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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영화, <디펜스>
이영진 2000-04-11

깊은 구덩이가 반드시 좋은 함정은 아니다. 전문가일수록 얕은 함정을 판다. 대신 남는 시간은 수많은 유혹의 덫들을 정교하게 배치하는 데 사용한다. 스릴러물은 특히 그렇다. 계산하지 않고 뭉텅뭉텅 잘라낼 만큼 장면과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 미리 캐릭터와 사건과 복선을 배분해서 마름질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를 연결하는 인과 매듭이 뫼비우스 끈처럼 매끈하게 꼬이는 것이다. 스릴러의 장치들을 끌어모았지만 <디펜스>는 이를 솜씨있게 다루는 데는 실패한 영화다.

한때 촉망받는 검사였지만 지금은 별볼일 없는 변호사 신세인 앤드루. 그에게 어느 날 청각장애인인 화가 제인이 찾아온다. 남편 노비의 폭력에 시달리는 제인이 안쓰러운 앤드루는 이혼소송을 맡게 되고 점점 그녀에게 빠져든다. 문제는 노비가 죽지 않을 경우 이혼이든 위자료든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혼전 계약서. 낌새를 눈치챈 남편을 앤드루는 우발적으로 죽이고 서둘러 사건을 은폐하지만 이번엔 제인이 남편살해혐의로 기소된다. 제인을 변호하기 위해 법정에 선 앤드루는 패소 직전 걸려온 전화 한통이 상황을 뒤집을 때까지 고전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는 이는 앤드루가 아니라 제인과 앤드루의 동료인 여검사 데브라다. 그때서야 앤드루는 둘의 사이를 알아차리고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깨닫는다.

스릴러물엔 변호사나 경찰이 종종 등장한다. 사적인 치정과 공적인 임무 수행에 양다리 걸친 이들은 애초 사건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다. 그들을 인도하는 건 허기에 눈먼 욕망뿐이다. <디펜스>의 앤드루도 마찬가지다. 물론 <디펜스>가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공적 영역의 치부까지 들쑤실 만큼 여유만만한 스릴러영화는 아니다. 단순한 캐릭터와 느슨한 법정의 대결 구도를 팽팽하게 세우는 대신 앤드루와 제인의 미지근한 섹스장면만을 반복해서 끼워넣기 급급한 <디펜스>는 잠깐 개봉한 뒤 비디오 출시를 겨냥한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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