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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게로 표현 못할 떨림이 왔다”
2001-05-11

일본의 씨네키드- 스즈키 세이준을 운명으로 삼은 이나미 가즈시게

이나미 가즈시게(稻見一茂, 25)

hana-ana@tj8.so-net.ne.jp 1976년 도쿄 출생, 1981년 를 통해 영화와 첫 만남, 1994년 스즈키 세이준의 <아지랑이좌>를 보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 1997년 도쿄영화미학교에 입학, 1998년 첫 단편 <코의 구멍> 제작, 오버하우젠영화제 출품, 2001년 현재 장편영화 <메구미의 꿈>(가제) 준비중, 최근 읽는 책 함무라 료의 괴담소설 단편집.

최근 본 영화 <키드>의 각본을 쓴 하모니 코린의 1999년작 <줄리엔 동키보이>

시간이 나면 ‘보디 보드’ 타기. 일본에선 요즘 서핑이 유행이다.

도쿄의 씨네키드 이나미 가즈시게를 만나기 위해 시부야에서 전철로 20분 거리의 다카이도(高井戶)역으로 가는 길은 고층건물이 시야를 턱턱 막고

있는 도심과는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쉘 위 댄스>에서 야쿠쇼 고지가 매일 출퇴근하는 도중 차창 밖으로 비치던, 나즈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나무들이 울창하며 고요한 평온이 들어찬 분위기가 마치 그림엽서 속 사진처럼 느껴진다. 전철역 출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나미의 첫인상 또한 마치 사진 속 정지된 이미지처럼 속내에 담은 생각이 읽히지 않는, 부드럽지만 흔들림이 없는 것이었다. 자연 명목상으론

새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한 이나미의 로케이션 헌팅에 동참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와의 만남은 산책에 가까웠다. 아늑한 주택 단지를

천천히 누비며 세심히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그는 말수가 적었으며, 우리 역시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해달라는 이야기 외엔 별달리 할말이 없었다.

첫 장편영화를 너무 오랫동안 준비한 탓에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가 생각하는 영화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그는 1999년 이후 지금까지

<메구미의 꿈>(가제)이라는 새 영화의 시나리오를 놓고 고심중이다. “어쩌면 완전히 뒤집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얘기해주길 꺼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망상을 품고 사는 한 여성.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루이스 브뉘엘의 <세브린느>에 나오는

카트린 드뇌브다. 낮에는 매춘부로, 밤에는 요조숙녀로 두 가지 세계를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그 여성 말이다. 역시 브뉘엘 작품인 <슬픈

트리스탄>의 드뇌브나 <어느 하녀의 일기>의 잔 모로의 캐릭터도 참고할 계획이란다. 그가 이날 찾고 있던 장소는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gt;처럼 황량하고 어둠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그 역시 이 영화에서처럼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뒤섞어 보여줄 생각이다. 날씨가 너무 화창했고, 생명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요란해서 황량한 분위기를 찾는 건 불가능한 듯 보였지만

그는 주택가의 구석구석을 꼼꼼히 더듬어가며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찾아내고 있었다. 지은 지 30년은 훌쩍 넘어보이는 도영아파트나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흉물스런 굴뚝 등을 살펴본 그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눈짓했다.

<메구미의 꿈>, 영화광의 꿈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뛰어난 재능과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셈이다. 그는 도쿄의 사설 영화교육기관인 도쿄영화미학교

1기 출신으로, 현재 제작하는 영화작업도 이곳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당초부터 열혈 영화광이었던 그는 자신의 지망을 살리기

위해 1995년 도쿄공예대학 영상학부의 영화연구실에 입학했었다. 하지만 이곳의 교육방법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달랐다. 항상 교육은

이론부터 시작됐는데 그로선 답답한 일이었다. 그가 대학 2학년이던 시절 9월 문을 연 도쿄영화미학교는 그에겐 탈출구인 셈이었다. 그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대학교를 벗어나기 위한 일념으로 무작정 지원했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는 영화미학교에서 그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활동을 벌였다. 무엇보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한 점은 의외로 영화공부의 출발점을 할리우드영화로 삼는다는 것. <조스>의

플롯 구조를 연구하는 수업을 통해 그가 흠모하는 감독인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가 미국 할리우드영화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또 어떤 면에서

가까운지 등을 쉽게 알게 됐다. 또 얼마나 많은 작품을 보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좀더 넓은 관점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러한 점은 강사에게서 뿐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로부터도 느끼는 점이다.

그는 영화미학교 시절 초급과 80명 중 4명에게만 주어지는 졸업작품 제작 기회를 얻었고, 고등과에 올라가서도 40명 중 한명만 선발하는

장편영화 지원 대상으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메구미의 꿈>은 그때 장편지원작으로 선정된 시나리오. 그에 따르면 1999년

이후 고치고 또 고치고 하다보니 지금까지 시나리오만 붙들고 있게 됐는데 애초의 60분 정도 분량을 늘리지 못해 고생이라는 얘기였다. 자신이

보기엔 딱 그 정도가 완성적이라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아까 일본소설 <러브레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한

영화 <파이란>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내 고민을 해결해줄 뭔가 새로운 방안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고 얘기할 정도로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상업적인 작품을 의식하면서도 표현력이 강한 작품을 만들어라”는 강사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강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의 첫 단편영화 <코의 구멍>(卑の穴)도 다른 점은 몰라도 표현만큼은 강렬한 영화.

친구를 배신하고 여자친구와 함께 훔친 보석을 빼돌리려는 남자와 이들 남녀에게 복수를 꾀하는 친구,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는 조직폭력배 등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1999년 오버하우젠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학대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려고 했다. 그 학대가

사회에 의한 것인지, 일 때문인지, 인간의 사악한 마음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새 장편영화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로 결심했지만 이러한 주제로 픽션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데 실제로 일본에서 살고 있는 진짜 인물로 느끼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고 있다. 또 <코의 구멍>의 경우 단편이라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찍을 수 있었는데, 장편영화의 경우 정교하게 계산을 해야

한다는 점도 자꾸 걸린다. 첫 영화를 찍을 때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계산할 수 없으면 촬영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아닌가. 시나리오상에서 캐릭터를 완벽하게 잡아놓아야 스탭과 나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속도감 있게 영화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즈키 세이준, 아! 나의 스승 나의 애인

다시 도심으로 나온 그는 신주쿠 인근 한 버려진 터널로 향했다. 터널에 들어간 그와 그의 동료는 다시 조심스런 태도로 구석구석만 파고들며

뭔가를 자꾸 관찰하더니, 쓰레기봉투를 하늘에 휙 던지곤 그것이 땅에 떨어지며 퍽 찢어지는 장면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기도 했다. 터널 가운데로

들어오니 입구와 출구, 또는 출구와 입구 양쪽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다. 이 터널이 그의 영화인생이라고 한다면 그는 아직 어둠 속에서 자신의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 이 터널로 들어오라고 유혹한 사람은 바로 스즈키 세이준이다. 사실 어릴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많은 영화를 접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영화를 좋아했던 아버지 덕에 집엔 비디오와 영화서적이 많았고 휴일 이나미네 가족의 피크닉장은

공원이 아니라 극장이었다. 가끔 아버지는 “이나미, 이 영화는 봐야 해”란 식으로 영화보기를 ‘강요’하기도 했을 정도란다. 이때까지 그와

영화의 관계는 ‘인연’ 정도였지만 그것이 ‘운명’으로 바뀐 것은 고3 때. 심야 프로그램으로 비주류영화를 많이 상영하던 시모다카이도역 부근의

한 극장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1981년작 <아지랑이좌>(陽炎座) 예고편을 틀었다. “단지 짤막한 화면이 지나갔을 뿐인데, 표현할

수 없는 떨림이 왔고, 그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 영화가 좋았는지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말하자면 그때까지 이런

영화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살과 20살 시절 그는 늘 스즈키 세이준과 함께했다. 스즈키는 그의 스승이자 동료이자 애인이었다.

<아쿠타로우>(惡太郞, 1963) 같은 그의 니카츠(日活)영화사 시대 작품을 포함해 스즈키의 영화만 봤다. “단순한 액션영화

안에도 문예적인 느낌이 나게 하는 점이나 어떤 내용이라도 액션으로 만들 수 있는 스타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결국 영화가 좋다기보다는

스즈키 세이준이 되고 싶다는 소망 같은 것을 품었던 것 같다”는 것의 그의 이야기.

그렇다면 그가 만일 이 터널을 빠져나간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그는 “이번 작품을 언제까지 끝내야 한다는 계획은 없다. 물론 생각 같아선

빨리 끝내고 싶긴 하지만. 오늘 로케이션 헌팅을 해보니 새로운 자극이 오는 것을 느낀다. 내 소망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만들면 그뿐”이라고 답한다. 또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면 더욱 기쁠 것이라고. 그는 상업적인 작품과

예술적인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하진 않는다. 영화미학교에서도 상업적 작품도 다양하고 강한 표현력을 갖추고만 있다면 좋은 작품이라고 배웠으까.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없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한다”는 점이란다.

오즈와 구로사와, 다케시를 품에 안고

도쿄의 오랜 영화(榮華)를 간직하고 있는 긴자를 거쳐 영화미학교로 돌아온 그는 타이의 몬트리가 정글에서 영화 찍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우연히

보곤 엉뚱한 말을 꺼냈다. “시선이 참 높고 멀군. 일본, 도쿄의 상황에서는 시선을 멀리 둘 수가 없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향적이 되는

것 같아요. 때문에 일본영화들은 대개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내가 고민하는 것도 시선의 문제인데,

나는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사람과 세계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을 그리고 싶거든요.” 그렇다고 그가 일본의 전통을, 선배들의 위대한

유산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는 미후네 도시로 같은 훌륭한 배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보며 스탠더드 사이즈로 화면을 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이마무라 쇼헤이 작품을 통해선 촬영현장에서 시간을 끌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알게 되고, 기타노 다케시 영화를 보면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영화미학교에서의 인터뷰가 계획보다 늦게 끝나 애초 함께 극장에서 관람할 예정이던 스즈키 세이준의 <관동무숙>(關東無宿, 1963)을

못 보게 돼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더니 그는 “어차피 여러 번 봤는데, 또 극장에서 한다니 다시 보려던 것”이라며 오히려 심려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평생의 꿈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꿈이라면 죽을 때까지 영화 일을 하는 것이죠. 스즈키 세이준 같은 감독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게 무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어요. 아무튼 한명의 작가가 자기 인생에서 진짜로 강한 테마의 작품을 하나라도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 아닌가요. 10년 뒤? 아마 일본엔 없지 않을까. 러시아 같은 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을 것 같은데….” 인터뷰 바로

전날 <코의 구멍>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와 혼인신고를 올렸다는 새 신랑 이나미의 얼굴이 붉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한국의 씨네키드에게 인터넷이나 메일처럼 편리한

수단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싶습니다. 서로가 생각하고 꿈꾸는 것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요. 그러다보면 한국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서로가 생각하는 테마를 나누다보면 영화로 옮기기 위해 한국 또는 일본에서 함께 작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사요나라.

도쿄= 글 문석 기자 사진 오계옥 기자 현지섭외·통역 사토 유 통신원▶ 아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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