상영회를 갖는 친구도 있다. 이들은 새롭고 참신한 영화를 모색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마다 이곳에 모여 영화 작업에 관해 논의를 벌인다. 이날의 주제는 최근 개봉한 타이영화 .

소파에 목까지 파묻은 느슨한 자세와는 대조적으로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열띠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듣지만 이들의 대화가

새벽까지 계속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타이영화 붐을 타고 새희망이 솔솔

# 4월22일 오전 11시 방콕 에크마이 메이저 극장

앞 새로의 두 번째 작품 <집단살육>의 후반 촬영작업을 엿보기 위해 찾은 곳은 방콕 시내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 지상철 에크마이역 주변 시네플렉스 건물. 타이에서 가장 큰 극장체인 중 하나인 여기 메이저 시네플렉스를 겉으로만 쓱 보자면, 미국

서부 어느 지방인지 유럽의 한곳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과연 멀티플렉스는 같은 건물에 더불어 있는 맥도널드, KFC 같은 패스트푸드 체인만큼이나

전세계의 풍경을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사실 타이에서 멀티플렉스는 다국적 자본이 중심이 된 ‘세계화’를 역설하는 전시장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한국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타이영화의 부흥이 이 멀티플렉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날 여기 4개관 중 타이영화는 <`Killer Tattoo`>밖에 없었지만, 시내 곳곳을 파고든 멀티플렉스의 영향으로 전반적으로

관객층이 증가했고 그 결과 자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타이영화가 행복한 시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감성의 영화제작자들이

대거 등장한 덕분이다. 20년 전만 해도 타이영화계는 1년에 200편의 작품이 만들어질 정도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차츰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자국영화는 뒷전으로 밀려나기에 바빴다. 게다가 1990년대 말 동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의 정점에 서 있던 탓에 타이영화계는

그야말로 존망의 위기에 서 있었다. 이같은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은 영화는 1997년의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의 <뎅 베럴리와 그 일당들>이었다.

이 작품은 방콕 시내에서만 7500만바트(당시 환율로 약 300만달러)를 벌어들여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9년 니미부트르는 <낭낙>이란

영화로 1억5천만바트 수익을 기록,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또 지난해 개봉한 대형 시대극 <방라잔>은 <낭낙>의 기록을

넘어서며 타이영화계의 호황기를 이끌었다. 수익이 많아지니 갈수록 제작규모도 커져 현재는 우리 돈으로 약 60억원을 들인 시대극 <수리요타이>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을 정도다. 작품성 또한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1999년 페넥 라타나루앙 감독의 는 베를린영화제 등에

진출하는 성과를 보였고, 옥사이드 팡 춘 감독은 지난해 <방콕 데인저러스>로 토론토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받기도 했다. 올 들어서도

용유스 통콘턴 감독의 <철의 여인들>은 베를린, 위시트 사사나티엥 감독의 <파 탈라이 존>(검은 호랑이의 눈물)은 칸영화제에

각각 진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흥행과 예술적 성과가 높아진 데 따라 영화에 대한 투자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바야흐로 도래한 타이영화

제2의 황금기는 영화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던지고 있다고 퐁수완은 설명한다.

예정보다 30분 늦게 도착한 몬트리 새로와 그 친구들은 이미 한곳에서 촬영을 끝내고 오는 길이었다. 현재 촬영중인 이 22분짜리 비디오 영화

제목은 <집단살육>. 잔혹한 인상의 제목이지만 내용은 방콕이 싫어 교외로 나갔던 친구 8명이 이내 이 거대도시에 대한 향수를 이기지

못해 돌아온다는 것. 새로는 “22년간 살아온 방콕이 너무나 지겹다. 대기오염이나 온갖 환경문제도 심각하다. 제목 ‘집단살육’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간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이날 촬영분은 지방에서 방콕으로 돌아오는 장면. 이들은 극장 안으로 카메라를

들고 갔다가 경비원에 의해 밀려난 뒤, 이번엔 맥도널드 앞에서 이런저런 장면을 찍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감독은 물론이고 배우 주위엔 콘티는커녕

시나리오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탈출한다는 내용처럼 영화도 틀을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대충 커다란

줄기만 설정해놓았을 뿐 대사나 줄거리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놀며 장난치며 방콕의 삶을 그리다

# 4월22일 오후 7시30분 후알람퐁역방콕 최대의 기차역인 후알람퐁역은 타이 최고의 명절 중 하나인 송크란이 막 끝난 탓에 엄청나게 붐비고 있었다. 보따리를 들고 이리저리 황급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네 설이나 추석 연휴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이 북새통 속에서도 새로와 친구들은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역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화면에 담기 위해 땀을 쏟고 있었다. 1바트짜리 표를 사서 플랫폼으로 들어간 이들은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한 테이크로

담기 위해 똑같은 장면을 되풀이했다. 말이 같은 장면이지 어차피 시나리오가 없는 영화다 보니 평소 자기들이 노는대로 장난을 치고, 서로 엉키고

했다. 홈비디오카메라로 작업하는 게 안쓰럽다는 뜻을 빙빙 돌려 전하니 “영화란 것은 도구보다는 주제와 목적에 더 신경써야 한다”고 똑부러지게

설명한다. 역 앞에서 찍은 마지막 장면은 타이의 명물이자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인 ‘툭툭’을 타고 배낭여행객들의 천국인 카오산 로드로 향하는

신이었다. 힘도 빈약해보이는 오토바이 뒤에 마차를 붙여놓은 듯한 툭툭 한대에 ‘배우’ 8명이 꾸역꾸역 오르는 데도 기사 양반은 크게 괘념치

않는 표정이다. 한국 가수 김조한과 무척 비슷하게 생긴 촬영감독 아우타폰 토찬은 주행신을 찍기 위해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또다른 툭툭에 탔다.

그 사이에 이미 ‘주인공 툭툭’은 난리도 아니다. 자리를 차지하려고 엉덩이를 서로 밀어대는 탓에 자꾸 누군가 밀려나와 출발을 못하고 있다.

그들 틈에 낀 새로는 촬영을 재촉하기는커녕 똑같이 낄낄대고만 있었다. 이렇게 사는 모습이 내가 만드는 영화 그 자체라는 듯.

영화, 나의 꿈, 나의 미래

# 4월22일 밤 10시 카오산로드

밤이 어둑한데도 카오산로드는 한낮같이 훤하다. 길가의 게스트하우스와 노천 레스토랑에서 밝힌 불빛이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아채는 탓이리라. 툭툭을

타고 온 이들은 근처 밥집 골목에서 저녁을 먹었단다. 이날 촬영분을 끝내 홀가분해진 토찬, 히란파트, 로안수완, 사쿠돔카초른 등 친구들이 늘어놓는

이야기가 곳곳에 만발하는 가운데 새로는 조용히 자신이 설계해놓은 미래상을 보여준다. 그의 꿈은 당연히도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시나리오나 글을

쓰는 일도 같이할 생각이다. 내년쯤엔 뮤직비디오를 감독하면서 주류 영화계로 진출해볼 생각이다. 일단 장편영화가 궁극적인 목표지만 단편영화도

계속할 것이란다. 또 그는 우선 이번 영화를 마친 뒤 대학 진학을 본격적으로 준비한다. 영화전공?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심리학. 정신과

의사는 그 생각에 행복한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또 영화는 학교에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며, 교수의 후광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영화학과 풍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뮤직비디오 감독

등을 하면서 주류 영화계와도 관계를 맺을 생각이다. 유럽의 고전 예술영화에 끌려 영화를 만들게 됐지만 요즘 들어 자꾸 마음이 쏠리는 쪽은 아무래도

신세대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영화다. 다렌 아르노프스키의 <파이>를 반복해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테크닉이 뛰어난 가이 리치의

영화도 좋고 라스 폰 트리에의 프로젝트들도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하며 예의 속깊은 눈동자를 반짝거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객들의 떠들썩한 파티는 흥이 오른다. 여행 가이드책에 나온 대로 방콕의 밤은 정말이지 낮보다 화려하다. 어쩌면 그건 테이블

맞은편의 눈동자 열여섯개가 밝히는 조명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몸보다 마음이 더욱 흥건히 취해가고 있었다.

한국의 씨네키드에게 우린 서로 한번 만난

적도 없지만, 같은 점은 영화를 만들 때 행복함을 느낀다는 점 아닐까. 결과가 성공적이건 아니건 말이야. 난 나 같은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젠가 너희들을 만날 것이란 것도. 그럼 안녕!

방콕=글 문석 기자 사진 오계옥 기자

현지섭외 듀앙카몰 림차로엔, 시와폰 퐁수완

통역 강혜정 지문 김지석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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