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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영화인은 충무로를 떠나라?
2001-02-02

당대의 큰 주먹 임화수, 그리고 5·16이 부른 영화사 통폐합

결국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임화수는 당대에 큰 ‘주먹’이었다. 종로4가쯤에 자리잡고 있던 평화극장의 주인이었는데 그 당시 자유당 시절에는 모든 극장 주변에서 폭력배들이 자리다툼과 세력확장을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임화수는 폭력조직을 넓힐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에게 잘 보여서 이기붕도 이들 폭력조직을 정권유지에 도움이 될까 하고 암묵적으로 비호하면서 급기야는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접근시켰다. 임화수는 이 대통령을 “아버지, 아버지” 하며 충성을 맹서했고 이 대통령도 귀엽게 봐주었다.

이때부터 임화수는 날개를 얻어 영화계에 힘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우선 ‘반공예술단’을 조직하고 모든 영화배우와 연극배우 그리고 현역영화인들을 강제로 입단시키고 스스로 단장이 되어 정부행사에 참여시켰고 불참자는 폭력으로 위협했다. 한 예로 ‘반공예술단’의 큰행사가 열리면 전국에서 촬영중인 영화를 모두 중단하고 서울로 집결시키는데 한번은 코미디언 김희갑(합죽이)이 불참했다. 나중에 그를 불러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임화수는 김희갑의 옆구리를 발로 차서 갈비뼈 몇개가 부러지는 사태가 있었다. 그뒤로부터 모든 영화인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절대명령복종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는 거의 학력이 없어 글자해독을 잘 못하는 대신 숫자의 암기력이 뛰어나 돈거래의 액수는 장부 대신 머리 속에 있을 정도이고 화투의 섯다판에서도 고수였다고 한다. 그처럼 명석한 머리와 주먹은 영화판을 이끌어가는 데 손색이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이승만 정권에 밀착되면서 문교부 장관자리를 탐냈다고도 한다.

4·19학생의거 전야, 그는 동대문쪽에서 종로로 노도처럼 밀려오는 고려대의 데모행진을 막기 위해 수많은 깡패들을 동원, 막대기로 무차별 구타로 수많은 학생들에게 중상을 입히고 여러 명의 목숨을 잃게 했다. 그 죄값으로 그는 사형대에 올랐다. 이 글은 이미 고인이 된 분을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의 잊을 수 없는 돌출사건이었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려는 것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의 구호가 온 누리를 쟁명하는 격동기를 지나 장면 정권이 들어섰지만 ‘못 살겠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승만 독재와 부정부패는 물러났지만 갑자기 등장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인 장면 총리는 이념만 갖추었지 행정력은 무능했다.

서울시청 광장에는 매일같이 각종 업체와 단체들이 무엇을 해달라 무엇을 폐지하라 등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발디딜 틈도 없었다. 우리 영화인들도 매일 그들 군중 틈에 끼어 ‘영화진흥책을!’, ‘사전검열 폐지하라’를 외쳤다. 그때에도 촬영 전 시나리오부터 검열했는데 제작불허, 부분삭제가 많았다. 다행히 ‘표현의 자유를!’ 받아들여 민간인이 주축이 된 ‘영화윤리위원회’의 설립을 허용했다.

분명한 사회적 개혁없이 혼란만 계속되는 와중에서 또다시 4·19혁명의 부상 학생들이 중심이 된 데모가 발생하여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한편 좌파세력이 ‘민주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결성했고 사회불만은 최고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과도기적 혼란은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초래하는 구실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은 영화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영화법의 제정·공포를 선포했다. ‘영화사업의 육성’에 목적으로 내건 이 법령의 요체는 당시 70여개의 제작회사와 군소 프로덕션들이 ‘난립’하고 있으니 영화의 기업화를 위해 이들을 16개사로 통합하여 신규로 등록하라는 것이었다. 소자본의 영화사들이 이 법령의 시행령에서 규정한 등록기준에 강제적으로 적응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등록기준이란 ‘200편 이상의 스튜디오와 녹음·현상시설, 60킬로와트 이상의 조명기재, 3대 이상의 카메라, 그리고 두명 이상의 전속감독과 남녀배우, 5년 이상의 경험이 있는 녹음·현상기사를 갖추어야 하고 연간 15편의 장편영화를 의무적으로 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강제규제에 의해서 16개사가 등록되었지만 여기에서 가장 한탄스러운 것은 개인 프로덕션의 이름으로 제작해온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사실상 영화계를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 영화법은 한국영화계 실정을 너무나 무시한 사태였으며 정부당국의 ‘통제술’이 깔려 있는 듯한 인상이 깊었다.

유현목-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