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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2001-02-01

미아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이 설파하는 일본식 자연관

영화읽기...<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

일본의 하천 복원운동을 둘러본 일이 있다. 콘크리트 호안을 걷어내고 밋밋해진 흐름을 자연스럽게 되돌려 생물들이 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이 전국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었다. 놀라움과 부러움 속에 한 가지 어색하게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바로 비단잉어다. 희고 노랗고 붉은 빛깔의 비단잉어들을 도시의 어느 하천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연못에서처럼. 동행하던 일본사람에게 물었다. “왜 자연 속에 인공을 풀어놓는가.”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단잉어도 자연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고 있는, 또는 조만간 상영예정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두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는 공통적으로 ‘인간과 자연’이라는 큰 주제를 내걸고 있다. 이 영화들은 우리에게 자연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인간이 지구를 파멸에 몰아넣어도 자연은 살아남을까”, “원시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인가”, “도대체 인간에게 자연은 무언가”….

이런 질문은 보편적인 가치에 서 있다.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적 시각으로 풀어낼 문제가 아니다. <원령공주>가 9세기 무렵의 일본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다고 해도 메시지는 보편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살아온 시대와 사회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두 애니메이션에 비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관은 그래서 우선 일본적이고 나아가 아시아적이기도 하다.

이중적 자연관이 파괴의 주범

서구에서 70년대 환경운동이 싹텄을 때 아시아는 이념적 이상향이었다. 자연과 인간은 뗄 수 없는 하나라는 자연관이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없었다. 아시아에서 자연존중의 가르침은 종교적 신앙과 터부로 뿌리박혀 있다. 덜 먹고 덜 쓰는 금욕적이고 소박한 생활태도가 자리잡혀 있기도 하다.

특히 일본인의 ‘자연 사랑’은 서구인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생활 속 어디에나 자연이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 거의 전 국민을 나서게 하는 벚꽃구경, 자연이 단골 소재인 대중의 시(하이쿠), 풍경화, 건축…. 이것들 모두가 자연이다.

그런데 일본인에게는 또다른 자연이 있다. ‘날것의 자연’ 또는 ‘원시자연’이 그것이다. 이 자연은 공포의 대상이다. 지진과 화산분화, 태풍, 홍수로 다가오는 자연이다. 그래서 원시자연에는 정령이 깃들고 신이 산다. <원령공주>에서 원시자연을 상징하는 숲의 신 ‘시시’는 인간의 자애로운 얼굴과 사슴의 우아한 몸집, 그리고 나뭇가지 모양의 위엄있는 뿔을 지닌다. 그가 지르밟는 발자국마다 꽃과 풀이 돋아나는 생명의 존재다. 그러나 그가 분노하게 되면 감당하기 힘든 저주와 파괴의 화신으로 바뀐다. 나무의 정령 ‘고다마’도 귀엽기 짝이 없지만 기본적으로 해골 이미지인데다 일제히 짤랑대는 소리는 마치 귀신을 부르는 무당의 방울소리처럼 음산하다.

따라서 일본인에게 원시자연은 자연이 아니다. 길들이고 요리해서 문화로 녹여낸 뒤에야만 비로소 자연이 된다. 베르사유 궁전의 엄격한 대칭성은 단지 문화이지만, 자연을 본떠 꾸민 일본의 정원은 자연이다. 나무의 자연스런 성장을 억누르고 비비 꼬이게 만든 분재도 일본식 자연이다. 생선회는 일본의 자연관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다. 사시미(생선회)는 ‘요리된 날것’이고 따라서 가장 사랑받는 자연식이다.

이런 이중적 자연관을 알아야만 일본이 국내외에 저지른 수많은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은 서구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천여년 전부터 자연을 정복해왔다.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600∼850년과 1570∼1670년 사이에 일본의 원시림은 대부분 벌채해 사라졌다. ‘에보시’가 이끄는 타타라 제철집단은 산업화 세력이자, 귀신이 출몰하는 원시자연을 미학적으로 추상화한 친근한 자연으로 바꾸어주는 은인이기도 하다.

그 결과 일본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토목공사의 왕국이 됐다. 댐이 건설되지 않은 하천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해안선은 빙둘러 거의 모두 간척 매립됐다. 환경보건학 교과서에 나오는 인류 최악의 공해병은 모두 일본에서 처음 발생했다. 미나마타 수은중독, 이타이이타이 카드뮴 중독, 다이옥신에 의한 가네미유증, 요카이치시 천식…. 국내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목재 수입국이다. 그 바람에 아시아의 열대림이 결딴나고 있다. 세계 수산물의 10분의 1을 일본인이 먹어치운다. 참다랑어 등 일부 대형 회유어류는 일본인의 입맛 때문에 멸종위기에 몰렸다. 지나간 얘기지만 한반도에서 호랑이, 표범, 곰, 늑대 등이 멸종하게 된 치명타는 일제 때 일본이 벌인 대대적인 ‘해로운 동물 구제사업’이었다. 울릉도를 비롯해 원시림 지대가 대부분 벌목된 것도 일본 통치 때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다른 나라도 이런 자연관과 행동방식의 괴리는 마찬가지다. 아시아가 유럽 못지않은, 오히려 더욱 심한 자연파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다.

인간중심적 자연개발, 그 오만한 타협

숲에 침입한 사람들이 들개를 만나자 제 목숨만 살려고 내던진 여자아이 ‘산’(원령공주)은 자연의 수호천사이지만, 생태주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타타라바의 수장 에보시는 “숲에 빛이 들게 하고 들개를 물리쳐 원령공주를 다시 사람이 되게 하자”고 말한다. 현대문명에게 생태주의는 숲을 지키는 들개처럼 귀찮은 존재가 분명하다. 들개를 제외한 원숭이나 멧돼지 같은 숲의 다른 동물들은 ‘산’을 의심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근본 생태주의자나 급진적 동물해방론자의 곤란한 처지가 떠오른다.

에보시의 손에 숲의 신 ‘시시’는 목이 잘린다. 원령공주와 주인공인 아시타카는 힘을 합쳐 목을 빼앗아 다시 붙인다. 그러나 ‘산’은 “신은 죽었다”고 고집한다. 그는 타협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신이 죽었음을 보여준다. 자연은 길들여지고 있다. 비무장지대 군초소에서 버리는 음식찌꺼기를 먹으러 매일 찾아오는 멧돼지부터 일본 대도시 하천의 비단잉어까지, 그것을 증명한다. 아시타카와 ‘산’의 사랑은 그런 화해를 상징하는 것 같다. 무차별적 개발이 아닌 환경친화형 개발, 세련된 자연보호, 자연하천 만들기와 같은 환경복원은 사실 그런 타협의 결실이다. 아시타카는 산업문명을 상징하는 에보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령공주와 마찬가지로 네 속에도 악마가 들어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신이 죽은 뒤 인류문명이 지구를 망가뜨린 먼 훗날을 그리고 있다. 몰락 이유가 전 지구적 핵전쟁인지(이 영화는 공산권 붕괴 이전인 1984년에 개봉됐다) 아니면 환경오염인지 분명치 않다. 어쨌든 지구의 환경은 인간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됐다. 독기를 내뿜는 거대한 곰팡이 숲과 기괴한 곤충들, 그리고 염산호수로 가득한 ‘부해’가 지구를 뒤덮는다. 인류가 지구에서 우점종의 지위를 물려준다면 아마도 바퀴 같은 곤충이 최우선 후보일 것이다. 바퀴는 사람이라면 죽을 방사선의 50배까지도 견뎌낸다. 만일 <바람계곡…>처럼 산소가 없는 곳이 많아진다면 곰팡이가 숲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발상도 그럴듯하다.

일본의 옛 설화에 나오는 곤충을 사랑하는 별난 공주의 설정을 빈 나우시카는 숲과 개울과 바람이 있는 작은 공동체를 이룬다. 풍력과 농사에 의존하는 이 마을은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이 결국 자급자족적인 소규모 공동체로 회귀할 것이란 예언처럼 보인다. 나우시카는 부해를 태워 없애고 인류문명의 부활시키려 하는 다른 호전적 부족들로부터 오염된 지구를 정화하는 것으로 밝혀진 곰팡이 숲과 그 수호자인 곤충괴물 ‘오무’를 지킨다. 이런 그의 노력은 <원령공주>의 주인공 아시타카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간중심주의라는 점에서 그렇다.

태고적 지구, 될살아나다

곰팡이 숲과 곤충들이 인간이 살기 적당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저질러놓은 오염물질을 정화한다는 대목은 흥미로운 발상이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영화가 나온 뒤 완성된 만화는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바로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부해는 인간이 바꿔놓은 환경에 적응해 나타난 생태계이다. 그것을 다시 인간에 맞는 생태계로 바꾸어놓으면 부해는 죽고 만다. 자기가 죽는 쪽으로 적응하는 생물은 없다. 설사 부해가 사라지는 쪽 진화가 이뤄진다 해도 그 기간은 까마득하게 마련이다. 자연에 진화는 있을지언정 이타심은 없다. 일개미들이 사회성 위를 따로 가지고 아무나 더듬이로 신호를 보내는 개미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것은 착한 심성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기심에 가깝다. 개미사회에서 자매들은 자기와 유전자가 4분의 3이나 똑같다. 개미의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자매 개미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자기가 밥을 먹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사실 지구에 생명이 살아온 35억년은 인류가 존재한 약 500만년과는 비할 바 없이 긴 세월이다. 지구로 볼 때 오히려 인류가 없는 상태가 정상에 가깝다. 이를테면 산소만 해도 그렇다. 생물이 처음 출현했을 때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 광합성을 하는 녹조류가 산소를 대기에 뿜어내고 한참 뒤까지 많은 생물에게 산소는 독가스였다. 그 후예가 아직도 많다. 술 담글 때 마개를 꼭 막는 것은 산소를 싫어하는 발효균이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바람계곡…>은 인류의 미래보다는 지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거대한 곰팡이 숲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기기묘묘한 곤충들의 모습은 약 5억4천만년 전 캠브리아기 생물폭발을 연상시킨다. 당시 바닷속에는 처음으로 딱딱한 몸을 가진 온갖 생물들이 돌아다녔다. 마치 조물주가 찰흙빚기 놀이를 하듯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생물이 태어났다. 아쉽게도 그 대부분은 나중에 멸종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조물주의 상상력은 부분적으로나마 부활한다. <원령공주>에 나오는 시시 신과 야클 그리고 <바람계곡…>의 날개 3쌍인 잠자리와 연꼬리처럼 기다란 날아다니는 벌레, 오무는 상상의 동물인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아름답다. 영화 배경에 나오는 숲과 붓꽃 같은 식물, 물총새나 백로 같은 동물의 사실적인 모습에서는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력과 애정이 느껴진다.

조홍섭/ <한겨레> 과학전문 기자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